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미술과 페미니즘 [시각예술]

여성 누드화의 재평가, 미술교육의 중요성
글 입력 2020.09.19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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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이 되어서야 처음 인식하게 되었다. ‘여성의 몸’과 ‘남성의 몸’을 보는 시선의 차이를. 그런데 여성학 과목보다, 미술사 과목을 통해 알게 된 차별의 역사가 훨씬 와닿았다. (물론 인문학이기에 둘은 엮이며 발전했으나, 수업에서 나의 공감도를 말한다.)

 

사람들이 가진 시대적 인식이 자연스럽게 뿌리내린 영역이 미술이기 때문일까? 더불어 이미지는 변화를 한눈에 파악하기 쉽고, 어떤 부분에선 강력히 직관적이기에, 교육과정에 미술사를 통한 인권교육을 적극적으로 포함시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신기하게도 미술의 역사에서 ‘현대성’을 획득하는 과정은 ‘전통적인 여성 누드화’로부터 멀어지는 과정과 맞물린다. 중요한 것은 ‘여성’인데, 19세기까지 유명한 누드화는 모두 여성 누드화이다. 그 목적은 누드화 대다수가 남성의 지시에 따라 남성이 즐길 목적으로 제작됐기 때문이다.

 

영상기술이 없던 시절, ‘지배층을 위한 포르노’ 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여체의 성적 매력을 강조한 작품들이 제작된 것이 19세기 이전 서구미술의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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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수산나와 장로들' (1610)

 

 

남성 누드화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남성의 누드는 여성과 다른 방식으로 재현된다. 프랑스 조각가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1880)’을 보면 남성의 몸은 여성처럼 성적 대상화한 몸이 아니라 ‘생각하는 몸’으로재현된다. 혹은 자크 루이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1793)’ 에서는 남성의 누드는 숭고함 내지 영웅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장치가 된다. 여성을 수동적이고, ‘몸’ 그 자체로 소비하는 것과는 대비된다.

 

현대로 오면서 점차 여성의 인권이 신장하며 미술계에서도 많은 변화가 일었다. 명화로 인정받는 여성 누드화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어떤 목적으로 그려진 것인가'. 최근 영국에서는 누드 작품을 향한 사회적 시선의 변화, 이런 외설성 논란 때문에 일부 전시회에 운영에 영향을 받기도 했는데, 예를 들어 영국 왕립 미술원은 남성의 성폭력을 고발하는 ‘미투(me too) 운동 때문에 작년 르네상스 전시회에서 남녀 누드 작품의 수를 비슷하게 맞췄다고 한다.

 

어떤 과정을 통해 이런 서구의 여성 누드화 전통에 문제가 제기되고 받아들여졌는지, 또 이것이 어떻게 미술의 현대성과 연결되는지 간략히 소개해보려고 한다.

 

 

 

고상한 누드의 전통을 타락시킨 외설, 마네의 <올랭피아>, 18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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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랭피아는 처음 공개되었을 때 대단히 적대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첫째로 마네가 그린 것이 신화 속 비너스가 아니라 매춘부였기 때문이다. ‘올랭피아’는 알렉상드 뒤마의 소설 <춘희>(1848)에 나오는 한 매춘부의 이름이다.

 

둘째로 올랭피아의 시선 때문이다. 정면을 향해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있다. 이전의 누드화는 (대부분 남성인) 관람자의 위치를 드러내지 않았거나 드러내더라도 위협하지 않았던 반면, 올랭피아의 시선은 정반대였다. 그림 앞에 설 누군가를 똑바로 응시함으로써 관람자의 시선을 되받아치며, 이로써 관람자의 위치를 부각시킨다.

 

셋째로 형식적 측면에서 누드화의 관례를 위반했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의 대명사인 비너스의 신체를 묘사하는 형식으로는 명암법을 섬세히 구사해 부드럽고 풍만한 입체감을 만드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마네의 그림은 중간 색조들을 거의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여성의 신체를 평면적으로 만들어 버렸다.

