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오피니언을 위하여 [사람]

그런 중에 겨울은 오고 있다.
글 입력 2020.10.18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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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개의 시리즈 오피니언을 마치고, 글을 잠시 놓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오피니언을 위한 구상의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고 해야겠다. 한 개의 오피니언을 위하여, 기고 날이 다가오기 한참 전부터 나의 의식 배면에는 구상을 위한 사고활동이 전개되곤 했고 필요한 시간은, 점점 길어져 가고 있었다. 근래에는 그 구상 작업에 대해, 지친 손을 아주 놓아버리었다.

 

책이 되었건, 연극이 되었건, 공연이 되었건, 언제부턴가 그를 감상하는 동시에 이것을 어떻게 ‘선보일만한 글’로 바꾸어보나 하는 고민이 줄곧, 내 안에 달려있음을 본다. 그러나 요 며칠간에는 ‘구상의 고민’을 잠시 내려두었으니, 지금은 참말로 머리 안이 훤한 백지다. 감정과 감상들이야 어디로 떠나랴. 다만 오피니언은 그것보다 더 긴 것, 주제와 형식과 구조, 그리고 설득력을 필요로 하는 ‘선보일 글’인 때문에 지금, 내 안의 원고지에는 망연한 적막이 감돌고 있다.

 

최근엔 책 읽을 시간이 없었다는 것도 한 가지 변명이 되어준다. 물론 정말로 읽은 책이 아주 없진 않지만, 이것들에서는 또 오피니언이 나오려 하질 않으니 이번 경우는 참 난감하다. 버트란드 러셀의 ‘철학이란 무엇인가’, 시인 이성복의 격언집인 ‘그대에게 가는 먼 길’, 경희대에서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시는 최성호 님의 ‘인간의 우주적 초라함과 삶의 부조리에 대하여’, 카뮈의 ‘시지프 신화’ 등을 돌아가며 깔짝이고 있는 나날. 이렇듯 읽은 책이 없지는 않다만 이러한 성질의 읽을 것들에서 내 오피니언은 나오려 하지 않는다. 오피니언은 하나의 의견이기 때문에, 거짓일 수는 없을 까닭이다.

 

짤막한 의견쯤이야 왜 없으랴. 그러나 지금 내 노트에는 ‘선보일 만한’ 글이 많지 않고 그것은 내 머릿속에서도 꼭 마찬가지이다. 다분 공격적이거나, 회의적이거나, 비관적이거나, 비판 일변도의 의견들이 주를 이루는 나의 안으로부터, 하나의 글이 영글기 위해서는 꽤나 긴 변증법이 필요했다. 그것은 ‘다른 입장의 나’와 겨루는 핑-퐁. 저돌적인 성향의 주 자아와 회의적인 성향의 자아가 저들끼리 알아서 신나게 주고받는 일이다. 가만 앉아서 이런 사고게임을 시작하면, 질문과 답변, 주장과 반론, 그리고 합의에 이르는 퍽 우습고도 피곤한 과정을 거친 끝에, 하나의 컨셉이 나온다. 그런 중에 방에는 꽁초만 쌓여가니 이거 원, 어느 쪽으로 보아도 내겐 해로운 짓이다. 머리가 지-끈한 것이 담배 때문인지 신열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땠든 이마가 빨갛게 달아오를 때 즈음해서 그만두곤 하는데, 가끔은 내 머리가 구닥다리 CPU 쯤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어처구니없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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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반이 못 읽은 책이다.

 

 

하나의 의견이 나오기 위하여,

 

의식 배면에 심어둔 견해의 씨앗에는 기나긴 시간과 기다림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체감하는 요즘이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 동안 아트인사이트에서 써내려간 글들은, 그보다 더더욱 오랜 시간을 내 의식의 곳간 속에서 영글어 왔던 것들. 상등품은 못 될지라도, 나름으로 익혀온 동치미 국물이 이젠 바닥을 보인다. 겨울은 오고 있고, 내 의식의 계절에도 그에 닮은 쌉쌀한 바람이 감돌기 시작하니, 바야흐로 장독을 채워야 할 시간이다. 그러나 그것이 가당키나 할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래저래 해야 할 공부가 많은 까닭이다. 넉넉히 김장을 해 보이기엔 주어진 일이 너무나 많은 까닭이다.

