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산책의 미학 [사람]

무작정 걷는 것부터, 즐거움을 향유하는 산책까지
글 입력 2020.11.26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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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으로 나가자!


 

어느새 사람과 사람 사이에 거리를 두는 게 익숙해졌다. 만남은 조심스러워지고, 대화는 꺼려지며 밖을 나가는 것조차 뜸해진 상황. 나 또한 휴학한 후 일하는 시간을 제외하면 외출 빈도가 눈에 띄게 낮아진 것을 느끼고 있다.

 

지난 주말 집에 틀어박혀 온종일 노트북으로 유튜브를 헤매다 문득 창밖을 보니 언제 겨울이 온 건지 가을의 다채로운 색이 벗겨진 세상을 마주했다. 나름대로 기록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작은 변화도 세심하게 관찰하는 ‘관찰자’라 자부했던 터라 그 시간이 부끄럽기도, 나가는 게 힘들어진 요즘의 상황이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이 순간을 직접 느껴야겠다는 조급함에 외투를 챙겨 밖으로 나갔다.


‘일단 걷자’라는 마음으로 나와 한동안 즐겨 걸었던 집 앞 한강공원으로 향했다. 산책하는 걸 꽤 좋아했던 것 같은데 언제부터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았던 건지 곱씹다 공원에 도착했고, 강변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걷다 보니 산책이라는 행위에 관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일단 걷는다


  

산책을 퍽 좋아했다. 동행이 있을 때는 걸으며 대화하기보다 멈춰서 온전히 집중하길 좋아하는 편이라, 생각을 정리하거나 걷고 싶을 때는 대부분 홀로 산책하곤 한다. 단순히 반복되는 몸의 움직임과 이에 맞춰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짐이 조금은 덜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다 의외의 풍경을 만나면 멈춰서 한참을 바라보고, 어떤 방식으로든 기록으로 남겼던 것 같다. 그 기록은 다시 꺼내 볼 때마다 순간의 감각을 떠올리게 해주는 중요한 조각이다.

 

본가에는 집 앞에 야트막한 (역설적이게도 뒷산으로 불리우는) 산이 있어 그곳이 나의 산책 루트였는데, 공기는 차갑고 볕은 따가운 가을이 산책하기에 가장 좋았다. 그래서인지 스마트폰 사진첩에는 가을의 산길 사진이 차곡차곡 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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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할 때 종종 필름카메라를 가져간다. 눈으로 보는 것과 스마트폰 화면, 필름카메라의 뷰파인더는 담기는 이미지는 미묘하게 다르다.

 



관찰하며 걷는다 ; 산책


 

산에서의 산책은 자연이 지닌 속성 때문에 늘 새롭다. 매일 다른 바람과 햇볕에 산을 이루는 대지와 식물의 모습은 미세하게 달라진다. 그림자가 드리운 형태에 따라 공간의 새로운 인상을 발견하고, 서로 뒤엉킨 풀들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나름의 치열한 경쟁과 질서 속에서 크고 작게 자라며 조화를 이루는 사실을 깨닫는다.

 

도시의 거대하고 빠른 변화와 대조되는 이 섬세하고 경이로운 관찰의 순간은 삶과 생명에 대한 통찰력을 얻는 시간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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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토리는 정말 도토리처럼 생겼다. 그날 찍은 필름을 현상한 사진과 본가에 있는 도토리.

 

 

웃긴 이야기로 들리겠지만, 도토리는 정말 도토리처럼 생겼다! 이 사실을 최근에 알게 되었는데, 그 뒷산을 산책하다 발에 뭔가 채여서 보니 도토리가 굴러다니고 있었고, 그림으로 보던 모습과 똑같이 생겨 신기해하면서도 차가운 환경에도 생명을 품은 열매의 온기가 왠지 기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끈하고 따뜻한, 그림과 똑 닮은 도토리는 몇 번의 계절을 지나며 맺은 결실임이 틀림없었다. 내 손가락 한마디만 한 열매를 손에 꼭 쥐고 걷다 집으로 가져와 가족에게 자랑했다.

 

이게 뭐라고 내 마음이 뿌듯한 건지, 세월을 견디고 우뚝 선 나무를 보며 느끼는 자연의 장엄함과는 조금 다른, 작은 생명력이 내 손에 쥐어져 있던 감각은 보잘것없게 느껴졌던 일상을 견딜 다짐이 되었다.




즐기며 걷는다 ; 도시 산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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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산책루트 중 하나는 남산타워까지 한눈에 보이는 명당이다. 고개를 돌리면 인왕산이 보인다.

 

 

풍경 속 작고 귀여운 조각을 찾는 자연의 산책도 있는 한편, 다채로운 즐거움을 얻는 산책도 있다. 지금 사는 대도시 서울에서 가장 좋아하는 산책 루트는 상수 나들목에서 이어지는 한강공원이나 망원에서 합정사이, 인왕산자락을 따라 나 있는 골목길이다.

 

길은 각각의 풍경을 담고 있는데, 거대한 빌딩과 아스팔트나 보도블록으로 잘 다듬어진 도로 사이로 산과 강, 나지막한 건물이 이어지는, 새것과 옛것이 뒤섞인 이미지가 꽤 매력적이다. 그래서 도시에서의 산책은 속도를 거스르듯, 빠르게 움직이는 사람들과 자동차 사이로 천천히 걸으며 눈을 사로잡는 흥미로운 조각들을 쫓는 묘미가 있다.


