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타인의 어둠 앞에서 더 이상 웃을 수 없게 된 우리에게 - 연극 '웃기는 어둠'

타인으로부터 시작돼 우리 내면으로 이어지는 어둠 앞에 선 우리
글 입력 2020.10.25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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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에겐 웃기는 어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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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웃기는 어둠>은 조셉 콘래드의 소설 ‘어둠의 심연’과 이 소설을 영화화한 ‘지옥의 묵시룩’을 토대로 독일의 대표 극작가 볼프람 로츠에 의해 창작된 오디오 극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은 무대 공연을 위해서 폭넓은 변화를 추구한다. 볼프암 로츠는 직접 “전체적으로 대본 변경, 삭제, 다른 텍스트 삽입을 수용할 뿐만 아니라 적극 권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한 배경 하에서 이 연극은 2020년 국내에서 초연되며 지금, 여기, 우리에 대한 이야기로 변주되어 초연되었다.


이 연극을 보는 내내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은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문구였다. 솔직히 말해보자면, 이 연극을 보러 와 객석에 앉아 있기 전, 아니 어쩌면 무대 위의 어쩐지 불안정해 보이는 한 남자가 자신을 소말리아 해적이라고 소개하기 이전에 나에게 ‘소말리아인’은 어떤 고려 대상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소말리아인들이 어떤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는지, 그들이 어떤 불합리한 일을 당하고 있는지 나랑은 아무 상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이 내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을 소말리아 해적이라 소개한 이는 자신이 주얼리호에 침입, 그러니까 올라탈 수 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변론하기 시작한다. 그가 살아온 고향의 환경, 그가 품었던 희망, 그것이 좌절로 돌아선 과정, 결론적으로 그가 어떤 목적으로 하필이면 한국의 기계화된 차가운 배 위에 오르게 되었는지에 대해 말이다. 그가 변론을 늘어놓는 동안, 나는 그의 입장과 환경에 어느정도 공감 했고, 그가 안타깝게 느껴졌다. 그가 느꼈을 세상에 대한 배신감과 절망의 감정을 나도 함께 느끼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의 말이 끝나고 장면이 전환되어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전개되는 순간, 그는 또다시 내 뇌리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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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그랬다. 나는 그에게 있어 타인이었고, 그도 나에게 있어 타인이었기에, 그의 어둠은 내게 그저 ‘웃기는 대상’ 이었다. 그것이 꼭 ‘웃기는’ 감정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한 순간의 가벼운 감정을 가지고 대할 수 있는, 나의 일이 아니기에 함부로 정의하고 또 금세 잊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은 지옥이라는 말은 어느정도 사실이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타인이고, 그렇기 때문에 진정으로 누군가의 입장일 수 없다. 이 어쩔 수 없는 사실은 누군가에게는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어 버린다. 어느 소말리아 해적이 어부의 꿈을 가지고 나온 바다에서 바닥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그 아름답고 잔인한 풍경에서 대상 없는 분노를 느껴야만 했던 것처럼.


한창 석해균 선장이 소말리아 해협에서 해적들에 의해 납치된 사건이 회자되던 때가 있었다. 그 당시 많은 이들이 소말리아 해적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은 어쩌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속한 국민이라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소말리아의 입장에서 보자면 내전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을 틈타 허락되지 않은 지역에서 어업을 하는 타 국가의 조업은 불법이며 침입이라고 여길 수 있었다.

 

결국 우리는 내가 속한 집단에서, 혹은 나의 주변, 나의 관심사에 속하는 것들에 대해서, 좀 더 본질적으로는 ‘나’의 입장에서 판단을 내리고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대부분의 이들은 그렇게 타인의 어둠에 대해 굳이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며, 그것이 나쁘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웃기는 어둠>은 나를 제외한 다른 이들에게 타인일 수 밖에 없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곳은 어둠의 뫼비우스 띠에 갇힌 지옥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시사한다.

