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삶과 죽음, 그 경계선에 서서 - 죽음을 그린 화가들, 순간 속 영원을 담다

글 입력 2020.12.10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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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유서를 쓰곤 한다.

 

연말연시면 한 번씩 꼭 쓰고, 힘들거나 유독 글을 쓰고 싶은 밤이 찾아오면 매번 유서라는 제목의 글을 쓴다. 내가 유서를 쓰고 있는 것을 알게 되면 사람들은 괜히 부정적인 이미지에 안 좋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게 아니냐라는 질문을 종종 한다. 물론 그런 의도는 아니다. 단지 오늘 하루를 기록하는 가장 진실한 글의 카테고리가 유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 두렵지만 다른 의미로 기대된다. 삶의 끝을 마주하면 지나간 세월의 흔적을 세심하게 돌아볼 수 있게 된다. 오늘 하루만 한정 지어 생각한다 해도 공감되지 않는가? 얼마나 많은 아쉬움과 감정을 남긴 하루였는가.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미안해하며, 또 어떠한 감사함을 느낀 하루였는가. 일기를 쓰는 행위와 의도는 같을지 몰라도 조금 더 진지하게 쓰는 글, 그것이 바로 유서다.

 

유서에는 나라는 사람을 정의하고 해석하는 과정이 담겨있다. 삶의 끝자락에 서서 지나온 길을 배경 삼아 그리는 그림은 그 얼마나 숭고한가. 어쩌면 내가 유서를 쓰는 이유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함께 막연한 경외감이 있었을 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돌이켜봐도 그렇다. 세계 각지의 존재하는 우리의 조상들은 현생보다 사후세계를 더욱 염려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며, 종교계에선 죽음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며 인간의 존엄성을 고취하고 가치관을 넓혀주기도 했다.

 

예술계도 죽음을 거부하지 않았다. 사랑과 죽음 두 존재는 인간의 창의성을 넓혀주는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오히려 창의력이라는 힘은 두 존재로부터 파생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게 처음으로 '죽음'의 존재를 가시적으로 마주한 건, 단테의 '신곡'을 봤을 때다. 보티첼리의 '지옥의 지도'라는 작품을 보며 글로 쓰여 있는 단테의 세계를 마주할 수 있었다. 죽음의 존재가 단테에게 영감을 준 것처럼 단테의 '신곡'은 이후 수많은 예술가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파생된 수많은 작품으로부터 난, 사람들이 정의하고, 표현하고 있는 죽음의 형태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왠지 모르게 신비로웠던 보티첼리의 그림이 나를 다른 세계로 인도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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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점의 명화와 24명의 예술가의 이야기, 책을 읽는 동안 죽음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 죽음까지의 과정, 죽음의 순간, 그리고 죽음으로부터 파생되는 수많은 것들까지, 대부분의 것들이 사람의 감정으로 이해 가능한 것들이었다.

 

 

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은 나와 우리에게 꽤 멀게 느껴진다. 아무리 생각하고 글로 써봐도 직접 경험하지 않은 일들은 막연한 상상에 가깝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소원한 관계라 하더라도, 우리가 죽음과 친해질 방법은 있다. 생명과 죽음의 경계선에 매일을 살고 있는 우리는 죽음과 조금 더 친해질 필요가 있다. 우리는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기 위해 그 경계선 위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다. 그게 삶이고 우리가 걷는 길의 방향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존재를 대변하는 존재, 예술가들의 표현은 그런 의미에서 눈여겨봐야 한다. 그들의 시대에, 그들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죽음은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현재 우리의 시선과는 어떠한 차이점이 있는지, 생각보다 호기심을 끌 수 있는 요소들이 많다. 책을 읽으면서도 그림과 조각엔 문외한인 나일지라도 잘 알고 있던 작품에 이렇게나 심오한 죽음의 철학이 담겨있을지는 몰랐어서 놀란 적이 있다.

 


 

오귀스트 로댕 "죽음을 상상하고 경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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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댕 - 생각하는 사람

 

 

며칠 전에 '까미유 클로델(1989)'이라는 영화를 봤다. 비운의 천재 조각가, '까미유 클로델'의 이야기에 집중하게 된 순간이었지만, 주인공만큼이나 기억에 남는 인물이 있었다. 바로 까미유 클로델의 애인인 '오귀스트 로댕', 여성 편력이 심한 그였지만, 개인사를 가려버릴 만큼 그의 위대한 재능은 영화를 통해 여실히 느껴졌다.

 

그의 대표작인 <생각하는 사람>은 <지옥의 문>이라는 거대한 작품의 일부이다. <지옥의 문>에선 180여 개에 달하는 다양한 동작과 얼굴의 군상을 볼 수 있는데 <생각하는 사람> 작품의 중앙 상단부에 위치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지옥의 문>은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인물들을 소재로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그래서 <생각하는 사람>은 위에서 지옥에 떨어진 영혼들을 바라본다. 지옥에 떨어져 고통에 울부짖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하는 사람이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다름 아닌 죽음과 삶, 인간의 존재에 대한 의미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유명한 작품에 담긴 고민을 엿볼 수 있었다. 오늘이 내 삶의 마지막이라는 소중한 의문에는 죽음과 그 이후의 것들에 대한 상상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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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댕 - 지옥의 문

 

 

 

프란시스코 고야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의 초상"


 

2018년도 1월, 스페인에서 나는 새해를 맞이했다. 바르셀로나에서 시작한 여행은 이베리아 반도를 한 바퀴 돌았고 여행의 종착지로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를 선택했다. 사랑스럽고 아름다웠던 추억들을 뒤로하고 아쉬움의 순간을 바라보고 있는 날이었다. 출국 며칠 전, 일정이 남았던 난, 숙소 근처의 '프라도 미술관'을 방문했고, 유명한 스페인 작가들의 작품을 마주할 수 있었다.

