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Say SAMO! 장 미쉘 바스키아를 외치다 [시각예술]

글 입력 2020.11.17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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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Michel Basquiat(1960~1988)

 

 

'장 미쉘 바스키아(1960-1988)'는 예술가의 대명사처럼 느껴진다. 형태와 색채, 다양한 그림 속의 문구로 자신만의 언어를 생성하는 사람. 그렇게 그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타올랐던 바스키아의 그림은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이다. 비록 짧은 생을 살다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그림은 2020년인 오늘날까지도 오히려 더 크게 회자되며 주목받는다. 이는 20세기를 살아간 한 화가의 작품적 경향이 전 세계를 불문하고 21세기 대중적 감성에 확실히 들어맞았음을 그 자체로 증명해 보인다.

 

특이하면서도 알 수 없는 무언가를 내재한 듯 보이는 미스터리한 화풍의 향연. 그런 향연이 끝없이 묻어난 작품을 마주한 우리는 바스키아의 개성적인 미적 감수성에 한층 더 집중한다. 그리고 그 순간, '바스키아'라는 사람 자체에도 자연스레 이끌리게 된다. 세계의 현대 미술을 주도한 개척자, 장 미쉘 바스키아는 제2의 인격인 예술 작품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던 것이었을까?

 

 

장 미쉘 바스키아는 1960년 뉴욕 브루클린에서, 아이티 공화국 출신의 아버지와 푸에르토리코계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와 함께 뉴욕의 주요 미술관을 돌아다니며 수많은 명화를 접했고, 미술사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쌓았다. 이후 1977년, 바스키아는 친구 알 디아즈와 함께 학창 시절 결성한 '흔해 빠진 낡은 것'이라는 뜻의 그룹 '세이모(SAMO)'를 만들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Say SA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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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Oⓒ

 

 

바스키아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게 바로 'SAMO(SAMe Old shit)'이다. 어쩌면 예술가로서 바스키아가 내포한 정체성을 가장 잘 드러내 주는 단어일 것이기 때문이다. 뉴욕 거리에서 그라피티 아티스트로서의 활동을 시작한 첫 발자취이자, 앞으로의 작품 경향을 내다볼 수 있는 증거로 작용하는 SAMO는 언어로 표상된 바스키아만의 예술적 외침이었다. 물질만능주의 및 권위적이던 사회와 주류 미술계를 비판하기 위한 기호적인 저항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더하여 저작권 보호를 표시하는 기호(ⓒ)를 함께 적어놓은 것은 고뇌의 끝에 도출된 한 개인의 창작물인 예술을 침범할 수 없도록 브랜드화한 창의적인 혁신이었다. 이로써 'SAMOⓒ'는 자유분방한 화법을 보여주면서도 사회적인 통찰의 메시지를 건네주는, 솔직담백한 당대의 그룹으로 자리했다. 세상을 하나로 이어주던 쭉 늘어진 길거리와 지하철의 벽면에 자유로이 스프레이로 낙서하며 내적인 저항을 밖으로 끊임없이 표출하려 했던 그는, 획일화되지 않은 시대의 반항아이기도 했으나 그 누구보다 당당하고 솔직했던 캐릭터를 품고 있었기에 말이다.

 

 

"내가 아프리카계 유색인인 게 내 성공과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다. 날 아프리카계 아티스트들과 견줄 것이 아니라 모든 아티스트들과 비교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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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 York, New York, 1981

 

 

바로 그러한 'SAMOⓒ'의 무대는 뉴욕의 거리였고, 그런 거리의 예술은 이후 캔버스에 짙게 남았다. 1981년 작 New York, New York의 회화적 화면은 직관적으로도 거칠게 표현돼있듯, 대도시의 건물과 소음의 무질서함이 마치 피부에 닿을 것 마냥 복잡한 형태로 그려져 있다. 이때, 주목할만한 바스키아만의 도상인 왕관의 형태 역시 캔버스 한 면에 존재감을 뽐내고 있다. 주목을 받지 못했던 무명 시절부터, 본인을 표상할 상징적인 트레이드 마크를 수없이 새기며 연구한 그의 노력이 구획 별로 각각의 위상을 떨치던 나름의 흔적인 것이다.