 

 

 

어둠의 뫼비우스 띠의 종착점은 우리의 내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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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말리아 출신 해적의 변론 이후 장면이 전환되면, 대한민국 특수 사령부의 상사와 탈북민 출신 하사가 정신 이상 증상을 보이는 중령을 찾는 기밀 임무 수행을 위해 힌두쿠시를 거슬러 끝없는 밀림 속으로 항해하는 여정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들은 그 끝없고 깊은 밀림 속에서 세계 곳곳을 물들이고 있는 어둠과 마주한다. 원주민들에게 대가 없는 용역을 요구하며 그들의 용변 환경조차 보장해주지 않는 일본의 다국적 기업과 마주하기도 하고, 전쟁의 폐해로 가족을 잃고도 그것을 자신의 탓이라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이를 만나기도 하며, 괴변 같지만 언뜻 들어보면 그럴듯 하기도 한 행복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설파하는 교주를 만나기도 한다.


그들은 밀림이라는 완벽히 고립되고 문명과 분리된, 어쩌면 그리하여 자신의 편익에서 가장 유리된 환경에서, 평범한 일상에서는 충분히 무시하고 넘어갈 수 있었던 타인의 어둠을 맞이하며 점차 혼란스러운 감정을 겪게 된다. 정신 이상을 앓고 동료들을 전부 쏴 죽여버렸다는 그 중령과 같은 일을 저지르고자 하는 충동도 느끼게 된다. 어쩌면 그들은 타인이라는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면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지도 모르겠다. 여태껏 자신의 상황과 이익을 우선시해왔고, 그것이 당연한 사회에서 살아온 이에게 타인의 어둠을 받아들이고 수용할 수 있는 여력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기도 하다.


극 중에는 뜬금없이 완전히 다른 시공간의 장면이 하나 삽입된다. 2020년 현재 코로나 시국 속에서 이 작품의 극작가로 보이는 남자가 확진자 수를 포함해 그가 살고 있는 현재, 그러니까 관객들의 시간과 일치하는 ‘지금’의 상황 속에서 그의 일상을 읊는다. 안전한 관객석에서 점점 불안정해져 가는 특수 사령부 두명의 상황을 관전하던 나를 포함한 관객들에게는 어쩌면 전환의 순간이었다. 생각해보면 두 특수 사령부와 우리의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을 지도 모른다. 우리는 현재 ‘코로나 19’가 불러온 밀림 속을 헤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더 이상 타국가의 상황을 남일처럼 여길 수 없고, 나의 이익과 상황만을 따져서는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다. 그 어느때보다도 타인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필요한 시간인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코로나 19가 불러온 밀림은 이 연극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우리에게 끝없는 혼란과 더불어 타인에 대한 혐오를 불러왔다. 우리는 각자의 동굴 속에 숨어 들어 감염자에 대한 혐오를 그 주위에 울타리처럼 쌓아 올리고 그것을 스스로의 안전을 위한 정당한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어느때보다 협력과 타인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시점에서 오히려 타인에 대한 극단적인 혐오감이 번지게 된 것은 아이러니하지만, 타인의 어둠 앞에서 여태까지 웃을 수 있었던 우리에게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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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어둠의 뫼비우스 띠는 돌고 돌아 결국 우리 내면을 종착지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대한민국 특수 사령부의 상사와 하사는 힌두쿠시를 거슬러 끝없는 밀림을 항해하며 다양한 군상의 타인의 어둠을 마주하고, 결국 자신조차 이해하기 힘든 자신 내면의 어둠과 마주하게 된다. 그것은 타인의 어둠이 결국 나의 어둠과 다르지 않음을 인지하게 될 때 비로소 그들을 덮쳤다. 정신 이상으로만 보였던 중령이 왜 그의 동료를 죽일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풀어놓는 이야기는 이 지점을 짚는다.