 

여행을 하는 동안, 내 스페인어 실력은 참담했다. 할 줄 아는 문장은, '소금 적게 넣어주세요.'와 '화장실 어디에 있어요?'를 비롯한 몇 가지의 생존용어와 정말 간단한 몇 가지 단어뿐이었다. 하지만 미술관에서 언어의 장벽은 허물어졌다. 물론 영어로 번역되어있어서 작가의 이름과 작품 설명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도 있지만, 국적과 언어를 불문하고 예술과들과 공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프란시스코 고야'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여행 이야기를 시작한 것은 맞지만, 내가 프라도 미술관에서 기억에 남는 작가가 두 명 있었다. 물론 첫 번째는 고야. 아마 특별전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어디를 가나 'Goya'라는 이름이 붙어있었다. 쉽게 잊을 수 있는 횟수가 아니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바로 '벨라스케즈'. 한참을 돌아다니다 다리가 저려 잠깐 앉아 있었던 소파 앞에는 '벨라스케즈'의 '분홍 옷을 입은 마르가리타 공주'라는 그림이 있었다.

 

다들 그런 경험 한 번씩은 잊지 않는가, 이유는 모르겠지만 홀린 듯이 멍하게 보게 되는 존재를 마주한 경험. 귀국 하고 군 입대를 한 후 전역을 하는 동안 작품의 이름도 몰랐지만, 이상하게도 책에서, tv에서 계속 만나게 되었다. '아 이렇게 유명한 그림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고야의 작품인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

 

그렇다. 프라도 박물관에서 기괴한 장면에 놀라 몇 분을 멍하니 보고 있던 작품 중 하나였다. 그 당시엔 그리스 로마신화를 은연중에 생각했던 것 같다. 오디세우스의 항해에 등장하는 외눈박이 괴물처럼 무해한 사람들을 잡아먹는 존재가 아닐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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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추측은 반 정도는 맞았다. 그림에 등장하는 괴물 '사투르누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크로노스(Chronos)'를 의미했다. 사투르누스는 로마식 표현이었다. 그는 언젠가 아들 중 한 명이 자신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할 것이라는 예언을 듣는다. 그 후 자식이 태어날 때마다 먹어 치우게 되었고 유명한 결말이자 위대한 신화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상황이 발생한다. 크로노스의 아들인 '제우스'는 아버지를 제압하고 최고 신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어린 시절부터 크로노스가 아들을 먹는 상상을 한 적이 있긴 하다. 만화나 소설에서 자주 묘사가 되었고 돌을 삼키듯이 꿀꺽, 먹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신화의 내용 중 제우스가 크로노스의 배 안에 있는 자신의 형제들을 구하는 장면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 이런, 지나치게 사실적이고 현실적이다. 오디세우스의 에피소드 중 등장하는, 죄 없는 양치기 소년에 불과했을 외눈박이 괴물한테 미안해질 지경이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작품을 다시 보면 죽음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괴물의 표정이 인상 깊게 느껴진다. 언젠가 올 죽음에 대한 예언을 들은 그는, 그날이 언제 올지도 모른 채 두려움에 떨고 있다. 항상 불안을 안고 살아가는 삶, 그것만큼 고통스럽고 힘든 삶은 없을 것이다.

 

괴물을 동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죽음의 존재가 불러오는 인간의 폭력성은 생각해 볼 만하다. 죽음 앞에선 한없이도 무력해지는 우리의 존재를 느끼게 된다. 죽음의 때를 알고 기다리는 지혜를 가질 수는 없는 것일까.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죽음을 인식하는 것은 삶의 시간이 한정되어 있음을 다시금 확인하는 것입니다. 매일의 삶이란 결국 시간을 먹으며 이어가는 삶이기에, 주어진 시간 이후에는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하는 마지막이 있음을 인정하고 오늘을 사는 것이 삶의 지혜이겠지요.

 

 

삶과 죽음, 그것의 무게를 알고 특징을 알아가는 것은 인간의 능력이자 권리라고 생각한다. 화가들의 인생과 표현을 통해 나만의 방법을 알아갈 수 있다는 사실은 나에게 축복이자 시야를 넓혀줄 길잡이로 느껴진다.

 

  


 

 

죽음을 그린 화가들, 순간 속 영원을 담다
- 삶이 죽음에 묻다 -
 

지은이
박인조

출판사 : 지식의숲

분야
미술일반/교양

규격
신국판변형(142×210㎜)

쪽 수 : 284쪽

발행일
2020년 11월 20일

정가 : 15,800원

ISBN
979-11-90927-98-7 (0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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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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