 

한편 그라피티 분야에서의 첫 활동을 시작해 예술적인 정체성을 드러냈던 만큼, 초기의 활동 무대였던 거리를 벗어난 후에도 그의 미적인 필치는 쓰고 지우기를 반복했던 그라피티의 문화가 지워지지 않는 문신처럼 새겨진 모습이다. 글씨를 썼다 다시 지우기는 부지기수, 화면 위에 색과 형태를 계속해서 쌓아 올려 이전의 회화적 구성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행위를 지속할수록, 바스키아가 던지고자 한 메시지는 더 복잡해져 가는 것만 같다. 그러나 그의 행위는 수많은 모순이 자리했던 당대의 뉴욕 사회보다는 극히 평온한 반향이지 않았나 싶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가치는 예술이다.

가장 오래 지속되고,

사람들이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그렇다면 쓰고 지우기를 몇 번이고 반복했던 바스키아의 손에는 과연 무엇이 남아 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자신이 작성한 글 위에 선을 긋거나 덧칠하는 크로싱 아웃(Crossing-out) 기법을 통해 틀에 갇힌 가치만을 주장하고 받아들였던 20세기의 모순을 남김없이 지워버리려 한 것이었을까? 그라피티적인 기법이었던 동시에, 반복적인 행위를 선보인 작가만의 무의식적인 의도가 깊숙이 잠재돼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 의문을 가지고 바스키아의 작품을 따라가 보니, 그는 수많은 군중 앞에 서서 손 높이 확성기를 든 채로 "Say SAMO!"를 말하고 있었다.

 

뉴욕이라는 물질만능주의의 공간에 살며 마주하지 않으려 해도 마주해야 하는 불평등과 간극의 심화, 그러나 반드시 뒤덮어버려야 할 모순적인 사회체제를 상기하는 동시에 지워버린 후에도 또다시 말끔히 소멸해버리고자 했던 의지의 결과로 말이다. 또 한편으로는 그러한 의지가 모임으로써 고난을 견디고 세상의 영웅이 된 사람이자, 작가의 동경 대상인 여러 인물을 화폭 안에 존재하도록 해 부여하는 대표적인 바스키아의 왕관도 구축된 것으로 본다.

 

 

 

바스키아가 견딘 왕관의 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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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비너스], 1982

 

 

폐쇄적인 사회의 분위기에 휩쓸려가지 않고, 자유와 희망의 목소리를 내 거대한 뉴욕의 흐름을 뒤바꾸어놓고자 했던 용감한 청년. 고질적인 편견에 맞서 예술의 승화로써 본인만의 확고한 철학을 내세운 미술계의 이단아, 장 미쉘 바스키아의 스케치 선 하나하나에는 단순함 그 이상의 내밀한 감정이 숨어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이런 내밀한 감정은 그의 그림에서 하나둘씩 밝혀진다.

 

위 이미지에서 보이듯, 바스키아는 1982년 이래 작품의 주제에 있어 비너스의 형상을 반복적으로 그렸다. 비너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미의 여신으로 아름다움을 상징한다. 그러나 아름답고 고혹적인 고대의 비너스와는 꽤 거리가 멀어 보이는 듯한 바스키아의 비너스는 단순하면서도 평면적인 몸체를 드로잉했다. 이는 이 시대의 여성상과 아름다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면서, 미(美)의 기준점에 반기를 드는 패러다임의 생성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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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바스키아는 Portrait 연작을 통해 불평등한 사회구조 속에서도 중요한 업적을 이룬 아프리카계 운동선수와 뮤지션들의 초상화를 통해 경의의 표시를 하기도 했다. 이는 죽음과 폭력, 차별과 억압의 역사를 살아온 한 명의 예술가가 그와 비슷한 대우를 받을 수밖에 없었던 다른 이들을 위로하며 하나로 결속되게 하려는 듯한 모습이다. 역동적이고 거친 예술의 표현이 겉으로 드러나지만, 그것을 표현하기까지의 과정은 따스한 연대와 변혁된 사회를 향한 작가만의 바람이 여과 없이 드러난 것이기에 보면 볼수록 아이러니한 정감이 느껴지는 듯하다.

