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인물 간의 관계로 보는 '안은영' [사람]

글 입력 2020.11.21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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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선생님, 뭐하세요?"

"어....... 운동요?"

"무슨 운동을 지하실에서 하세요?"

 

땀방울이 맺힌 이마 안쪽에서 별로 주름이 없는 뇌가 미미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보건교사 안은영> p.24-25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 그건 의도와 계획 없이도 일어나는 일이다. 오랜 기간 친구로 지내온 사람을 생각해보면, 언제 어떻게 친해졌는지 되짚었을 때 기억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잠깐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한번 생각해보자. 어느 날 멈춰서 관계를 되돌아봤을 때 나도 모르는 새 누군가와 친밀해진 경험, 아마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사람을 향한 관심은 만나기 위해선 시공간의 제약이 있는 현실 속 사람들뿐만 아니라, 문화생활 중에도 드러난다. 코로나로 인해 집 밖 생활이 어려워진 요즘은 예능으로 보는 연예인들과 드라마 속 캐릭터, 책의 등장인물들이 그 대상이다. 현재 나의 사랑을 받는 인물들은 대충 세봐도 다섯이 넘지만, 가장 최근 내 마음에 안착한 인물은 바로 <보건교사 안은영>의 주인공 '안은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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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은영은 정세랑 작가의 2015년 출간 소설 속 주인공으로, 지난 9월 25일 넷플릭스에서 동명의 드라마를 통해 정유미 배우 모습으로 우리에게 얼굴을 '보여'주었다. 친구들에게 늘 '아는 형'이라고 놀림당하는 소탈한 성격을 지녔다고 소개되는데, 별명만으로도 알고 싶고 친해지고 싶은 캐릭터이다. 정세랑 작가의 책은 <지구에서 한아뿐> 이후로 하나씩 차례로 읽고 있었는데, <보건교사 안은영>은 영상으로 먼저 보고 책을 읽는 순서로 안은영을 접했다.

 

안은영의 매력은 혼자 학교 지하 1층에서 비비탄 총과 무지개 색 깔때기형 장난감 칼을 휘두를 때보다 누군가와 함께일 때 빛나게 다가왔다. 다섯 살 안은영의 첫사랑 정현과 놀이터에 함께일 때, 은영의 눈에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던 메켄지를 상대할 때, 중학교 동창 김강선과 시간을 보낼 때, 평범하지 않은 걸 보는 안은영도 처음 만난 옴잡이 혜민을 대할 때, 안은영 최고의 파트너 한문선생 홍인표와 함께할 때. 은영은 사람들과 어울리며 자신의 성격을 독자들에게 보여주었다.

 

 

 

놀이터 첫사랑 정현


 

다른 친구들은 보지 않고 은영만 바라봐 주는, 놀이터에서만 만날 수 있는 친구, 정현.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은영을 무서워하는 다른 친구들과 달리, 놀이터에 은영만 오면 가지고 놀던 걸 던지고 달려오던, 시간이 지나 이제 은영보다 훨씬 작아진 이 친구는 은영의 다섯 살 첫사랑이다.

 

정현은 아주 잠깐만 등장했지만 짧은 등장만으로도 은영이 좋은 사람인 것을 알려주기에 충분했다. 겉보기에는(사실 정현은 보이지 않지만) 어린 학생과 선생님의 만남이지만 가까이 다가가 둘의 대화를 듣는다면 5살 어린아이에 멈춰진 이들의 시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다섯 살에 멈춰서 나누는 대화임에도 흐르는 피를 닦아주는 시늉이나 정현의 안부를 묻는 모습은 은영이 정현을 보호자처럼 아낀다는 것을 보여준다.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놀이터에서 엄마를 기다리며 누구도 해치지 않은 정현과 비누장미같이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정현을 매번 찾아가는 은영. 격주로 찾아오는 놀토에 이제 아이들조차 보기 힘든 낡은 놀이터로 무해한 친구를 만나러 과자를 사 가는 은영의 모습은 따사로운 토요일 오후 풍경과 적합해 보였다.

