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아빠의 역사 - 연극 '새들의 무덤'

글 입력 2020.10.20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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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찾은 극장이다. 공연 직전 묘하게 가라앉는 분위기와 조명, 그리고 사람들이 띄엄띄엄 모여든 객석까지 전부 오랜만에 만나는 것이었다.

 

나는 첫째 줄에 앉았다. 배우의 움직임에 따라 날리는 옷깃에 가만한 공기가 이리저리 튀어 오르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질 만큼 무대와 가까운 구석이었다. 객석에 앉은 나는 팸플릿을 공연히 뒤집으며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글자를 읽으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현대사’, ‘아버지에 대한 연대기’, ‘새를 따라’···. 진짜 새가 나오는 걸까, 하는 실없는 생각이 들 무렵, 무대가 완전히 어두워졌고, 소음이 잦아들었다.

 

종소리처럼 들리는 음악이 흘러나오자, 미색의 상복-처음에는 상복인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을 입은 배우들은 어떤 형상을 만드는 듯 몸을 구부렸다. 텅 빈 무대가 순식간에 ‘섬’으로 변한 순간이었다.

 

 

컨셉사진1.JPG

 

 

이 작품은 2020년 현재를 제외하고 총 6개의 시간을 다룬다. 2020년의 ‘오루’는 무언가를 보기 위해 오래전 떠났던 고향으로 다시 돌아오고, 그곳에서 어린 새를 만나며 자신의 과거를 여행하게 된다.

 

가장 오래된 기억, 부모를 막 잃은 어린 오루 앞에 동네 사람들이 모여 귀신 들린 것이 분명한 돼지를 잡느니 마느니 했던 1968년 진도에서의 그 기억으로부터 시작된 여행은 아내를 만나 두 딸을 낳았던 창신동의 봉제공장과 조선소를 거치고, 고통스러운 딸의 죽음을 마주해야만 했던 2017년의 기억과 함께 끝나 다시 현재로 돌아온다. 주인공의 어린 시절을 통해 작품은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이후의 삶을 보여주고, 또 시대가 달라지며 고향을 떠나 서울에 자리 잡을 수밖에 없었던 청년기의 주인공을 통해 이데올로기와 자본 앞에서 무력하게 쓰러지는 개개인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런 설명을 작품을 보기 전에 먼저 들었다고 해도 나는 아마 큰 감흥을 느끼지는 못했을 것이다. 현대사는 늘 답답하고 가슴 아프게 느껴지기 마련이며, 나는 이런 주제를 가진 작품 앞에서 어느 정도로 내 감정이 동요하는지 대강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들의 무덤’이 불러온 격양은 예상 밖이었다. 나에게 이 작품은 전혀 연극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보다도 훨씬 개인적인 무언가였다. 처음에는 두루뭉술하게 보였던 일련의 사건들이 모여 그려낸 삶은 말 그대로 나의 것이기도 했고, 내 아버지의 것이기도 했다.

 

*

 

어쩔 수 없이 아빠의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아빠는 전라남도 신안의 한 섬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진도 옆에 있는 이 섬은 아주 작은 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유명한 것도 아니어서 이 섬을 안다고 하는 사람을 나는 아직 만나보지 못했다.

 

아빠는 80년대에 그곳을 떠나 창신동에 자리를 잡은 뒤, 매일 언덕길을 오르내리며 고등학교에 다녔다. 같이 학교에 다니던 친구의 여동생과 살림을 차린 아빠는 쌍둥이를 낳았고, 그렇게 두 딸이 생겼다. 고등학교에서 기술을 배운 아빠는 건설노동자로 열심히 일했다. 딸들이 자라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바다에서 큰 사고가 났고, 그래서 그들은 수학여행을 갈 수 없었다.

 

써 놓고 보니 더 이상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작가를 붙잡고 혹시 나를 아는지 물어보고 싶은 기분이다. 물론 이 작품이 보편적인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이 모든 장면이 나에게만 속한 역사가 아니라는 것 또한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의 것이 아닌 이 이야기 앞에서 공감을 넘어서서 일치감을 느꼈다. 단순히 아빠가 생각나서 그런 건 아니었다.

 

무대 위에는 누구의 탓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결국 어찌어찌 일어나버린 모든 잘못이 나열된다. 새 시대가 올 때마다, 변하지 않을 것 같던 가치와 긍지는 사라진다. 시간이 지나도 농사지을 땅을 돌려받지 못하자 사람들은 바다로 나가 고기를 잡았고, 지주를 때려죽였던 그 사람은 사람들에게 배를 빌려주기 시작했다. 그가 지주나 다름없다고 소리를 지르던 그의 아들은 더 나이가 들자 배를 빌려주고 받은 돈을 땅을 개발하는 데에 투자했다. 그 꼴이 보기 싫어 어촌을 떠나 서울에서 공장을 차린 남자는 도박에 빠졌다. 살기 위해 배우고 익힌 기술은 거대한 돈의 이치에 따라 압류되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은 ‘새섬’에서 시작되어 ‘새섬’으로 돌아왔다.

 

새섬은 살아서는 도착한 사람이 없는 장소다. 나쁜 일을 불러오는 돼지를 죽이고 평화를 되찾으려 했던 오루의 부모는 바다에서 사고를 당해 새섬에 갔고, ‘빨갱이’ 소리를 듣던 서울에서 온 젊은이와 동네 누나는 잡히지 않으려면 새섬에 가야만 한다고 고집을 부린다. 평생 수많은 사람들의 무덤으로 서 있었을 새섬이 ‘새 섬’으로 읽히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새로운 섬, 새로운 세상. 변화를 위해서는 늘 죽음을 감수해야만 한다. 누군가는 대가를 치르고 싶지 않아서 도망쳤고, 누군가는 기꺼이 목숨을 걸었다. 누가 옳고 그르다고 말할 수 없는 시간들이다.

 

그 복잡하고 무자비한 흐름 앞에서 오루처럼, 다른 이들이 그렇듯 그저 적당하게 살다가도, 어느 날 새섬이 보고 싶어지는 것은 어영부영 굴러가는 이 사회와 그 역사가 한 사람 한 사람과 어떻게든 이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묘한 일치감은 거기서 오는 듯하다. 오루의 이야기가 여기서 죽고 사는 누구나 겪는 것이라서, 그리고 나 또한 그 무덤에서 누군가를 볼 것만 같아서.

 

아빠가 나고 자란 궤적이 나와는 무관하다고 단호하게 생각했던 적이 몇 번 있다. 아빠를 사랑하고 사랑하지 않고의 문제가 아니다. 나는 그저 늘 개인주의를 외치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내게 아빠의 삶은 아빠의 사적인 자취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한 것뿐이다. 하지만 ‘새들의 무덤’을 보며 나는 아빠의 삶으로부터 이어지는 연속성, 그리고 나의 역사와 다르지 않은 ‘아빠의 역사’를 마주할 수 있었다.

 

*

 

집에 돌아온 나는 무심하게 말을 던졌다.

 

“아빠, 그때 창신동에 뭐가 있었어?”

 

아빠는 곧 봉제공장이 있던 골목과 부연 실 먼지에 대해 신나게 떠들기 시작했다.

 

저녁에 마신 소주 때문에 노을 지는 바다처럼 붉어진 아빠의 두 뺨을 바라보며 나는 묻고 싶어졌다. 혹시 새섬을 아느냐고, 아빠가 살던 섬에서도 새섬이 보이냐고.

 

 

새들의 무덤_포스터.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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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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