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상처를 치유받을 자격을 논하기보다 중요한 것

윤이형 저, 「붕대 감기」
글 입력 2020.10.04 13:09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삶은 수많은 불가항력적인 일들의 연속이다. 어쩔 수 없이, 그럴 수밖에 없이 행복하고 아프기를 반복한다. 예상치 못한 때 누가 언제 할퀴었는지도 모르는 상처가 나 있고, 누가 치유해주는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서둘러 상처를 봉합해야 하는 상황이 들이닥친다. 다만 저마다 손에 쥐어진 붕대가 있을 뿐이다. 붕대가 얼마나 촘촘한지, 길이는 어느 정도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되는 대로 붕대를 감고 상처가 아물기를 기다린다. 삶을 지나며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을 수없이 배우고 터득하지만 나의 붕대로, 어쩌면 어떤 붕대로도 치유하지 못하는 상처도 있다는 것, 우리는 붕대보다도 그 사실에 대한 인식이 절실히 필요한 순간을 자주 마주친다.

 

누구나 수많은 필연의 중첩 속에 살고 그로 인해 필연적으로 어떤 존재가 된다. 그러나 어떤 필연은 누군가를 아래로 끌어내림으로써 시간의 흐름에 올라타기에 그에 대한 저항 역시 발생한다. 그러한 움직임 중 하나가 페미니즘이다. 페미니즘은 여성이 마주하는 필연이 사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지고 강요된 것일 수도 있다는 사실의 폭로이다. 당연하게 여겨지던 것에 숨어있는 정치성을 드러내는 페미니즘은 그에 대한 반동으로서 당연하게 여겨지지 않던 것을 도리어 기본값(default)으로 설정하며 선택의 범주를 넓히는 방식을 택하기도 한다. 자칫 또 다른 배제를 낳을 수 있는 이러한 방식을 택하는 이유는, 이 정도의 단호한 처치가 아니라면 기존의 기본값은 권력에 힘입어 고착되기만 할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하지만 엄마는 네가 약한 여자를, 너만큼 당당하지 못한 여자를, 겁이 많고 감정이 풍부해서 자주 우는 여자를, 귀엽고 사랑스러운 여자를, 결점이 많고 가끔씩 잘못된 선택을 하는 여자를, 그저 그런 평범한 여자를, 그런 이유들로 인해 미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68p)
 

 

그러나 수많은 여자가 기존의 기본값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거기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이유로 미움받고 배제된다. 누군가 책을 소개하면서 발췌한 이 문장이 가슴에 강하게 박힌 이유다. 완벽하지 않아서, 남성 권력을 전복할 만큼 강하고 굳세지 않아서 또다시 두 번째가 되고, 진정성을 의심받고, 여권 신장을 후진시키는 가부장제의 부역자로 불리게 되는 여성에도 작금의 페미니즘이 충분한 관심을 가지는지에 대해 자문해야 할 시점이다. 여성혐오에 대한 ‘완벽한’ 반동의 기본값은 존재하지 않는다. 설사 존재하더라도, 어떤 여성의 삶이든 그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미움받아서는 안 되며 미워할 권리 역시 누구에게도 없다.

 

 

20201004051704_zbahuedk.jpg

 

 

윤이형 저 「붕대 감기」는 화자가 계속 이어지는 흥미로운 플롯을 취한다. 얼핏 보면 각각의 개별적인 옴니버스 서사 같지만, 전편에서 주변인으로 등장한 인물이 다음 이야기의 화자가 되면서 연속되는 이야기의 바통을 넘겨받는 식이다. 즉 여기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은 최소 한 번은 자신의 언어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남성 화자는 등장하지 않는다. 진짜와 가짜로 여성을 옭아매는 이분법과 이에 관한 여성들의 갈등을 논하기 이전에 전제되어야 할 것은 여성 발화자들의 자유로운 공론장이며, 이는 남성 권력이 개입하지 않는 선에서 비로소 출발하기 때문이다.

 

길고 긴 이어달리기 같은 이야기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진경과 세연은 오랜 친구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둘의 사이엔 벽이 느껴진다. 꾸미는 것을 좋아하고 통제적인 집안 분위기에서 자유로워지길 원했던 진경은, 여성 이슈를 가끔 언급할 때를 제외하면 시종 절제적인 분위기가 감돌고 건조하여 ‘미스트를 칙칙 뿌려주고 싶은’ 세연의 SNS에 더 이상 댓글을 남기지 못한다. 진경은 세연을 보며 페미니스트를 자칭하는 이들이 자신과 같은 기혼 여성에게 하는 어떤 말들을 떠올린다. 자신을 ‘남자 없이는 못 사는’ 사람으로 보는 시선을 읽는다.


 
이 모든 과정이 진경에게는 이국에서 건너온 이상한 전통 춤을 추는 것 같기도 했다. 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등을 바라봅니다. 등을 보이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등을 바라봅니다. 절대 돌아서서 마주보지 않습니다. 진경은 이 춤이 정말 싫었다. 하지만 진경이 알기로, 친구라는 듣기 좋은 이름을 한 이 춤을 가끔씩, 조금씩이라도 추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69p)
 

 

