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임 파인, 아트] 파란 영혼의 블루아이 - 온수공간

얘는 나 절대로 배신 안해요.
글 입력 2020.11.01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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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11일, 서교동 복합문화 공간 <온수공간>에서 이승희 작가의 개인전 <블루아이>가 막을 내렸다. 때로는 별다른 기대 없던 곳에서 영감을 받을 때가 있는데 이 전시가 그랬다. 그리하여 이미 지나간 전시를 뒤늦게 소개하려 한다.

 

 


온수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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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수공간은 2019년 6월에 개관했다. 특이한 점은 외부의 지원 없이 오로지 개인 두 명이 운영하는 복합문화 공간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설명에 따르자면 온수공간은 거대한 도시 사회의 네트워크에서 획일화되지 않은 자유로움과 개인이 삶의 주체로서 누릴 미시적 문화 영역을 지향한다.

 

 

 

개와 파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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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오르는데 하얀 벽 한쪽에 작은 강아지가 그려져 있다. 강렬한 포스터에서 느꼈듯 이 전시의 주요 소재가 무엇일지 감이 온다. 바로 '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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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을 올라와 전시장 입구에 섰더니 맞은편 벽에 시선을 빼앗겼다. 파란색이 이토록 강렬했던가? 청명한 하늘과 푸른 바다의 광활함으로 대표되는 색깔, 블루. 이 색을 뒤집어쓰고 눈물을 왈칵 쏟는 개의 초상. 노란 눈물에 번진 파란 바탕은 마치 눈물자국인 듯하여 처연했다.

 

19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개는 흑백만 볼 수 있다는 것이 기정사실이었으나, 최근에서야 개도 색을 구분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그 결과에 따르면 개는 적색, 녹색을 구분하지 못하고 노란색이나 파란색 계열은 쉽게 인식한다.

 

작가는 개가 바라보는 세상이 파랗다는 데서 영감을 받아 작업을 시작했다. 온 세상이 파랗게 물들고, 그 파랑 안에 개의 일생이 담긴 작품들을 보던 나는 곧 그 안에서 어떠한 처참함과 고독을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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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조망을 가운데 두고 서로를 탐색하는 작품을 보고 한참 그 앞을 떠나지 못했다. 따뜻하기만 한 노란 계열의 색이 이토록 슬프게 다가올 줄 몰랐기 때문이다. Blue의 또다른 의미, '우울'을 시각화한다면 이런 세상일까? 파랗고 노란 세계는 산뜻하거나 다채롭기만 한 것이 아니라 어떤 생명에게는 생존의 색깔이었다.

 

파란색으로 꾸려진 바닥과 철조망, 무자비하게 내리는 듯 보이는 빗줄기가 잔혹하게만 느껴졌다. 자신만의 파란색을 개발한 뒤 "파랑은 볼 수 없는 것을 보이게 하는 색"이라던 이브 클랭의 말이 떠오른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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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를 조심하라는 작은 글귀를 지나쳐 커튼을 열고 어두컴컴한 공간에 들어섰다. 멍멍! 왈왈! 개 짖는 소리가 관객을 요란히도 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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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공간의 3면을 둘러싼 풍경화와 그 속의 개들. 마치 십장생 병풍을 보는 듯하다.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설화를 그려낸 듯 신비롭기도 하다. 이 작은 공간에 눈부신 조명이 10초에 한 번 켜졌다 꺼지는데, 불빛이 없는 공간엔 푸른 안광과 푸른 종이비행기만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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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이 개들은 이 공간에 모여 있을까. 언뜻 저들의 공간에 들어온 사람을 반기는 듯하다가도 시야가 차단되면 여지없이 푸른 눈을 드러내는 게, 사람을 경계하는 것 같다.

 

어떤 아이는 주인이 있었던 듯 목줄을 차고, 어떤 아이는 저 산에서 태어나 평생을 산 듯 야생성을 풍긴다. 강아지보단 개라는 명칭이 더욱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특히 신선처럼 근엄하게 앉은 마지막 작품의 개가 강렬히 인상에 남는다.

 

와중에 개 짖는 소리는 한순간도 끊이지 않았다. 혹시 나가라는 건가? 나는 순간 끼어들지 말아야 할 개들의 세계에 끼어든 눈치 없는 이방인이 된 기분이었다. 그에 발길을 돌리려다 다시금 뒤를 돌아보았다. 불이 탁 꺼지며 드러난 푸른 안광들. 유기견에 관련한 영상을 보면 기어코 눈물을 흘리는 나로선 이 공간조차 실재처럼 느껴져 마음이 좋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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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은편 구역 입구엔 카펫 위 몸을 둥글게만 개가 잠이 들어있었다. 입꼬리가 올라간 걸 보니 좋은 꿈을 꾸고 있나 보네. 나는 점점 이 전시에 과몰입해 '감상'에서 그치지 않고 '소통'을 했다. 작가의 의도에 근접하게 다다라 전시에 빠져들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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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층으로 올라가기 전, 흰 마스크 아래 비바람을 피하고 있는 작품을 보았다. 길을 떠도는 버림받은 개들은 언제부터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여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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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 앞에 잃어버린 개를 찾는다는 전단이 붙어있었고, 3층으로 향하면 가장 먼저 흰 개가 보인다. 마치 전단지를 보고 그린 듯 똑닮은 외모로 관객을 응시한다. 전단지 속 개는 행복한 듯 웃지만 그림 속 개는 어쩐지 슬픈 웃음을 짓고 있다. 거친 돌바닥 위로 앉은 폼 또한 예사롭지 않다.

