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타인의 불행에 관대하기 - 82년생 김지영과 울산 화재 사건

글 입력 2020.10.28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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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꺼내 읽는다. 오랜만이다. 어쩔 수 없었다. 그동안 바빴다. 일하느라, 공부하느라. 오랜만에 책을 손에 쥔 내가 어색해서 이렇게 변명을 한다.

 

불과 몇 년 전, 어머니께 건넨 말이 떠오른다. 바빠서 도저히 책을 읽을 시간이 나지 않는다는 그녀에게 나는 이렇게 말했다. 책은 시간이 나서 읽는 게 아니라 시간을 내서 읽는 거라고. 그 말이 몇 년을 돌고 돌아 오늘의 나를 찌른다. 뜨끔하고 따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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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내가 고른 책은 조남주 작가가 쓴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소설이다. 몇 년 전에 한 번 읽었지만 다시 읽어도 재밌다. 조남주 작가는 정말 탁월한 이야기꾼인 것 같다. ‘빙의’(라고 표현해도 되려나?) 같은 난해한 소재를 가지고 이렇게 재미있는 소설을 써내니 말이다. 언뜻 보면 건조해 보이는 문장들이 갈고리처럼 내 몸을 잡아챈다. 시선을 잡아 끈다. 단순에 내리 절반을 읽어냈다. 역시 재미있는 소설이다.


한편 <82년생 김지영>은 소설을 둘러싼 환경을 바라보는 것도 제법 흥미로운 작품이다. 소설이 나온 게 2016년, 영화가 나온 게 2019년이니 제법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이 책에 대한 사람들의 열기는 뜨겁다. 이거 애써 돌려 말하려고 하니 말이 자꾸 막힌다. 그냥 툭 까놓고 말하겠다. 남자랑 여자가 싸운다. 이 책을 두고서. 여성을 두고서. 페미니즘을 두고서.


그렇다고 오늘 내가 페미니즘에 대해 이야기하겠다는 건 아니다. 아직 페미니즘을 말하기에 나는 서툴다. 모르는 게 너무 많다. 이왕이면 잘 이야기하고 싶기에 그 주제는 다음으로 미뤄둔다. 대신 보다 근본적인 것들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이를테면 타인의 불행에 대한 우리의 태도 같은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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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만 힘드냐? 나도 힘들어!”



<82년생 김지영>을 읽은 후, 자신의 SNS 계정에 먹먹한 감정을 토로하던 어느 여성 가수에게 여자로 살면서 뭐가 그렇게 힘들었냐며 따져 묻던(아마도 남성으로 보이는) 누군가의 댓글이 떠오른다. 소설의 반대편에서 남성의 불행을 이야기하는 각종 패러디도 있었다. 79년생 정대현, 86년생 김현수, 90년생 김지훈 등등.

 

물론 남성의 불행을 이야기하는 건 나쁘지 않다. 오히려 좋다. 다만 그 불행을 이야기하는 목적과 방식이 <82년생 김지영>을 비하하고 깎아내리는 거라면 문제가 된다. 그때부턴 ‘혐오’가 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건 반대의 경우라도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가만 보면 이 싸움의 양상은 적지 않은 경우가 그런 식이었던 것 같다. 누군가 자신의 불행을 이야기하면 다른 누군가가 득달같이 달려들어 그 불행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만든다. 여자니까 힘들다고? 대신 우리는 군대를 가잖아. 대신 우리는 가장으로서 책임을 지잖아. 마치 ‘쇼 미 더 머니’의 무대를 보는 것 같다.

 

사람들은 무대 위에서 자신이 더 불행하다며 자랑한다. 너보다 내가 더 불행하다고. 그러니까 너의 불행과 고통은 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정말 끔찍한 풍경이다. 서로 잘나고 좋은 것만 자랑해도 모자랄 판에 불행을 자랑하고 있으니. 그런 세상에는 아무런 희망도, 미래도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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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일, 울산의 한 주상복합 아파트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불은 건물 대부분을 태우고 16시간 만에 겨우 진압되었다. 90명이 넘는 부상자와 200명이 넘는 이재민이 발생한 가운데, 한 명의 사망자도 나오지 않았다는 정말 기적이다. 소방관들의 헌신과 주변 이웃들의 배려가 일구어 낸 결과였다. 언론과 SNS에서는 이번 화재와 관련하여 각종 훈훈한 미담들이 오갔다.


하지만 며칠 후, 세상은 다시 한번 시끄러워졌다. 이번 화재 사건의 이재민들이 울산 시내의 한 비즈니스호텔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마치 불이 번지듯 순식간에 울산시와 이재민들을 향해 여론의 뭇매가 쏟아졌다.


