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수천, 수만 번의 날갯짓 - '벌새' [영화]

1994년, 열네 살 은희의 아주 보편적이고 가장 찬란한 기억의 이야기
글 입력 2020.11.11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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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새, 2019

감독 김보라

출연 박지후, 김새벽 등

 

 

나는 벌새가 도대체 어떤 영화이기에 수많은 팬(벌새단)을 만들고 그리 호평을 받는지 늘 궁금했다. 그렇지만 몇 번이나 타이밍을 놓쳐 미루고 미루다 이제서야 벌새를 감상하게 되었다.

 

포털사이트에 영화 '벌새'를 검색해보면 가장 위에 개봉일과 출연진 등 간단한 정보와 더욱더 간단한 줄거리 "1994년, 알 수 없는 거대한 세계와 마주한 14살 ‘은희’의 아주- 보편적이고 가장- 찬란한 기억의 이야기"가 뜨는 게 전부다. 당최 줄거리만 보고서는 어떤 영화인지 전혀 예상조차 할 수 없었다.

 

다 이유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딱 저 정보만 가지고 영화를 보았다.

 

 

 

가장 보편적인 은희로부터


 

은희가 현관문을 애타게 두드리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처음 그 장면을 볼 때 나는 은희가 왜 저렇게 문을 두드리나 궁금했다. 열쇠를 미처 들고나오지 못해 안에서 누가 열어줘야 하는 상황이었다면 대부분 몇 번 두드리고 흔들어보다 말 것이다. 보통 그 상황에서 별 반응이 없으면 집에 사람이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은희는 이상하리만치 문을 두드리고 울며불며 문을 열어달라 떼를 쓴다. 알고 보니 그 집은 은희가 실수로 잘못 찾아간 집이었지만 은희에게 그 사실은 안중에 없는 것 같았다. 나중에서야 든 생각인데, 은희는 아무리 두드려도 현관문이 열리지 않자 엄마가 나를 버린 건 아닐까 하는 불안함에 이 집이 우리 집인지 남의 집인지조차 인지하지 못한 것 같다.


은희는 가부장적인 아버지와 어딘가 무기력한 어머니 아래서 자랐다. 거기에 한 편으로는 엘리트 코스를 밟을 녀석이라며 온 가족의 기대를 업고 한 편으로는 수시로 은희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오빠와 밖으로 나도는 언니까지. 아마 영화의 배경인 1994년에는 이런 모습이 평범한 가정이었을 수 있기에 '가장 보편적인 은희로부터'라고 표현했을지도 모르겠다.


은희는 우연히 밖에서 가만히 허공을 바라보는 엄마를 만나 그를 몇 번이나 애타게 부르지만 결국 엄마는 은희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은희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개인적으로 이 장면 연출이 너무 좋았다. 온전히 자기만의 세상에 빠진 듯한 은희 엄마가 끝까지 은희에게 뒷모습만 보이며 화면 밖으로 사라질 때 나까지 다 불안하고 외로운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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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는 가족들의 관심이 필요하다. 귀 아래쪽에 혹이 생겨 수술해야 하는 상황이 오자 그제야 가족들은 은희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적은 확률이지만 수술 부작용으로 신경 마비가 올 수 있다는 말을 듣고 펑펑 우는 아빠와 걱정하지 말라며 은희의 숟가락 위에 반찬을 얹어주는 엄마. 은희는 그 관심이 좋았던 것 같다.

 

엄마가 반찬을 얹어줄 때는 혹이고 뭐고 히죽거리며 웃기도 한다. 아마 혹을 제거하는 수술을 무사히 마치고 의료진분께 내 혹 어디 있냐고, 어디 버렸냐고 묻는 것도 이제 나는 혹이 없어졌으니 그로 인해 간신히 받은 관심이 다시 사라질까 걱정하는 마음 때문이지 않을까?

 

 

 

은희의 정신적 지주, 한문 선생님 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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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은희의 정신적 지주가 있다. 바로 한문 선생님 영지. 매일 같이 리바이스 청바지만 입던 선생님의 후임으로 오신 분이다. 영지는 정말 멋있고 차분한 어른이다. 은희에게 가장 관심을 많이 쏟아주고 가만히 은희 눈을 바라보며 은희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준다.