 

상상의 나래 속에서 나는 잃어버린 개를 마주한 행인이 되었다.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을 슬픔에서 구해줄 은인이자, 차디찬 길에서 방황하는 생명을 따뜻한 집으로 돌려 보내줄 희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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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 바로 위에 걸린 두 개의 그림도 그러했다. 세상 행복하게 웃고 있는 흰 개와 그런 개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검은 개. 같은 푸른 계열의 세계라도 전혀 다른 온도를 풍긴다. 한쪽은 따뜻하고 포근한 푸른 바탕, 다른 한쪽은 서늘하고 눅눅한 푸른 빛. 마치 사랑받는 강아지와 버림받은 개를 보는 듯했다.

 

상반된 두 작품을 한눈에 들어오게 배치하여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전시 구성이었다. 단지 작가는 전혀 의도하지 않은 것이고, 관객인 내가 짜 맞춘 것일지라도 이번 전시가 건넨 상상의 건덕지는 무궁무진했다. 모두 작품을 배치한 구성 덕이었다.

 

단면적으로 보일 수 있는 회화를 유기적으로 배치하여 스토리텔링을 상상하게끔 만들어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 별개의 작품의 집합전이 아닌, 하나의 서사로 이어지게 연결성을 띤 것. 이러한 점이 이번 전시를 꼭 소개하고 싶은 이유 중 하나였다.

 

 

 

사물이 보이는 것보다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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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젤이 아닌 옷걸이에 걸려있던 캔버스 뒷면엔 사나운 개와 비교적 평온한 개 두 마리가 있었다. 작가는 누군가 이들을 발견해주길 바랐기에 캔버스 뒷면에 다른 이면을 그려 넣은 것일까?

 

관심없이 지나친다면 발견하지 못했을 이면의 그림은 전시 범위가 캔버스 앞면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시장의 모든 요소가 또다른 이야기를 이루어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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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은 보이는 것보다 더 가까이 있습니다.

 

 

작가는 왜 이 글귀를 전시장 바깥에 전시했을까. 사이드미러에 왜 시골 개들을 투영했을까. 짧은 목줄이 팽팽하게 당겨진 시골 개의 삶을 돌아보자는 취지였을까? 푸른 세상은커녕 반경 5m의 세상이 전부일 생명이 우리 주변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달라는 것일까?

 

전시를 보며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작품을 좋아한다. 그것이야 말로 제대로 감상하고 있다는 방증이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는 완벽히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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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는 나 절대로 배신 안해요

 

 

위 작품의 제목이다. 저 단 한 문장으로 이 전시의 주제가 설명되지 않는가.

 

반려동물과 상생하는 법을 알아가면 갈수록 동물에게서 느끼는 감정은 인간의 것 못지않다. 가끔은 되레 반려동물과의 교감에서 더욱 진한 무언갈 느끼곤 한다. 맹목적이고 무한한 사랑을 퍼붓는 파란 영혼의 블루아이는 절대 주인을 배신하지 않기에.

 

최근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 ‘모두를 위한 미술관, 개를 위한 미술관’이 강아지를 동반 입장하게 허용하며 이목을 끌었다. 그로써 강아지들이 작품의 냄새를 맡고 보호자와 시간을 보내며 '모두를 위한 미술관'이 되었다. 그것은 단지 '개를 미술관에 데리고 올 수 있다' 정도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미술이 어디까지 포용하는가'를 담론화시켰다.

 

미술은 늘 그 시대에 걸맞은 개념으로 한보 더 나아가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는 견해에서, 반려견을 위한 콘텐츠를 본격적으로 제작하는 것은 환영할만한 일이다. 그 뒤를 잇는 <블루아이>전이 반려견이란 좁은 범위를 '개'로 확장하여 공간을 채운 점이 매우 고무적이다.

 

'개'라는 소재를 마치 설화처럼 풀어낸 독특한 회화작품부터 유기적인 전시 구성까지 관객의 흥미를 돋우는 데 일조했다. '현대미술' 하면 떠오르는 일종의 난해함에서 벗어나 독특하고 자유롭게 펼쳐낸 것에 큰 박수를 보낸다.

 

자칫 노골적인 해설이 가득한 텍스트로 상상력을 떠먹여 주는 방식이 될 수도 있었던 것을, 텍스트를 배치하지 않은 것 또한 과감하고 세련된 방식이었다. 대신 시각과 청각적 요소를 최대한 이용하여 지루하지 않고 흥미로운 텐션을 유지하였다.

 

전시가 조금 더 길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느낀다. 강아지를 좋아하거나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울림 있게 다가올 전시였는데 말이다. 그러한 아쉬움을 이 소개로나마 달래며 이승희 작가의 다음 전시는 어떤 소재로, 어떻게 구성될 지 기대한다.

 

  

[장재이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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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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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페셜스튜핏
    • 와 전시장에 실제로 간 것처럼 생생하게 읽었어요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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