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나의 자기소개서 [사람]

글 입력 2020.12.09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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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수 1년, 휴학 1년을 했으니 제때 맞춰 학교를 졸업한 주변 친구들은 취업했거나 취업을 준비 중이다. 내게도 머지않은 미래일 테고. 그래서 그런지 친구들을 만나면 20대 초반 때와 달리 부쩍 취업을 대화 주제로 삼곤 하는데, 얼마 전 지원서에 관한 얘기를 나누던 중, 올해 초 아트인사이트 에디터에 지원할 때 작성했던 지원서가 떠올랐다. 내가 언제 또 그런 지원서를 써볼 수 있을까. 보통의 서류에서 금기시되는 추상적인 표현, 불필요한 미사여구, 1인칭 표현이 난무하는 지원서를 말이다.

 

그렇지만, 그래서 좋았다. 며칠간 지원서를 쓰고 고치고 또 고치면서 조급하고 간절한 마음에 애가 타기도 했지만 돌이켜 보니 내가 하고 싶었던 얘기를, 내가 살아온 얘기를 할 수 있음에, 그리고 누군가가 들어줄 거라는 생각에 그 시간이 참 즐겁고 재밌던 것 같다. 왠지 모르게 아트인사이트 지원서엔 뭐든 써도 될 것 같았다. 나라는 사람을 알리기 위해 추상적인 표현이 필요하다면 그리해도 될 것 같았고, 내 얘기를 하기 위해 불필요한 미사여구가 굳이 필요하다면 굳이 덧붙여도 될 것 같았다. 뭐랄까, 모든 걸 포용해줄 것 같았달까.

 

그래서 아쉬움이 남지 않을 만큼 마음껏 쏟아냈고 그렇기에 이제 와 다시 읽는다 한들 딱히 고쳐 쓰고 싶은 부분도 없다. 아무튼, 그렇게 쓴 지원서로 에디터에 합격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지나치리만큼 매력적인 모집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최소한의 인터뷰도 없이 글만으로 사람을 뽑는다니 말이다)

 

지원서를 쓰면서 다른 이들은 나와 같은 질문에 어떻게 답했을지 궁금해서 꽤나 많은 전, 현 에디터들의 글을 찾아 읽었다. 남의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나만의 것이 중요하다는 걸 머리로는 잘 알고 있지만, 타인을 의식 않는 것이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니까. 그리고, 분명 후에 에디터를 지원할 누군가 중 나처럼 열심히 다른 이의 지원서를 찾아볼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 누군가를 위해 또, 지원서를 읽을 때면 다시금 각성하는 나를 위해 내 지원서의 몇 가지 문답을 공개해본다.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자신을 나타내는 5~7 단어로 표현 + 간단한 이유)


  

안녕하세요, 아트인사이트 오피니언 에디터에 지원하게 된 강안나입니다.


자기 소개란을 보고 긍정적인 사람, 따뜻한 사람 등 추상적인 표현이 우선 떠올랐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저는 늘 가방에 책 한 권은 꼭 들고 다니는 활자성애자 입니다. 책과 글을 좋아합니다. 손으로 만드는 것을 전공하고 업으로 삼고 싶어 하는 사람이지만 작업을 할 때도 읽고 쓴 것을 손으로 형상화 할 만큼 사실 그 무엇보다도 언어를 애호합니다.

 

제게 언어란 때론 눈물겹게 절실하기도 하고 짜증스러울 정도로 불필요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 안의 잡음을 잠재우고 결을 부드러이 만드는 것은 언제나 언어의 풍요였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언어의 매개체인 책은 제게 마음의 안식처가 되기도 하고 어디든 동행하는 친구가 되기도 하고 미지의 것들에 대한 가르침을 주는 스승이 되기도 합니다.

 

독서를 즐겨하는 사람이라면 한 권의 책이 주는 안정감이 무엇인지 공감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언어와 책을 애호하게 된 데에는 어릴 적 저를 옆에 눕혀놓고 잠들기 전까지 매일 책을 읽어주시던 아버지의 영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부모님께서는 단 한 번도 제게 무언가를 강요하신 적도, 제 인생의 주도권을 앗아가신 적도 없는 분들이시지만 어릴 적부터 유일하게 강조하신 것이 어떤 책이든 구애받지 말고 늘 가까이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부모님보다는 친구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많아지는 사춘기를 겪고 치열했던 수험생활을 보내면서 자연스레 책과는 멀어졌습니다. 그리곤 대학에 합격하여 집에서 나와 가족과 떨어져 지내면서 가장 가까워야 할 가족과 가장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부모를 이해할 수 없었고 그들로부터 이해받지 못한다는 생각에 절망스러웠을 때 제가 찾게 된 것은 책이었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모든 것이 변하고 나 자신조차 변했을 때 변하지 않은 건 책 속의 언어뿐이라는 것을.

