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이방인과 더불어 살아가기 - 연극 '아라베스크'

아는 것이 아닌 인정하는 것
글 입력 2020.11.14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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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이방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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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지 않은 과거 2018년, 561명의 예멘인들이 제주도로 입국했다. 그들은 난민이었고, 타인이었으며, 우리에겐 그러니까 이방인이었다. 당시 이들의 대거 무비자 입국은 ‘난민 문제’를 국민적 관심사의 불판 위에 올려놓았고, 그들을 향한 시선은 결코 곱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561명 중 2명만이 난민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었고, 412명이 한시적으로 체류를 허가 받는 ‘인도적 체류허가’를 판정 받았으며 단순 불인정이 56명, 난민 신청 철회나 직권 종료가 14명이었다. 그들의 일생은 엄연히 ‘이방인’이라는 프레임 속에서 단 몇 장의 서류를 통해 엄격한 잣대로 평가받고 재단되었다.


마흐무드는 그러한 예멘 난민이었다. 그는 전쟁의 위협을 피해 아내와 한국으로 도망쳐 올 수 밖에 없었음을 호소 한다. 총탄과 포탄 소리로 파묻힌, 자신이 사랑하는 평화가 없는 그곳에서는 도저히 살 수 없었다던 그는 피부색도, 언어도, 종교도 다른 이 낯선 한국 땅에서 살아갈 허가를 달라고 한다. 조사관, 보조, 통역사가 그에 대해 판단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진실인지 알 수 없는 몇 장의 조촐한 서류, 그리고 마흐무드의 어딘지 균일하지 않은 진술 뿐이다. 그는 조사를 받는 내내 불안해 보였고, 가끔씩 흥분하곤 했다.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그를 바라보는 3명의 인물의 시선이 의심과 불신으로 가득하다는 것쯤은 그도 쉽게 알았을 것이다.


이방인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그렇다. 이것은 어쩌면 인류가 집단을 이루며 살아온 그 수많은 역사 속에서 축적된 본능과도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이방인에 대한 의심, 혹은 혐오를 통해 아이러니 하게도 집단 안의 결속을 다지고 집단 내에서 만큼은 안전함을 확인 받음으로써 우리는 안정적으로 살아올 수 있었다. 그것은 우리의 역사 속에서 국가의 형태로 나타났고, 우리들은 땅 위에 보이지 않는 228개의 국경선을 그리고 그 선 안의 사람들끼리 군락을 이루며 사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 들이게 되었다. 그런 우리에게 군락 밖의 사람이자 그 선을 넘고자 하는 이, 즉 이방인은 위험요소를 품은 꺼림칙한 인물일 수 밖에 없고, 오랜 시간 다져온 방어 기재는 이방인에 대한 조건 없는 적대감으로 드러났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사고 속에서 결국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이방인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군락인 한국 안에서도 다수의 난민이 발생하던 시기가 있었다. 조선 말기, 우리는 기근을 피해 만주와 연해주 일대로 대이동 했었고, 일제 감정기 시대에는 정치적 망명자로 러시아, 중국, 미국 일대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또한 현재의 고려인은 스탈린,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 이주를 해야 하는 환경 속에 처해 있다. 우리는 불시에 예상치 못한 이유로 우리의 군락을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한 위험은 곳곳에 도사리고 있고, 결코 남의 일로만 여길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나 아닌 타인에게 이방인들이고, 타인들은 또한 우리에게 이방인인 이 세계 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안전한 환경을 보장받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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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하마드는 자신을 그저 있는 그대로 바라봐 달라고 말한다. 무슨 말과 행동을 하든 그가 이방인인 이상 그는 그 프레임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그도 알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통역사는 그의 깔끔하지 못한 진술과 미심쩍은 부분에 주목하여 그를 테러범으로 의심하기도 한다.그러한 생각의 기저에는 그가 낯선 이방인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을 것이다. 무하마드의 진실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사람이 살아온 일 평생을 모순점 하나 없이 매끄럽게 진술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방인의 그러한 틈을 포용할 만큼의 아량을 쉽게 베풀지 못한다. 단순한 이기심의 문제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 속에는 어쩌면 인류의 문명을 가능케 했던, 오랜 역사 속에서 당연시되어 왔던 이방인에 대한 배척과 방어기제가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권리에도 우선순위를 매겨야 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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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역사의 대사를 통해서 무하마드가 난민 심사를 받는 동안 머무르는 집이 얼마나 잘 갖추어져 있는지 알 수 있다. 응접실이 딸린 넓은 집에서 생활하고 말끔히 차려 입은 무하마드는 확실히 사회적 통념으로 생각되는 난민의 모습과 동떨어져 있다. 통역사가 무하마드를 난민으로 수용하는데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 부분이었을 것이다. 자국민보다 난민의 권리를 위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사실, 무하마드의 임시 거처 만큼의 주거지를 갖추지 못하고 사는 자국민의 수는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정부가 그들의 생활여건을 일일히 보살필 의무는 없겠지만, 이방인으로 여겨지는 난민을 수용하는 곳에 국민의 돈인 세금을 쓰는 것은 확실히 다른 문제일 것이다.


이는 사실 난민 수용 문제 뿐만 아니라 조금 더 넓은 차원의 문제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권리에도 우선순위를 매겨야 한다면 그것은 대체 누가, 어떻게 정해야 하는 것일까? 사람의 권리에 대한 중요성은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또한 이 권리가 누구에게나 평등해야 한다는 이상적인 논리 또한 아주 오랜 세월 우리가 도덕적으로 옳다고 배워온 명제일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이상과는 다르다. 한정된 재원을 두고 우리는 항상 권리의 딜레마에 빠지곤 한다. 무하마드와 같은 난민을 수용하여야 한다는 인도주의적인 명제를 우선시해야 할지, 당장 우리 군락 안에서의 곪은 부분을 생각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사실 누구나 쉽게 정의 내리지 못하는 정답 없는 난제일 것이다.


앞서 이야기 했던 이방인에 대한 방어기제와 권리에 대한 이야기는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다. 결국 우리는 어떤 식으로 엮여 있든 나에게 이방인일 수 밖에 없는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 그 과정에서 갈등과 딜레마에 끊임 없이 빠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결코 이방인인 상대에 대해 다 알 수 없다. 단지 다 알 수 없다는 사실 만을 확인할 뿐이다. 결국 최선은 상대가 나와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다. 나와 다른 타인에게는 나 또한 타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딜레마 속에서 필연적으로 필요한 대화의 과정 속에서 엇나가지만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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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다온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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