 

 

 

강력한 라이벌 메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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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은영의 전무후무한 라이벌 메켄지. 드라마에서 인상적으로 만나서인지 예상보다 책 속 분량이 적은 게 아쉬운, 밉지만 매력 있는 캐릭터이다. 갈퀴가 있는 씨앗을 들고 다니며 은영이 가진 능력과 비슷한, 어쩌면 더 강한 능력을 은영과 다르게 나쁜 목적으로 사용한다. 그는 악역이지만 학생들에게 보여주는 모습은 친절하고 다정하다. 거짓말에 솜씨가 있는 편이다.

 

사람을 싫어하는 데 드는 에너지가 아까워 쉽게 다른 사람을 싫어하지 않는 안은영은 처음부터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의 유난한 능력을 통해 메켄지에게 숨기고 있는 비밀이 있다고 생각했고, 이 사실이 확실해진 순간 은영은 단도직입적으로 메켄지에게 질문을 던진다. "너 뭐야?"

 

나였다면 이 순간 은영처럼 행동하지 못할 것이다. 조심성이 많은 편이고, 상대가 어떤 인물인지 사전 조사도 없이 부딪히는 일은 나에게는 위험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은영은 전혀 달랐다. 그녀의 문제 파악 후 대처는 사이다를 마신 듯 시원했고, 호기로웠다. 나와 다른 면을 지닌 은영의 모습을 보며 매력을 느낀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첫 만남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후, 뒤에 나오는 에피소드에서 은영은 적으로 여겨지는 메켄지에게 도움을 청한다. 학생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과 도와줄 방법을 찾지 못한 상황에서 적을 활용해 상황을 개선하려 한 것이다. 선의를 실현하기 위해 견디기 어려운 상대에게도 도움을 요청하는 모습은 예상하지 못한 전개였고, 은영의 그런 태도를 배우고 싶었다.

 

 

 

중학교 동창 강선


 

은영과 강선의 만남은 드라마를 보면서도, 책을 읽으면서도 가장 마음 아팠던 장면이었다. 은영의 중학교 동창 강선, 둘은 같은 반이었고 각자 다른 이유로 가까운 친구가 없는 공통점이 있다. 졸업 이후로 16, 17년간 보지 못한 친구임에도 강선의 상황을 은영이 바로 알아차렸기 때문인지 둘 사이는 어색함보다는 친밀함이 더 느껴졌다.

 

사실 지금의 안은영 캐릭터 설정을 만든 사람이 강선이다. 핸드백에 비비탄 총과 무지개색 깔때기형 장난감 칼을 가지고 다니며 은영은 어쩌면 늘 강선과 함께하고 있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온전한 사람의 모습이 아닌 강선을 말없이 모른 척하는 은영과 은영의 모른 척을 모른 척하는 강선의 모습을 보며 왜인지 10여 년간 이어진 그 둘의 유대감이 부러웠다.

 

두 사람의 시간을 초월한 유대감이 가장 잘 전달된 건 강선과 마지막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 왜 죽었는지 어떻게 죽은 건지 물어보고 싶지만 차마 친구에게 물어보기 어려웠던 은영에게 강선이 먼저 자신의 사고에 관해 이야기한다. 강선이 겪은 사람보다 다른 것을 비싸게 생각해서 일어난 끔찍한 사고. 규명할 수 없는 감정이 들었다.

 

친구의 예상하지 못한, 안타까운 사연을 들은 은영은 참되게 솔직했고 그 모습이 좋았다. 두 동창에게서 오고 간 대화들은 진심으로 서로를 위한 말들이었다. 누군가와 함께하는 마지막 순간에 나도 저렇게 솔직해질 수 있을까. 마음에 담아두었던 따뜻한 말을 전할 수 있을까. 강선과 은영이 마지막으로 함께인 장면에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만큼, 순수하게 친구를 위하는 마음을 주고받는 둘이었다.

 

 

 

전학생 옴잡이 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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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민은 M고에 전학 온 학생이다. 가족 없이 혈혈단신으로 시설에서 살고 있다고 전해졌는데, 알고 보니 그녀는 옴잡이였다. 재수 옴 붙었다 할 때 그 옴을 잡는 혜민. 그것도 직접 옴을 잡아서 먹어 자신의 위산으로 녹여 없앤다. 학교에 몰려드는 많은 옴을 없애면서 위산 과다로 속이 안 좋아지는데도 혜민은 자신의 할 일을 다하고 있을 뿐 괜찮다고 한다.