마냥 진경의 오해만은 아니다. 실제로 진경을 보며 무의식적으로 그러한 생각을 품었던 세연은 그러나 알고 있다. 아이와 남편이 있고 분홍색과 장식품이 수놓아진 진경의 SNS에 댓글을 달기 주저하게 만드는 그 생각이 사실은 자신의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 막 시작된 이 흐름을 따라잡아 거기 동참하지 못하면 자신은 또다시 왕따가 되리라는(139p)’ 공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세연은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상에 부합하지 않아 외로워해야 했던 과거처럼 또다시 혼자가 될까 봐 두렵다. 그때 그 상처를 어루만져주었던 친구 진경에게조차 자신의 등만을 보이며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아무도 잘못하지 않은 것 같은데 모두가 죄책감을 느낀다. 최근 페미니즘 동향을 거치며 수많은 여성이 경험하고 있는 상황이다. 불법촬영 피해자인 친구를 도와주지 못했던 지현, 동료 교수가 제자를 성추행한 사건에 제한적인 목소리만을 낼 수밖에 없는 경혜, 머리를 짧게 자른 자신을 보고 기대하는 학생에게 자신의 롤 모델은 성공한 여성 기업인이나 정치인이 아닌 록스타 커트 코베인이라는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세연, 모두가 어떤 여성이지 못해서 자신을 숨기고 탓한다. 성범죄 피해 복구를 적극적으로 돕고, 목소리를 내고, 성차별적 현실을 극복하여 사회 고위층으로 올라선 여성뿐 아니라 그렇지 않은, 그러지 못하는 여성에게도 사회는 관용적이지 않다는 사실에 관심을 갖는 이들은 많지 않다.

 

남성 권력의 여성 공간에의 침입에 대한 공포와 여성을 보호하지 않는 사회를 향한 불신은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여성에게 보편화된 정서다. 삶을 위협하는 여성혐오는 허상이 아닌 실제이고 공포와 불신은 생존 감각이 되었다. 안전을 위해 ‘진정한 여성’만을 공간에 들이려는 움직임은 그러나 배제와 분리의 기제를 거쳐 여성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더욱 무관용적인 태도를 취하는 양태로 엇나가기도 했다. 여전히 연대자이며 친구로서 관계 맺으면서도, 눈을 마주치지 않고 서로의 등만을 마주 보는 춤을 추는 일이 잦아진다.

 

우리는 어떻게 눈을 마주칠 수 있을까. 고등학생이었던 세연이 진경의 머리에 붕대를 감았던 날, 실수로 붕대를 잘못 감아 세연을 따돌리던 학생들이 세연을 비웃었던 날, 진경이 자신의 머리가 큰 탓이라며 세연의 편을 들어줬던 날, 진경은 정확한 규격과 치수에 맞춰 붕대를 감지 못하더라도 서툴게 최선을 다하는 세연의 친구가 되기로 했다. 너무나 다른 필연을 살아가던 둘이지만, 우연적인 만남에서의 작은 마찰을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두꺼운 벽을 사이에 두고도 서로의 대답을 간절히 원하는 관계로 발전시킨 것은 다름 아닌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 하나였다. 친구라면 필연적으로 춰야 하는 춤이 끝나면, 벽을 허물진 못하더라도 자유롭게 넘나들며 눈을 마주칠 수 있으리라는 믿음과 바람이었다.

 

 

20201004051841_omwlwfvw.jpg

윤이형 작가

 

 

미용실 직원 지현은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여자를 아름다움과 곧바로 이어버리는’ 해미의 직선이 고맙다. 중태에 빠진 아이의 어머니인 은정은 그토록 꺼렸던 어린이집 엄마들과의 대화가 간절하고, 아이를 찾는 어린이집 친구의 한 마디가 도통 짓기 힘들었던 웃음이 환히 터져 나올 정도로 반갑다.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연상하기는 어려운 이러한 행위들은 그러나 여성을 여성이라는 이유로 억압하는 움직임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동이다. 사회의 작동을 위해 부품이 되기를 요구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삶에 대해 말할 수 있고 대화할 수 있도록 지지하고 힘을 보태는 아주 작은 움직임 말이다. 자신과 타인의 삶에 작용하는 불가항력을 받아들이면서도 이로 인한 서로의 상처를 치료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서투른 붕대 감기로, 우린 비로소 눈을 마주칠 수 있다.

 

문학의 역할은 ‘더 잘 느끼게 하는 것’이라는 어떤 작가의 말을 좋아한다. 여성 자신이 직접 이야기하는 삶의 궤적을 연쇄적으로 이어 서술하는 이 소설은 어딘가에 분명 살아 숨 쉬고 있을 여성의 존재를 떠올리게 하고, 느끼게 한다. 그가 누구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확실한 건 내가 모르는 어떤 여성이 분명히 존재하며, 누구나 그런 것처럼 그 역시 ‘그럴 수밖에 없는’ 수많은 상황과 맥락 속에 얽혀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다는 것이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그래야만 하는’ 존재는 없고,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지점은 ‘그래도 되어야 하는’ 현실이라는 것이다. 그런 현실을 이룩하기 위해 붕대가 얼마나 필요할지는 모르겠다. 다만 어떤 목표를 위해서 어떤 이들은 필연적으로 가까워져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연대라고 부른다. 완벽하지 않더라도, 실수를 연발하더라도 우리는 손에 쥐어진 붕대로 감을 상처를 예민하게 찾고 그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어쩌면 그것이 상처를 치유 받을 자격을 논하기보다 중요하고 필요한 일일지도 모른다.

 

 

 

20201004051944_gpqswswi.jpg

 

 



[조현정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이름
비밀번호
자동등록방지
06863
 
 
 
 

등록번호 : 경기, 아52475   |   E-Mail : artinsight@naver.com
발행인/기사배열책임자 : 박형주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박형주
Copyright ⓒ 2013-2020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트(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