 

그것들은 저를 위로했고 내가 겪고 있는 상황과 부모의 마음을 이해시켜주었습니다. 제게 활자란, 책이란, 언어란 그런 존재이고 그렇기에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문화예술은 무엇이라 생각 하시나요?


  

문화예술이란 위로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책의 한 구절처럼 위로는 단지 뜨거운 인간애와 따뜻한 제스처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은 제대로 위로할 수 없습니다. 이는 문화에서도 그렇고 예술에서도 그렇고 인생에서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같은 문화예술을 향유하고 소통하고 사색하는 우리는 이를 통해 서로를 위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제게는 그랬습니다.

 

제가 가장 힘들 때 절 온전히 위로해주었던 것은 네가 아픈 만큼 나도 아프다고, 우린 모두 그렇게 살아간다는 비정한 인간의 말이 아니었습니다. 정확히 인식한 책이, 영화가, 음악이, 미술이 저를 위로했습니다. 그것들로부터 이해받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스무 살, 처음 이별을 겪었을 땐 하루에 다섯 편이 넘는 영화를 보기도 했습니다. <이터널 선샤인> <클로저> <봄날은 간다> 등등 사랑과 이별을 소재로 한 영화를 닥치는 대로 날을 지새워가며 보았고 내내 울었습니다. 시간이 약이라고 말하는 주변의 위로는 들리지 않았지만 2시간짜리 영상에 위로받았다고 느꼈습니다.

 

스물셋, 디자인학부 3학년. 졸업 학년인 4학년을 앞두고 혼란스러웠습니다. 대학원에 진학해야 할지 취업을 준비해야 할지 끝없는 고민만 하던 때에 바우하우스 100주년을 기념해 금호미술관에서 열린 <바우하우스와 현대 생활> 전시를 보게 되었고 100년 전 작품들을 보며 내가 걸어야 하는 길에 확신을 얻었습니다.

 

교수님, 선배들이 쏟아 내는 조언은 들리지 않았지만 고요한 전시장 안에서 바우하우스의 정신을 되새기고 그동안 해왔던 공부를 떠올리며 아득하던 미래의 갈피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이 같은 경험은 비단 저만의 경험이 아닐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는 알게 모르게 문화예술로부터 위로를 받으며 살아갑니다.

 

 

 

2020-2024년도 자신의 비전과 계획이 있으신가요?


  

거창한 비전과 구체적인 계획은 없습니다. 당장의 내일도 내다보지 못합니다. 하지만 무엇도 확신할 수 없기에, 순간에 하루에 최선을 다할 것이고 오늘을 살겠다고 매일 다짐합니다. 그렇게 거의 모든 날, 내일이면 그리워질 오늘을 살고 있습니다. 때로는 버티는 오늘을 보낸 적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오늘을 보낸 적도 있지만, 심장이 터질 만큼 행복한 오늘을 보낸 적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오늘이 모여 동력이 되고 저를 또 살아가게 합니다.


소소한 계획으로는 그동안 충실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 충실해지려 합니다. 타지에서 생활한다는 핑계로 가족에게 소홀했고 친구들 얼굴을 일 년에 몇 번 보는 것조차 어려웠는데 이제는 사랑하는 그들에게 애정을 쏟아보려 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시작일지도 모르는 졸업 전시를 앞두고 아쉬움 없는 전시를 위해 마지막 지반 다지기에 돌입할 생각입니다.

 

학부 1학년 때, 삶을 사색하고 고찰하며 글을 쓰고 그것을 그림과 조형으로 표현하고 예술을 향유하는 것은 작가가 되고자 하는 사람의 가장 좋은 습관이자 자세라고 격려해주셨던 존경하는 교수님의 말씀을 잊지 않고 되뇝니다. 넓은 시야로 깊이 느끼고 내 것으로 만들려는 노력을 계속할 것입니다.