 

이처럼 바스키아는 당대 사회에서의 모든 불편한 요소를 제거하고, 회복시키고자 부단히 노력했다. 그와 동시에 유색인종에게 가해지는 차별과 그런 상황의 해소점을 작품을 통해 유쾌하게 풀어냄으로써 지속적으로 굳어진 미적인 가치관에 질문을 던졌다. 이렇게 작가로부터 질문을 받고 그에 대한 답변을 생각하다 보면, 우리는 어느샌가 바스키아와 동일한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부정부패가 가득한 사회에서, 모두가 내야 할 목소리를 어떠한 형태와 방법으로써 구체화해야 할지 촉구적인 성격을 띤 고찰을 하게 되는 것이다.

 

새로운 기술이나 지식 등을 추가해 문명화하기보다는, 개선과 수정을 거듭해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가려는 독특한 시각을 가지고서 고찰함으로써 말이다. 바로 바스키아의 그런 독특한 시각이 예술계뿐만 아니라 사회의 전반을 조금씩 변화시켰다. 그렇게 미세한 듯 보이나 그 무엇보다도 강력하고 큰 파급력을 지닌 채 급속도로 전진하는 모양새의 회화는 예술계를 넘어 세상의 현장에 있어서도 커다란 울림으로 자리했다. 바스키아가 견딘 왕관의 무게는 실로 대단했다.

 

 

"나는 흑인 아티스트가 아니다. 그냥 아티스트다."

 

 

 

타오르는 불꽃의 실체 : 장 미쉘 바스키아를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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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생을 살았지만 활동한 8년의 세월 동안 2,500여 개의 작품을 남긴 바스키아. 타오르는 불꽃만큼이나 열정적인 삶을 살아낸 그는, 어느덧 21세기 예술계에서의 대표적인 아이콘이 되었다. 물론 아이콘으로 자리한 데는 작품의 스타일이 시대를 압도해 독보적인 미를 이루어간 부분도 있겠지만, 바스키아의 인간적인 면모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로 하여금 귀감이 될 것이다.

 

텍스트와 이미지를 결합해 예술적인 언어로 만들어가는 힘과 어디론가 튈지 모르는 예측 불가한 선과 색의 방향 등, 바스키아는 독립적인 담론으로 세상을 설득해나가는 설파자였다. 캔버스를 매개체로, 할 말이 있으면 주저하지 않고 말하며 '바르게 말하기'의 심리적인 대화를 실천해온 당사자였기 때문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할 말은 다 하고 살자"는 21세기의 모토를 미리 건네준 듯, 그의 발자취는 선두적인 동시에 각성적이다.

 

'검은 피카소', '미국의 고흐'가 아닌 그저 '장 미쉘 바스키아'로 남길 바랐던 그의 소망이 보다 선명한 실체로서 타오르고 있는 지금, 우리는 바스키아와 함께 흔해 빠진 낡은 것에 대항해 "SAMO"를 외칠 준비를 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렇기에 이 외침은 시대를 막론하고 통찰의 메시지를 전해주려 한 예술가와 더불어 의미 있게 퍼질 언어임이 분명해 보인다. 현실의 유토피아인 '헤테로토피아'와 같은 희망찬 세상이 도래할 때까지, Say SA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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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세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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