[Opinion] 예술가가 사라진 사람들을 기억하는 법 [미술/전시]

글 입력 2020.12.18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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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기록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과거에 저지른 잘못을 다시는 저지르지 않게 주의하여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잊고 싶을 정도로 잔인하고 아픈 역사일수록 우리는 더욱 그 역사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 끄집어내어 잊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예술가의 역할 중 하나는 바로 이렇게, 사람들에게 잊히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화두를 던지는 것이다.


현대미술 작가 크리스티앙 볼탕스키는 1944년 프랑스에서 태어나 유대인 생존자들에게 둘러싸여 자라왔다. 가족을 잔인한 학살에 희생당한 사람들을 어려서부터 봐 온 그에겐 ‘사라진 사람들의 시간’이라는 것이 주변인들로 인해 더욱더 또렷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는 그 ‘사라진 사람들’이 잊히지 않게 작품 속에 그들을 불러와 그 역사를 끄집어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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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앙 볼탕스키, 《오데사 기념비》, 1991


 

이 작품은 마치 평면회화의 꼴라주처럼 캔버스 위에 각각 다른 이미지를 붙이듯, 전구와 사진으로 각각 다른 물체를 배열해 놓았다.


흑백 사진은 원래 대비가 강하기도 하지만 전구에서 나오는 강한 조명 때문에 더욱 큰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영화나 삽화에서 등장하는 귀신은 대부분 흰색과 검은색의 강한 대비로 표현된다. 강한 흑백의 대비가 ‘살아있지 않은 것’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이 작품 속 흑백으로 표현된 아이들은 현재 살아있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


사진은 단 하나의 시간에 단 하나의 모습을 찍어냄으로써 지나간 시간을 정착시킬 수 있다는 속성을 지닌다. 그리고 이러한 속성으로 인해 인간의 부재와 죽음의 의미는 더욱 커진다. 만약 사진 속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살아있다고 하더라도, 저 순간 사진을 찍었던 아이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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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앙 볼탕스키, 《La fete de Pourim》, 1989

 


사진 속 아이들은 익명이지만 1939년 프랑스의 퓨림(유대인이 봄에 하는 축제)에서 찍은 단체 사진에서 신원이 증명됐다. 작가는 이 사진을 다시 찍어서 자르고, 얼굴을 확대하고, 살아있지 않은 인간처럼 보이도록 강한 대비를 넣고, 원본 사진을 조작했다.


조명은 언뜻 보면 마치 교회 제단의 양초를 위에서 바라본 것 같다. 만약에 사진 속 아이들이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 때 희생된 아이들이라면 그들의 죽음을 단지 허무하고 슬픈 것뿐만이 아닌, 성스러운 것으로 인식되고, 추모의 의미를 나타낸다고 볼 수도 있다.


전구와 사진은 세로 폭 제단화의 형태를 이루며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사각형의 액자는 대칭을 이루며 반복되고 있다는 것과 전구의 형태가 동일하다는 것은 규칙성을 주지만 반대로 이리저리 꼬인 전깃줄은 마치 자유로운 드로잉 선처럼 불규칙하다.

 

이러한 규칙성과 불규칙성의 대비는 극적이면서도 미묘한 조형성을 이루고 있다. 반복되며 쌓아 올려지는 모습의 액자는 어떠한 사건 혹은 기억이 축적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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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앙 볼탕스키


 

크리스티앙 볼탕스키의 작품은 감상자의 지나간 유년기에 대한 상실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고, 작가 크리스티앙 볼탕스키가 숨어 지내야만 했던 7년의 기록이라고 해석할 수도, 유대인 학살에 희생된 사람들을 추모함과 동시에 상기시키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진 속 아이들의 얼굴이 모두 다른 것으로 보아 작가 개인의 유년기라고 해석하기보단 감상자의 유년기 혹은 희생된 사람들로 해석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사진 속 아이들의 얼굴은 그 당시 그 장소에 분명히 존재했던 아이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진은 존재했던 아이들의 기억을 담고 있다.

 

이 기억들은 똑같이 재현될 수 없기 때문에 기억 속 사건은 ‘과거의 사건’이며 우리는 ‘현재’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그럼으로써 부재를 더욱 크게 느끼게 한다. 우리는 부재를 느낌으로써 그들을 다시 한번 더 생각하게 된다.

 

작가 크리스티앙 볼탕스키는 “예술가가 된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기 위함이요 소멸하기 위함입니다.”라는 말을 통해 작품과 관람자 사이 자신의 위치를 밝혔다. 볼탕스키가 생각하는 예술가의 위치는 각자 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들에게 똑같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 그들이 어떠한 주제에 다가갈 수 있도록 자극을 주고 예술가 자신은 더 이상 그들의 생각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잊히지 말아야 할 주제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고 작가 자신은 그들의 기억 속에서 잊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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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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