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의 일기] 나는 이 우울과 어떻게 마주해야 할까?

내 안의 슬픔이 마주하기
글 입력 2020.10.12 09:09
댓글 4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코로나 블루’라는 말이 곳곳에서 들린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계속되면서 우울을 느끼는 마음 상태를 뜻하는 단어다.

 

낯선 단어가 금방 익숙해질 만큼 많은 곳에서 사용하고 있는 듯하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단어이기도 하고. 단절 속에서 우리가 느끼는 우울은 도대체 뭘까? 나는 종종 끝이 없어 보이는 우울 속으로 빠져든다. 나는 이 우울과 어떻게 마주해야 할까?


영화 <인사이드 아웃>을 보면 친구들과 사이가 좋지 않던 ‘슬픔이’ 캐릭터가 결국 기쁨이와 화해하고 존재 그대로를 인정받는 장면이 나온다. 내 슬픔과 우울을 덮으려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게 우울을 마주하는 시작이지 않을까. 우울을 흔히 더럽고 불결하고 끔찍한 감정 정도로 치부하는 것 같은데, 이 감정 뒤에 있는 내 욕구가 무엇인지 돌아보지 않고 외면하는 태도 자체가 우리를 더 갉아먹는다.


얼마 전에 봤던 영상에서 봤던 ‘우울에도 자격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라는 말이 계속 머릿속에 맴돈다. 인터넷의 우울증 테스트를 해본다. 그런데 지금 규정되어 있는 우울증에 속하지 않으면, 그냥 내 스스로가 나약한 사람으로 느껴진다. 이 정도의 어려움은 다들 잘 이겨내는데 나만 징징거리는 거 아닌가 싶은 생각들. ‘우울’, ‘우울증’에 대한 정의를 넓히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내 속의 슬픔이를 지우지 않고 어떻게 하면 같이 잘 살아갈 수 있을까?

 

 

[크기변환]classroom-1910011_1280.jpg

 

 

우울과 관련하여 나에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공간은 학교다. 학교의 ‘전통적인 교육’ 방식이 그랬다. 정답과 이상적인 상, 채워 넣어야 할 지식 들을 나열해두고 이 틀에 맞지 않는 부분을 가지치기 하듯이 잘라낸다.

 

학교에서 느꼈던 위계는 우리를 공포에 떨게 했고, 그 공포와 부담과 책임과 죄책감을 공부와 대학, ‘더 나은’ 삶을 향한 동력으로 사용하라 몰아붙였다. 학교 규칙을 어긴 학생들의 뺨을 때리고 욕을 했다. 경찰차와 구급차가 학교에 무서운 소리를 내며 달려왔다. 수업 시간에 조는 것은 뺨을 맞을 정당한 이유가 되어있었다. 학교 내에서 실외화를 신는 것은 무릎 꿇어 마땅했다.

 

내 눈앞에 당장 보이는 길은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여겨졌다. 학교에서는 피교육자의 목소리는 철저히 묵살되었고, 자치권 행사나 목소리 낼 수 있는 구조 또한 부실했다. 여러 이유로 탈학교를 선택한 청소년을 향한 시선은 뾰족했다. 나중에 대학 어떻게 가려고 저러지, 어떻게 먹고살려고 그러지, 자퇴했으니 비행청소년 아니냐, 미숙하다. 대안학교를 선택한 청소년은 문제 있으니 그곳으로 간 것 아니냐는 편견에 가둬진다. 청소년이라는 이유로 우울증은 중2병이라는 이름으로 치부되어버린다.


아마 그때의 나는 우울증을 앓았던 것 같다. ‘정상성’이라는 게 나를 숨 막히게 할 때마다, 내 감정들이 계속해서 무시될 때마다, 나는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느낌이었다. 그때 도움이 된 것은 연결, 존중, 욕구, 느낌을 중요시하고, 자신의 느낌과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거였다. 나는 스스로와 비폭력적으로 대화하면서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기 시작한 것 같다. 항상 된다/안 된다, 옳다/그르다, 라고 배워온 것들. 그 판단이 상대를 향할 때 분노가 되고, 나를 향할 때 자책이 된다. 자책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싶다. 그때의 나를 어떠한 판단의 잣대 없이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고 싶다. 나와 연결되고 싶어. 그냥, 그렇구나. 그랬구나.


2020 에코페미니스트들의 컨퍼런스에서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의 저자 조한진희님의 ‘질병권’ 이야기를 들었다. 말 그대로 잘 아플 권리를 의미하는 질병권은 질병이 개인의 노력으로만 해결될 수 있는 건가? 라는 의문 속에서 나오게 된 단어라고 했다. 병에 걸린 사람을 보고 저 사람이 짜게 먹더니 병 걸릴 줄 알았다, 라고 이야기하지만 사실 생계나 직장 속의 스트레스로 식습관이 변화했을 수도 있다는 거다. 개인이 열심히 노력만 하면 병에 걸리지 않는 걸까? 여전히 건강은 개인의 노력으로 쟁취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나는 병원에 가거나 병에 걸린 것을 숨기게 되기도 한다. 학교에서 단체 건강검진을 하고 난 뒤에 요로결석 판정을 받은 적이 있다.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내 검진에 문제가 있으니 나오라고 해서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적이 있다. 내가 마치 죄라도 지은 것처럼 그 시선이 무섭게 느껴졌다.