“악의 꽃”으로 잘 알려진 19세기 프랑스 시인 샤를 보들레르는 “도시의 볼거리를 즐기면서 아스팔트 위에서 채집·조사하는, 즉 ‘산보하기’를 행하는 사람(벤야민, 2005: 128)”을 ‘도시 산책자’ 혹은 ‘산보자’라고 불렀다. 이들은 멋지게 차려입고 도시의 풍경에서 한 발 떨어져 온종일 도시를 배회하며 끝없는 호기심으로 도시의 사람과 도시의 새롭고 흥미로운 조각(예를 들자면 새로 생긴 가게나 유행하는 패션, 흥미로운 책 등)을 관찰하는 사람이다.

 

또한 도시 속 개성을 잃고 휩쓸려 가는 군중 사이에서 개인의 자유의지로 원하는 거리와 속도를 유지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이러한 보들레르의 산책자 개념은 도시를 산책하며 느꼈던 막연한 감정에 새로운 시각을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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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도시 산책자'와 이들이 모였던 공간인 '아케이드'를 묘사한 작품. 위쪽 사진의 출처는 parisinsidersguide

 

 

지나는 사람들, 번화한 거리를 관찰하며 ‘요즘은 이런 게 유행이구나’, ‘저런 인테리어가 자주 보이네’, ‘저런 홍보 방법도 있구나!’라며 흥미로운 모습을 찾고 수집하는 재미는 보들레르가 이야기한 산책자의 태도와 유사하게 느껴졌다.

 

시각디자인이라는 전공 특성상 사람들의 행동 양상이나 사회적 흐름, 새로운 것을 능동적으로 포착하는 습관이 생겼는데, 그 습관 덕에 흐름을 감지하고 이에 따라 바뀌는 도시의 모습을 지켜보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이는 빠르게 변화하는 도시의 몇 안되는 긍정적 측면이라 생각한다).




도시를 배회하는 산책자를 위한 새로운 공간 ; 아케이드 서울


 

홍대 앞 ‘걷고싶은거리’ 한가운데 거대한 복합문화공간이 들어섰다. 이름은 ‘아케이드 서울(Arcade Seoul)’. 보들레르의 도시 산책자 개념이 등장할 무렵 존재했던 ‘아케이드’는 현대 백화점의 전신이라 할 수 있다.

 

파리 만국박람회 당시 건축재료로 급부상한 철과 유리로 지어졌으며 유행을 이끄는 상품들이 잔뜩 전시되는 장소이자, 도시 산책자로 대표되는 댄디나 귀족들이 모이는 공간이었다.

 

관조하는 주체이자 대상이 되는 산책자들, 최첨단 상품과 기술이 밀집된 이곳은 도시의 욕망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케이드 서울은 이러한 공간적 개념을 가져와 나름의 해석을 통해 ‘도시적 감수성을 즐길 수 있는 배회지’를 컨셉으로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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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케이드 서울 꼭대기에 위치한 카페. 오른쪽은 아케이드 서울 인스타그램 피드로, 각종 행사 소식과 안내사항을 확인할 수 있다.

 

 

건물이 지어질 당시, ‘아케이드 서울’이라는 간판만 보고 ‘설마.. 내가 아는 그 아케이드?’라는 생각이 스쳤었는데, 실제 아케이드를 모티프로 설계된 공간이라는 걸 알게 된 후 어떤 모습일까 엄청나게 기대했었고, 비로소 방문했을 때는 신비로운 유적지를 연상시키는 매력적인 공간을 구경하는 재미에 푹 빠졌었다.

 

홍대 한복판에 이런 거대한 건물을 짓고, 유물 같은 오브제를 판매하는 물품과 함께 배치한 과감함부터, 꼭대기 층에 위치한 카페의 한껏 절제된 공간 곳곳에 올려진 암석들이 탄성을 자아냈다.

 

동행한 지인과 ‘이곳은 자본이 없다면 절대 시도하지 못할 부분을 마음껏 구현한 곳이 아닌가’하며 열띤 대화를 나누었는데, 이 멋진 공간에서 다양한 문화·예술적 활동이 이루어지며 멋진 사람들이 잔뜩 모이는 문화의 새로운 구심점이 되길 바라는 낙관적 희망을 얻어 즐거운 시간이었다.




다시, 마음껏 산책할 수 있을 때까지



무작정 걷는 것부터 즐거움을 향유하는 산책, 산책자를 위한 공간까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합정에 와있었다.

 

나를 스쳐 가는 사람들의 얼굴에 모두 마스크가 씌워진 모습을 보고는 도시 산책자들이 아케이드에 모이려면 조금 더 오래 기다려야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씁쓸한 기운이 맴돌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중함을 잊고 지나쳤던 순간들 사이로 산책이라는 시간이 붙잡아둔 조각을 꺼내 볼 수 있다는 사실은 적잖은 위안이 되었다.

 

지금은 비록 원하는 곳으로 훌쩍 산책을 떠날 순 없지만, 언젠가 우리가 다시 어디든 갈 수 있을 때, 지금 느끼는 안타까움이 더 큰 희망과 기쁨의 씨앗이 되리라 믿으며 오랜만의 산책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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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가는 길. 겨울이 진짜 왔음을 체감한다.

 

 

이젠 밤공기에 코끝이 시리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오며 산책에 대한 글을 써 그날의 생각을 남길 생각에 들떴던 기억을 지나 글을 맺는 지금, 나와 비슷한 산책자들에게 이 글이 닿는다면 우리가 언젠가 마주할 날에는 마스크 없이 환한 얼굴로 스쳐 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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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들레르의 산책자 관련 참고문헌 - 벤야민. [1982]2005. “아케이드 프로젝트”. 조형준(엮음). 새물결.

 

 

[김현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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