 

정처 없는 여행도 떠나 볼 계획입니다. 발길이 닿는 대로 움직이고 새로운 인연들을 만나며 계속해서 나에 대해 알아가고 싶습니다. 연애도 지금처럼만 열렬히 해보려 합니다. 무모하기도 하고 때론 난폭하기도 하지만 사랑만큼 인간을 성장시키는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저는 오늘을 살아갈 것입니다.

 

 

 

자유발언을 부탁드립니다.


 

도예는 흙이라는 유연한 소재를 가지고 안에서 밖으로 힘을 가하여 형태를 쌓을 때, 무수한 손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가장 아름다운 곡선을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저는 인생은 도예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스물 네 살, 누군가는 콧방귀를 뀔 수도 있겠지만 전 제가 아직 충분히 어리다고 생각합니다. 인생을 큰 보폭으로 혹은 지름길로 빠르게 살아가고 싶은 욕심은 없습니다. 남들보다 조금 느리더라도 내 속도 안에서 돌아보며 천천히 가보고 싶습니다. 이 길도 가보고 저 길도 가보고 갈림길에선 고민도 해보고 그렇게 가다가 중간에 마음에 드는 곳이 생기면 잠시 머물며 쉬어가고. 또 너무 늦는다 싶으면 잰걸음으로 속도를 내보기도 하고 도중에 함께할 친구를 만나 서로의 세계를 나누기도 하고. 그렇게 살아가고 싶습니다. 그리고 지나온 그 모든 길과 걸음이 제 인생의 아름다운 곡선을 만들어 주리라 믿습니다.


아트인사이트의 에디터가 되는 것이 제 다섯 번째 걸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지나온 첫 번째 길은 원치 않았던 대학과 전공에 진학했던 것입니다. 대입의 실패는 저로 하여금 많은 것을 돌아보게 만들었습니다. 열아홉의 저는 오만했고 교만했고 이기적이었습니다. 경쟁과 목표밖에 몰랐고 옆을 보는 건 어리석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후 실패를 인정하고 극복하느라 바빴고 제가 그리 특별하지 않다는 걸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 첫 번째 길은 두 번째 길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두 번째 길은 원하지 않았던 공예 전공의 매력에 푹 젖은 제가, 바라는 학교의 그 전공에 합격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결실을 맺은 것입니다. 여섯 살, 화가가 되겠다며 온 집안 벽지에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려대던 시절부터 대기업의 시각 디자이너가 되겠다던 열아홉까지 도예는 단 한 번도 고려해본 적 없는 길이었습니다. 첫 번째 길이 다른 길이었다면 지금의 저는 어떤 모습일지 종종 상상하기도 합니다.


세 번째 길은 작지만, 사업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내가 만든 것을 좋아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가 됐든 두 개가 됐든 팔아보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하여 인스타그램 스마트스토어 플리마켓 페어 등에서의 판매를 통해 이론으로는 결코 알 수 없는 것들을 살갗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네 번째 길은 휴학을 선택한 것입니다. 3년을 달려오며 많이 지쳤습니다. 1학년 때의 열정은 사라졌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만 가득했습니다. 하루하루를 보낸다는 생각보단 버틴다고 생각했고 내 삶의 주도권이 내게 있긴 한 걸까 하며 깊은 상실감에 빠지곤 했습니다. 이제는 학업에서 벗어나 온전히 나만의 시간을 보내며 나에 대해 알아가보려 합니다. 나는 어떤 삶을 구축하고자 하는지, 나는 어떤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지, 나는 무얼 사랑하는지. 그래서 다섯 번째 길인 아트인사이트 에디터에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나를 위해 내가 사랑하는 문화예술과 글을 열렬히 향유하고 마음껏 품어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플랫폼의 구성원들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저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강한 사람이기에 지금 내딛은 이 다섯 번째 걸음이 뒤따라 올 많은 걸음의 희망봉이 되리라, 그 끝엔 분명 아름다운 곡선을 찾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강안나.jpg

 


[강안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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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
  •  
  • 한국화친구
    • 안에서 나오는 흔적들이 마냥 무르고 투박하고 밉게만 느껴졌는데, 이 또한 아름다운 곡선을 만들어나가기 위한 과정이라 생각하니 괜스레 맘이 편해집니다. 위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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