 

한국은 정신과를 찾는 비율이 외국의 1/4도 안 된다고 한다. OECD 자살률 1위임에도 불구하고. 병원에서, 정신과에서 치료받는 게 단순히 개인 노력 부족으로 치부되지 않아야 한다. 누구나 잘 아프고 잘 치유받을 수 있어야 한다.

 

 

[크기변환]trees-3410836_1280.jpg

 

 

새로운 자극이나 흥미가 있을 때 활기가 생기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런 자극이나 흥미가 전혀 통하지 않을 때도 있다. 계속해서 무기력할 때. 내가 이걸 하면 기분이 나아질 것 같은데, 그것조차 할 에너지가 생기지 않는 상태. 그때 중요한 게 지속성이라는 이야기를 어딘가에서 들었다. 요즘 나는 하루에 스트레칭, 명상, 산책, 딱 이 세 가지를 지속적으로 하는 시도를 하고 있다.


‘잘 해내고 말겠다’라고 다짐하고 시작하면 정말 하기가 싫어서. 그래서 그냥 하루 중 언제든, 10초라도 하는 것에 의의를 두고 있다. 부담을 덜어내니까 거짓말처럼 쉬워졌다. 작은 성취와 보람이지만 계속해서 쌓아가는 시간들에서 다음 일도 할 수 있겠다는 에너지가 생기는 느낌이랄까? 더군다나 요즘엔 계속 집에 있다 보니까 밖에서 나무와 바람을 느끼는 시간이 절실하다. 산책 시간에는 잡생각도 안 들고, 이렇게 아름다운 지구와 나는 연결되어 있구나를 느낀다.


우울을 바라보는 좁은 시선들이야말로 단절을 더 두텁게 쌓았던 것은 아닐까? 나의 우울과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시간들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내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 있도록 우울의 경계가 넓어지는 것. 서로를 향하는 존중 속에서, 비로소 우리의 연결에서의 안전함을, 끈끈함을 느낄 수 있기를.


 



[장소현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이름
비밀번호
자동등록방지
69783
댓글4
  •  
  • 비의세상
    • 잘 읽었습니다
    • 0 0
  •  
  • 자연스럼
    • 공감합니다
      잘읽었어요~~감사해요
    • 0 0
  •  
  • 레몬
    • 장소현님의 글을 읽으면서 제가 겪었던 우울증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된 것 같아요. 저로선 학창 시절에는 그저 학교에 잘 순응하려고만 했던 것 같아요. 저를 살펴보는 것보다는 일단 학교에 잘 보이는 게 중요했고, 그게 당연한 분위기이기도 했으니까요. 어른이 되고 나서 겪은 우울증을 어느 정도 겨우 회복한 후에 내가 왜 그렇게 한 번에 무너져야 했는지 이해하고 싶어 과거를 추적해보기도 했는데, 그렇게 학교에서 지내야 했던 제가 안쓰럽게 느껴졌어요. 그리고 이렇게 억눌리고 살았으니 결국 모든 게 터져버리는 우울증에 걸리는 건 오히려 필연적인 일이었겠구나 싶었어요. 장소현님의 글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던 것 같아요.

      이제야 우울증에 대해, 정신적으로 아픈 것에 대해 예전보다는 더 자유롭게 이야기가 오고 가고 있지만 여전히 그에 대한 부정적인 두려움이 잔재처럼 남아있다는 생각도 떠나지 않는 것 같아요. 저는 우울과 슬픔이 인간으로서 지니는, 인간이기에 지니는 감정이자 상태라고 생각해요. 그러기에 무작정 배제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하고요. 그래서 장소현님의 글처럼 인간으로서 겪는 우울과 슬픔에 대한 이야기가 우리 사회에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이야기는 공감하게 하고, 다시 나를 이해할 수 있게 하고, 함께할 수 있게 하니까요.
    • 0 0
    • 댓글 닫기댓글 (1)
  •  
  • 삐까쯐
    • 레몬방금 버스에서 공감되는 문장 하나를 발견했는데요, "사회적 질서는 절대 당신을 고려하여 만든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 질서와 당신의 질서는 당연히 다를 수 있다. 다르다는 것은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라는 문장이었어요. 그런데 우리는 사회적 질서라는 정답지 하나로 죄책감을 만들고 수치심을 부여하고 있는 것 같아요. 사회적 질서를 무작정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오래동안 고여있는 질서들은 개인에게 우울과 슬픔조차 느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지시하는 듯해요.

      저도 최근에 이상하게 심장이 철렁하는 느낌이 오거나, 그 느낌에 잠에서 깨거나, 작은 일에도 긴장하고,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이유모를 우울감들을 느끼고 있어요. 말씀주신대로 예전보다 자유롭게 이야기가 오고 가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것을 완전히 털어놓을 사람을 찾기가 어렵더라고요. 병원을 가고 싶었지만 정보가 부족하거나 가격이 너무 비싸거나 등의 이유로 찾아가지 못했어요. 그렇지만 이렇게 비슷한 생각으로 소통하는 시간에서 위로를 얻게 되네요. 주변에서도 여전히 사회의 질서에 눌려 헐떡이는 친구들을 많이 만나는데요. 누구나 나만의 질서를 찾고, 그 자연스러움을 스스로 알아채는 시간과 이야기가 더 많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이 생기네요. 즐거운 이야기 감사합니다.
    • 0 0
 
 
 
 

등록번호 : 경기, 아52475   |   E-Mail : artinsight@naver.com
발행인/기사배열책임자 : 박형주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박형주
Copyright ⓒ 2013-2020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트(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