 

첫 등장부터 이 배역은 누가 뭐래도 절대 김새벽 배우 역할이다 싶었다. 본체가 '벌새'의 한문 선생님 영지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정말 잘 어울렸다. 하여튼 은희의 불안함을 감싸 안아주고 그가 성장하는 데 있어 정말 큰 도움을 주었던 영지는 갑작스레 학원을 그만두고 사라진다. 꽤 각별한 사이였던 둘이지만 은희가 입원한 사이 언질 하나 없이 영지는 사라졌다. 심지어 삐삐 번호까지 지워서 연락할 방법도 없단다.

 

힘들고 우울할 땐 손가락을 펴봐.

그리고 움직이는 거야.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손가락은 신기하게도 움직여져.

 

- 영지의 대사 中-

 

언제 은희가 영지에게 선생님도 자신이 싫어질 때가 있냐고 물은 적이 있다. 영지는 그때 정말 많다고 답한다. 그럴 때마다 자기는 하나하나 움직이는 손가락을 바라본다고 했다. 아마 영지는 그 얘기를 하는 순간에도 어느 정도의 자기 혐오감이 있었을 것 같다. 아무리 손을 보아도 누를 수 없는 감정에 모두 정리하고 떠난 게 아닐까. 마치 새로운 삶을 살길 바라는 사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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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영지는 은희에게 소포 하나를 보낸다. 은희가 입원하기 전 그에게 빌렸던 책과 스케치북 그리고 곱게 접힌 편지. 선생님이 너무나도 보고팠던 은희는 당장 다음 날 소포에 적힌 선생님의 집으로 예전처럼 떡 보따리를 들고 찾아간다. 수척한 모습으로 문을 열고 나온 한 사람. "소포가 언제 왔어?", "어제요!", "어떡하지 영지는 이제 없는데... 소포는 어제 왔는데 영지는 이제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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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10월 21일 오전 7시, 날이 밝아 학생들은 등교하고 직장인들은 출근하는 그 시간에 성수대교가 무너지는 사고가 발생한다. 성수대교를 지나는 버스를 타고 등교하는 언니는 다행히도 그날 버스를 늦게 타 사고를 당하지 않았다. 자기만 생각할 줄 알고 못돼먹은 줄만 알았던 은희의 오빠가 누나를 옆에 두고 식사 중에 펑펑 눈물을 흘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사고 소식을 듣자마자 오열하며 달려 나간 은희와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어떻게 그 큰 다리가 무너지니... 그 다리가..." 은희는 언니를 멀리 보내지 않은 대신 선생님을 보내줘야 했다. 갑작스레 떠나서 미안하다며 방학 때, 그때 만나면 처음부터 다 해주겠다던 영지의 이야기를 은희는 앞으로 평생 들을 수 없었다.

 

 

 

1 가정 1 영지!


 

 

"어떻게 사는 것이 맞을까. 어느 날 알 것 같다가도 정말 모르겠어. 다만 나쁜 일들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이 함께한다는 것. 우리는 늘 누군가를 만나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 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

 

- 영지의 편지 中

 

 

영화 <벌새>는 가장 평범하고 보편적인 열네 살 은희의 이야기로 수많은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겼다.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뿐만 아니라 나처럼 좀 더 뒤에 태어난 사람들까지도. 물론 내가 저 시대에 살았던 사람이 아닌지라 완벽히 은희의 마음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숨 쉬고 있는 2020년에도 은희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다들 '나이도 어린 게 세상 힘든 일이 뭐 있냐. 공부나 해. 공부 열심히 하면 뭐든 돼.'라는 말을 들으며 어떻게든 나 좀 알아달라고 수천, 수만 번의 날갯짓을 하며 버티고 있다. 그 버거운 날갯짓을 계속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사람은 아마도 영지 선생님일 것이다.

 

누구에게나 인정받는 명문대를 나온 어른이 되어도 여전히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조금이나마 깨달은 세상의 진리를, 어른들의 세상을 은희에게 알려준 사람. 영지 선생님이 없었다면 은희는 끝까지 날갯짓을 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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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소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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