 

자신은 인간이 아니고 컴퓨터 버그를 없애기 위한 패치나 게임의 NPC처럼 생각하는 혜민. 혜민과 달리 인간이긴 하지만 자신의 에너지와 시간을 다른 사람을 위해 사용하는 건 은영도 마찬가지다. 인간에게 해가 되는 옴을 잡기 위해 존재하는 생명과 인간의 악한 기운을 없앨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 자신과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는 혜민의 말을 들으며 은영은 은근히 기다렸던 칭찬과 해방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깨닫는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공익을 실현하는 일을 대부분 사람이 인식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은영은 메켄지처럼 자신의 능력을 안 좋은 방향으로 사용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어 보인다. 혜민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의 상황을 떠올린 은영은 속상한 마음을 뒤로하고 혜민과 저녁을 함께 먹는다. 은영의 인류애를 넘어선 동료애가 전해진 부분이다.

 

안은영은 꽤 굳건한 가치관을 따르고 있다. 자신이 세상을 돕고, 친절을 베푸는 일이 사람의 눈으로 인식할 수 없는 영역일지라도 은영은 계속해서 그 삶을 선택하여 살아간다. 친절이 지나치게 저평가된 덕목으로 여겨지는 사회에서 꾸준히 친절함을 지키고자 하는 점에서 은영과 인표는 통하는 부분이 있다.

 

 

 

최고의 파트너 인표


 

사랑이라고 말하기에는 부족하지만, 우정이라고 말하기에는 깊은 인표와의 관계. 책을 읽으며 은영과 인표는 학교를 벗어나서도 꼭 필요한 동료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벤져스에 나오는 캡틴 아메리카와 블랙 위도우의 관계와 비슷하다고 할까. 어쩌면 인표가 은영의 일방적인 보조 배터리 역할인 것 같기도 하다(결론에서는 생각이 바뀌었지만).

 

인표는 은영의 거의 모든 장면에 등장한다. 보건실에 은영 혼자 있나 싶을 때도 옆에서 종알종알 장난치고, 의견을 얘기하는 모습이 두 사람의 장면을 계속 보고 싶게 한다. 은영은 지하실에서 학교를 수호하는 우스꽝스러운 장면을 인표에게 들킨 이후로 인표에게는 자신의 능력에 관한 모든 이야기를 공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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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영은 무심하고 예민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사실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을 보는 입장에서 꽤 예민한 편이다. 그런 은영이 가장 편안해 보일 때가 인표가 함께일 때이다. 인표가 인간 장갑차라고 해도 될 만큼 강한 보호 장막을 가지고 있어서인지, 인표의 성격과 맞는 부분이 있어서인지 은영이 웃고 장난치는 몇 안 되는 시간에는 늘 인표가 있었다.

 

손을 잡아서 에너지를 얻는다는 설정이 주변 학교 사람들의 가십거리를 만들기에 충분했지만 그런 소문 속에서도 두 사람은 꾸준히 잘 지낸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은영에게 보이는 인표는 참으로 예측하기 쉬운데 그 사실을 당사자는 알지 못하니 늘 놀리고 싶은 대상이기 때문이다. 이런 톰과 제리 같은 관계는 성별에 상관없이 재밌는 요소이지만, 그 요소가 은영과 인표라는 캐릭터와 맞춰지면서 더 눈길이 갔다.

 

***

 

책 속에서 보건교사 안은영은 지금 얘기한 다섯 명보다 더 많은 사람을 상대하는 일을 한다. 보건실의 주 고객인 학생들과의 관계, 학교 선생님들과의 관계에서도 은영의 성격을 확인할 수 있다. <보건교사 안은영>을 읽으며 '안은영'이라는 캐릭터는 혼자보다 다른 사람과 함께하는 관계 속에서 더 매력적으로 느껴진다는 것을 알았다.

 

책을 읽는 동안 안은영만큼 관심이 갔던 인물은 영원히 은영의 파트너가 되었으면 인표였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힘이 되는 모습이었고, 이들이 주고받는 말들이 너무나 재밌어서 노트에 메모하면서 읽느라 책을 더 오래 붙잡고 있던 것 같다. 언젠가 나와 통통 튀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을 만나면 이 책을 읽어보라고 건네주고 싶다. 분명 눈치챌 수 없이 슬며시 '안은영'에게 빠져들 것이다.

 

 

[정서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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