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이해와 수용의 어려움, 연극 아라베스크

대학로 선돌극장 놀땅의 창작극
글 입력 2020.11.12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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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 세계인권선언 14조

 

1. 모든 사람은 박해를 피하여 다른 나라에서 비호를 구하거나 비호를 받을 권리를 가진다.

 

2. 이러한 권리는 진실로 비정치적 범죄 또는 국제 연합의 목적과 원칙에 위배되는 행위로 인해 기소된 경우에는 주장될 수 없다.

 

  

2020_놀땅_아라베스크(삼일로)_리허설사진 (5).jpg

 

 

혜화역에서 내려 15분 여를 걸어서 선돌 극장에 도착했다. 주택 건물처럼 보이는 극장 건물은 위 아라베스크 현수막, 작은 매표소를 통해 극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45분이 되고, 입장을 시작했다.

 

지하에 극장이 있었다. 구조가 특이했다. 대개 무대는 한 쪽에서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관객들은 반대편 암흑 속에서 그들을 보는 관찰자이다. 하지만 아라베스크의 무대는 중간에 위치하고, 관객들이 배우들을 양 편에서 보게 된다. 나는 운 좋게 맨 앞자리에 앉을 수 있고, 배우들의 목소리와 감정, 세세한 행동까지 모두 관찰할 수 있었다.

 

무대 장치는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었다. 상황을 명확하게 묘사하는 펜스와 제주 항공 안내문, 심사 분위기를 형성하는 책상, 의자, 컴퓨터, 등이 전부였다. 눈 여겨 보아야 할 것은 책상과 의자의 배치 변화이다. 친밀한 관계를 형성할 때, 호의적인 관계를 표현할 때에는 책상들이 붙어 있다. 하지만 갈등이 심화 될 때, 책상들은 모두 각기 다른 위치에 떨어져 있다. 책상과 더불어 의자도 같이 보아야 할 요소다. 대부분의 장면에서 예멘인, 마흐무드의 의자는 홀로 있지만, 조사관과 통역사의 의자들은 붙어 있는 경우가 많다.

 

의자는 하나의 장벽, 무리를 형성한다. 간단한 소품으로도 많은 의미들이 함축적으로, 암묵적으로 표현되었다. 특수한 무대 장치가 없어서 오히려, 이 아라베스크 연극이 표현하고자 하는 의미가 더 잘 표현되었다.

 

사실 한국의 지리적 위치와 문화 환경 때문에 상대적으로 난민 문제에 대해 무지하고, 무관심한 사람들이 많다. 유럽, 미국이 난민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뉴스를 보면서, 나 또한 남의 일에 더 가까운 문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난민 문제는 한국의 현실의 문제이기도 하다. 일상적인 소품들을 사용해서, 문제에 대한 심리적 거리를 축소하는 효과가 있었다.

 

등장인물은 4명이다. 난민 신청을 하러 온 예멘인 마흐무드, 통역사, 조사관, 보조관. 가장 잔인했고, 인상깊었던 인물은 보조관 이었다. 처음 그는 마흐무드를 신기한 마음으로 환대하고 말을 거는 등 호의적으로 대한다. 하지만 자신의 인턴 기간이 끝나고, 서울 고시촌으로 돌아가야 하는 현실이 다가오자, 자신에게 갈 복지 혜택을 가로채는 도둑으로 그를 몰아간다. 인간의 이중성이 극명히 대비되었다.

 

하지만 그를 무조건적으로 비난할 수 없다. 그는 한 인물로 두 유형의 사람들을 표현했다. 첫 번째는 물질적, 심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타인데 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타인의 입장을 배려하고자 한다. 두 번째는, 타인과 경쟁해야 하는 사람이다. 자기 스스로 얻을 수 없는 혜택과 이득을 얻기 위해 타인을 배척해야 할, 이겨야 할 대상으로 본다. 그를 비난할 수는 없다. 각각의 개인들은 모두 같은 출발선에 서지 않으니까.

 

아라베스크는 난민 수용 관련에 대한 난민신청자의 입장, 한국인의 입장을 소개한다. 의견의 비중과 개진이 중립적이다. 탁구 핑퐁을 치는 것처럼 주장, 반박, 답변 등 팽팽한 릴레이가 지속된다. 예멘인 마흐무드는 전쟁의 비극을 벗어나, 창창했던 자신의 앞날에 다시 빛을 비추고자, 제주도에 와서 난민신청을 한다. 하지만 그가 안전한 사람, 난민에 적합한 사람임을 알 수 있는 증거는 고작 종이 몇 장과 그의 말 뿐이다. 어려운 소통과, 서로에 대한 편견 속에서 입국 심사를 진행한다.