그는 자신의 동료들의 수와 적들의 수에 어떠한 가중치를 두지 않고 그저 ‘계산’한다. 결국 적들을 공격하기보다, 적들에게 공격당하기보다 자신이 남은 동료들을 전부 죽이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는 이해하기 힘든 결정을 내렸고, 그것은 타인의 어둠 밖의 영역에 있는 이들에게는 ‘정신 이상’으로 보였을 것이다. 물론 중령의 선택이 옳거나 바람직하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진정으로 타인의 어둠이 자신의 어둠과 다르지 않다고 느낀 인물이라는 점에서 우리가 그의 이야기에서 얻을 수 있는 시사점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서사극을 통해 불가능한 연극 이루어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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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히트의 서사극은 이전까지 절대적인 우위를 차지해 왔던 아리스토 텔레스의 <시학> 이론에 반발하며 관객들이 무대 위의 사건에 몰입하고 감정이입 하는 것을 막아 낸다. 브레히트는 이 반아리스토텔레스적 이론인 ‘서사극’을 주창한 인물로, ‘낯설게 하기’라는 기법을 통해 끊임없이 관객들에게 무대 위의 사건은 단지 연극일 뿐임을 각인 시킨다. 연극 <웃기는 어둠>은 이러한 브레히트의 서사극을 확장 시켜 우리 관객들에게 구체적인 ‘행동’을 요구한다.


<웃기는 어둠>은 최소 3개의 다른 시공간적 장면을 다룬다. 첫 번째로 소말리아 국적의 해적이 한국 법정에서 변론을 늘어놓는 장면, 두 번째로 대한민국의 특수 사령부 소속 상사와 하사가 밀림을 항해하며 겪는 이야기들, 그리고 그 중간에 삽입되는 2020년 현재 극작가의 이야기. 이 3개의 장면을 어떻게 보면 전혀 개연성이 존재하지 않고, 그들이 이어지는 지점도 한번의 암전으로 진행될 뿐, 상당히 불친절하다.


이러한 구성은 관객들을 당황시키기 충분하다. 극에 몰입하여 극 중 등장인물의 상황에 감정이입 하기 보다는 끊임없이 몰입이 방해되고, ‘대체 이 극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뭐야?’ 라는 생각을 하게끔 만든다.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극이 의도하는 바가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이 극은 무대위의 사건으로 종결되지 않는다. 결론은 관객에게 달려있다. 무대 위의 사건들은 관객들에게 꾸준히 ‘타인의 어둠’에 대해 생각해볼 거리를 던져 주었고, 그것에 대한 생각을 정립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관객의 몫인 것이다.


그리하여 이것은 ‘불가능한 연극’이다. 연극은 기본적으로 허구와 실제가 충돌하는 것으로, 연극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은 실제의 일에 기반을 둘 수는 있지만 결국 허구적인 것이다. 이 허구적인 것을 통해 실제 현실을 바꾸고자 한다면, 그것을 불가능한 연극이라고 부른다. 그런 점에서 <웃기는 어둠>은 현실 속에 존재하는 ‘타인의 어둠’을 극 속에서 허구적으로 담아내고, 그것을 ‘낯설게 하기’기법을 통해 관객들에게 끊임없이 각성 시키고 행동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허구를 통해 관객의 실제적 행위를 이끌어내고자 하는 불가능한 연극이라고 볼 수 있다.


극이 끝나가는 마지막 순간에 소말리아 해적의 이야기가 다시 시작된다. 그리고 그를 특수 사령부 상사가 막는다. “여기는 네가 있을 곳이 아니야”라는 그의 말에 소말리아 해적은 반문한다. “그럼 나는 어디 가서 내 이야기를 하란 말이야?” 극 중 다른 차원의 이야기로 여겨졌던, 말할 수 없었고 말했지만 들리지 않았던 이들의 목소리는 마지막 순간 격렬히 충돌하며 관객들이 ‘들어 주기를’ ‘귀 기울여 주기를’ 갈망한다.


극장을 나서면서부터 우리는 어쩌면 곳곳에서 아우성 치는 타인의 목소리들을 듣게 될지도 모른다. 어느 것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할지 분명치 않고, 어쩌면 들어주는 것만으로 충분히 혼란스러울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이 연극이 여태까지 그것을 외면해왔고, 그것이 당연했던 우리에게 어둠의 뫼비우스 띠 위에 존재하는 우리의 좌표를 알려주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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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다온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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