이재민들이 호텔에서 숙식을 하고 있다는 것에 여론이 들끓는 가장 큰 이유는 이번 화재가 자연재해가 아닌 인재(人災)라는 것이었다. 뭐,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이번 화재를 마냥 인재의 차원에서만 바라보는 건 한계가 있다. 이번 화재는 단독주택이 아닌 공동주택에서 발생했다. 아무리 인재라고 하나 이재민의 99%에게는 화재의 책임이 없다. 책임은 불을 낸 사람, 불이 쉽게 붙는 소재로 건물을 지은 공사업체 등에게 있다. 나머지는 그저 같은 건물에 함께 산다는 이유만으로 억울하게 화재 피해를 입었을 뿐이다. 그런 그들에게 이번 재난은 사실상 자연재해와 다를 게 없다.


만약 비용이 문제라면 이재민들에게 상황이 정리된 후에 추가 비용을 청구하면 된다. 혹은 화재의 원인과 책임 소재를 가려 책임자들에게 소송으로 비용을 청구하면 된다. 남들은 재난이 발생하면 그동안 체육관에서 먹고 잤다고? 미안하지만 이재민들은 반드시 체육관에 머물러야 한다는 법 조항 같은 건 없다. 그냥 다수의 사람들을 긴급히 한꺼번에 수용하기에 체육관 만한 시설이 없으니까 그동안 자주 이용했을 뿐이다.


애초에 체육관에서 이재민들을 수용하는 것도 그동안 말이 많았다. 기본적인 사생활의 보호는커녕 먹고, 자고, 씻는 것 모두가 열악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지자체가 나서서 이재민들을 위해 시의 재정이 허락하는 내에서 안락한 시설을 제공했다면 그건 오히려 칭찬해 줘도 될 일이 아닐까? 오히려 이번 기회에 부족했던 정부의 재난 지원 수준을 높이고 실질적으로 이재민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들을 강구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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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말하는대로 JTBC봐야지

 

 

그러나 울산시와 이재민들을 향한 여론은 여전히 차갑다. 씁쓸하다. 혹은 설마 이것마저도 소수에게 베푸는 특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두렵다. 나도 집에 불이 나서 호텔에서 먹고 잤으면 좋겠다는 사람들이 있을까 걱정스럽다.

 

설령 여론의 비판을 모두 인정한다 하더라도 방금 모든 걸 잃은 사람들에게 그렇게 가혹하게 대하는 게 도리에 맞는 건가 싶다. 집이 홀랑 타버린 와중에 호텔에서 먹고 잔다고 ‘어, 개꿀이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도대체 어디 있다고. 지금은 그들의 상처를 쓸어주고 보살펴야 할 때다. 그 외 나머지는 나중에 처리해도 괜찮다.


모든 불행과 고통은 상대적이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각자 처한 상황이 다르고 느끼는 바가 다르기 때문이다. 무릎이 까진 게 누군가에겐 아무 일이 아닐지 몰라도, 다른 누군가에겐 큰 시련이 될 수 있다. 결국 내 상처고, 내가 아픈 거다. 내 불행과 고통의 크기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다. 세상의 모든 시련을 겪어본 비련의 드라마 주인공이 아닌 이상, 감히 어느 누구도 나의 상처에 함부로 뭐라 할 수 없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타인의 불행에 좀 더 관대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스스로의 불행에 대해서는 의연하게 대처하라고 배우면서 왜 타인의 불행에 대해서는 감정적이고 예민해질까. 물론 모든 불행에 공감과 위로를 하는 건 불가능하다. 허나 그렇다면 하다못해 이해하려는 시도라도 해야 한다.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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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영 작가의 단편 소설 <모래의 집>을 보면 이런 문장이 나온다.

 


“사람이란 신기하지. 서로를 쓰다듬을 수 있는 손과 키스할 수 있는 입술이 있는데도, 그 손으로 상대를 때리고 그 입술로 가슴을 무너뜨리는 말을 주고받아.”

 


누군가 힘들다고 말했을 때 ‘너만 힘들어? 나는 더 힘들어!’가 아니라 ‘나도 힘들었는데 너도 많이 힘들었구나'를 말해줄 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바란다. 타인의 불행과 고통에 관대해지기를 바란다. 우리의 손과 입술의 쓰임새를, 가능성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누군가의 불행을 아무런 판단 없이 그 자체로 바라볼 준비가 되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이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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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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