 

 

2020_놀땅_아라베스크(삼일로)_리허설사진 (4).jpg

 

 

심사가 진행될수록, 그들의 심리적 거리는 더욱 벌어진다. 서로에게 이해가 되지 않고, 납득할 수 없는 점들이 너무 많았다.

 

가장 돋보이는 것은 정부 체제의 문제였다. 마흐무드의 나라, 예멘은 행정 체계가 붕괴되었다. 서류, 여권을 만드는 것부터 불법적인 절차와 위험이 동반했다. 이미 세계 질서에 편입되어 질서정연한 행정 질서를 가지고 있는 한국의 입장에서, 그 불법 행위는 진짜 범죄로 여겨졌다. 두 번째는 라마단이었다. 배고픔의 평등을 통해 하나가 된다고 믿는 종교적 관습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중세 기독교의 타락과 인쇄술의 발달, 과학혁명으로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종교를 우선시하지 않는다. 개인적인 삶, 영적으로 의지할 존재로써 신을 요청할 뿐 그들의 삶과 행동의 근거는 이성과 과학, 감정이 지배적인 영향을 미친다.

 

마흐무드에게도 대변인이 필요해 보였다. 그의 문화를 잘 알고, 풍토를 잘 아는 사람. 즉, 그를 이해하고, 말을 전달하는 사람이 필요했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 말을 똑바로 전달해 달라는 마흐무드의 말에 공감했다. 통역사는 단순히 언어를 다른 언어로 바꾸어 다시 말해 주는 사람이 아니다. 통역사는 대화 주제에 대해 기본적인 상식을 가지고 있어 타인의 말을 의도와 맞게 통역해야 한다. 또한 그 말에 실린 감정도 억양, 톤을 통해 표현해야 한다. 그 점에서 이 연극의 통역사는 나쁜 통역을 했다.

 

그녀는 조사관의 입장에 서서, 자신의 의견을 말하기에 바빴다. 극이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에 맞게 통역사도 그에 맞는 역할을 맡았겠지만, 마흐무드의 입장에 서 주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면, 난민 문제에 대해 관객들이 더 쉽게 실마리를 찾고, 바람직한 입장과 태도를 배울 수 있지 않았을까. 이 연극에서 가장 아쉬웠던 점이다. 난민 문제와 관련된 쟁점들, 의견들을 관객들에게 열심히 실토하고, 호소하고 나서 그 문제의 방향성조차 제시해주지 않는다. 관객들의 사고를 자극하는 촉진제가 되기도 하겠지만 머리 아프게 하기도 했다.

 

그들의 말들 속에서 입장차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문장들이다. 조사관은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물 마시는 것조차도 당신 눈치를 봐야 하는데, 어떻게 한국에서 살 수 있습니까?" 계속되는 심문에 지친 마흐무드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내가 얼마나 더 비참해지기를 바랍니까? 지금보다 더 가난해 져야 해요? 총상으로 팔 한 쪽을 잃어야 합니까?" 위험한 대상으로 마흐무드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과, 미래의 희망을 붙잡기 위한 절박한 시선이 교차했다.

 

 

2020_놀땅_아라베스크(삼일로)_리허설사진 (6).jpg

 

 

솔직히 말해, 나 또한, 내가 입은 서양식 코트, 셔츠, 정장 바지를 기준으로 그를 내내 평가하고 있었다. 난민은 도와줘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을 도우려면 내국인들에게 쓸 수 있는 재원과 혜택이 줄어든다. 하지만 보조관의 말처럼 고시원의 좁은 방에 갇혀 살아야 하는 청년들이 있고, 통역사의 말처럼 불편한 몸으로 폐지를 줍는 노인들이 있다. 낯섦, 편견, 불편한 소통 등이 먼저 문젯거리로 떠올랐고, 호감보다는 불편함이 앞섰다. 그렇지만 만약 내가 난민의 입장이라면 어떨까. 생명이 위중한, 희망에 대한 미래를 꿈꿀 수 없는 상황이라면 나 또한 지금은 불편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마흐 무드와 같았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난민과 내국인이 모두 수긍할 수 있는 난민 정책을 시행할 수 있을까.

 

난민 관련 사안에 대해 너무 쉽게 생각했던, 무지한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윤리적인 사회 문제는 어렵다. 통계상, 수치상, 문서상으로 보이는 문제는 단순하고 명쾌하지만 현실의 생생한 삶은 다르다. 가치들이 상충하고, 각기 다른 사연들이 존재한다. 현실을 눈앞에서 펼쳐 놓는 사회극 아라베스크는 나의 무지와 편견을 정면으로 지적했다.

 

미국, 중국 등을 비롯한 패권국은 약소국을 주무르고 있다.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유엔을 비롯한 각종 국제기구들 또한, 많은 자금을 유지하는 강대국들의 휘하 아래에 있다. 지구촌으로, 모두가 연결되는 사회를 과연 만들 수 있을까?

 

 

[박은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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