 

 

하나의 오피니언을 위하여,

 

본격적으로 개요를 짜고 글 몇 자를 적어 보고 이내 지우고를 반복하는 대략 평균 10시간의 활동보다도 먼저, 내겐 훨씬 길고 은밀하고 끈질긴 구상활동이 필요했다. 이래저래 범재 凡才도 못 되는 것이다. 정말이지 나는 글을 잘 못 써내는 사람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 비효율적일 정도로 질긴 구상활동보다도 또 아득히 먼저, 견해의 씨앗을 움 틔우는 긴 시간이 내게는 있어야 하겠는데, 예컨대는 내가 철학서 하나를 읽었다고 해서 그에 대해, 아니 그를 가지고 글을 써낼 수는 없는 노릇인 게다.

 

그에 대한 개인적 견해쯤이야 없으랴. 그러나 선보일 견해, 나아가선 그를 짜임새 있게 구성하여 전달력과 가독성을 갖추어낸 ‘선보일 글’이란 이렇듯 내게 참 어려운 일이다. 다른 데서 볼 수 있을 법한 글을 가지고선, 그를 제출하는 내 손만 초라해질 따름이기에. 이것도 다 쓸모 적은 고집 내지 자존심일 터이나, 그럼에도 잘 벗어내질 못할 이 강박에는 방도가 없다.

 

 

하나의 오피니언을 위하여,

 

얼마나 긴 시간을 필요로 하는지에 대한 상념으로 젖어드는 밤이다. 개인 노트에 길게도 적어둔 이전의 글, 자취를 밟아도 본다. 아무래도 여기 ‘미리 적어둔 글’들을 선보이기 위해서는, 적어놓은 것보다도 훨씬 길고 복잡한 설명들이 필요할 것임을 알기에 노트를 덮는다. 한들, 전달해낼 수 있을런가 생각해보기도 어려운 것들. 참, 우스운 밤이다. 이렇게 글이 많은데 선보일 만한 것도, 써낼 만한 것도 없다니.

 

 

그래 그런 중에 겨울은 오고 있다.

 

겨울은 언제나 이상한 고독을 몰고 온다. 함께 오는 것이렷다. 해가 남중고도에 박힌 때까지도 만물에는 잿빛이 감도는 계절, 볕의 색에서 회의의 냄새가 비추이는 이 계절엔 역시, 책을 잔뜩 갖고 어느 독서실의 지하에 박혀 김장이나 해내는 것이 제격이렷다. 그때 덮수룩한 파카와 겹겹이 옷가지에 파묻힌 채로 신열을 뿜고 있을 나의 이마는 퍽 뜨겁겠지만, 가끔 눈이나 내려주면 더없이 좋을 일이다.

 

바람 쉼을 하러 지하를 나서면, 저기 눈이 떨어짐을 처마 끝에서 가만 바라보며, 지금 읽은 것들과 그것들이 이 안에서 씨앗을 키워내고 있다는 상념과 저 눈의 떨어지는 궤적과 곧 바닥에 처박힐 섭섭함과 또 곧 녹아버리는 슬픔과 녹아버린 올 한해와 아쉬움과 아쉬움, 끝없는 쓸쓸함을 벼려내고 있겠다. 그러면서 동치미에는 맛이 배어나더라는 것이다.

 

올겨울은 어떠할는지. 나는 글을 쓰고 있을런가, 여태처럼? 내 할 일이 많아 못 될 일이다 싶으면서도, 또 계절이 다 가도록 끝일랑 없을 그 쓸쓸함이 버거울까 싶으면서도, 은근히 기다리게 되는 것이렷다. 장독 하나를 채우고 또 하나를 채우고, 눈이나 내려주면 그 위에 소복 쌓일 하얀 상념들이, 벌써부터 그리운 일로서 내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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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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