 

 

 

마네의 올랭피아를 전도시킨, 폴 고갱의 <저승사자가 지켜본다>, 18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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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로 인해 그림과 그림과의 관계가 그림의 의미작용에 중요해졌다. 고갱은 <올랭피아>를 사진으로 찍어간직했을 뿐만 아니라 직접 캔버스에 모사하기까지 했고, 이후 전도의 방법으로 <올랭피아>를 이용했다. 백인 매춘부는 흑인 원시인 소녀로, 하녀는 저승사자로 대체되었다.

 

고갱은 타히티에서 그의 어린 현지 처 테하마나를 모델로 삼아 그렸는데, 테하마나의 비스듬하고 불분명한 시선은 그다지 도전적이지 않으며 엉덩이를 드러내고 양손을 베개에 바짝 붙인 채 침대에 엎드린 자세를 하고 있다.

 

이는 <올랭피아>가 주장했던 여성의 성적인 주도권을 남성 관람자에게 돌려놓았으나, 동시에 저승사자라는 종교적 요소로 인해 남성의 성적 지배는 저지되거나 회피되고 있다.

 

이 작품은 성적 지배에 대한 남성의 욕망과 여성 신체에 대한 남성의 공포를 동시에 드러내는 양가적 누드라고 할 수 있다.

 


 

서양 누드화의 전복, 파블로 피카소 <아비뇽의 처녀들>,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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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 역시 마네와 고갱을 모두 참조하여 매춘부와 원시인을 한 형상에 용해시킨다. 우선 <아비뇽의 처녀들>에서는 누워있지 않은 누드가 다섯이다.

 

이 다섯 누드는 여성 신체의 모든 측면을 다 보여준다. 가운데 둘의 신체는 정면, 가장자리 둘의 신체는 좌우 측면, 나머지 앉아 있는 신체는 후면을 보이고 있다. 얼굴에는 아프리카 가면 뿐만 아니라 고대 이베리아 조각의 두상도 참조되어 있다.

 

동시에 관람자와 명백히 대치하는 이 그림은 서양 누드화의 전통의 종합이자 전복이 된다. 이 누드화는 남성 관람자에게 성적 욕망의 대상인 여성 신체의 모든 면을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지만, 장면의 통일성과 양식적 통일성이 제거되어 누드들은 각각 고립되고 차이가 강조되면서 관람자와 맞설 뿐만 아니라 나아가 관람자를 위협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누드화 전통에 내재한 관람자의 정체와 위치를 숨김없이 드러낸다. 남성이고, 이성애자이며, 관음의 위치를 통해 성적 지배를 욕망하는 관람자. 이로써 피카소는 마네가 시작한 르네상스 누드화 전통에 대한 전복을 어떤 은폐도 남기지 않고 수행했다고 할 수 있다. (조주연, 현대미술강의 참고)

 

 

 

미술의 교육적 효과와 방향성


 

마네에서 피카소에 이르기까지 50년의 시간 동안 여성 누드화가 변화한 지점을 살펴봤다. 이 세 작품은 누드화의 흐름에서가 아니라, 미술사 전체에서 큰 변혁을 일으킨 작품들로 꼽힌다. 작가들이 유명세를 치르고 주목을 끈 소재가 ‘여성 누드’라는 점에서 얼마나 전통적으로 여성의 몸이 성적 대상화 되어왔는지 유추해 볼수 있다. 한편으로 관점을 뒤튼 그 주체 역시 ‘남성 작가’라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19세기만 하더라도 여성은 미술제도 안으로 들어오기조차 어려운 시대였으니 말이다.

 

미학적 현대성이란 전통과의 대립, ‘기존의 사회와 불화하고 적대하는 부정의 정신’으로 간략히 설명되는데 이는 자연스럽게 기존의 지배집단의 시선을 분해하고 소외된 타자들을 주목, 포함시키는 방향으로 향한다. 마네가 <올랭피아>에서 던진 물음은 포스트 모더니즘에 이르기까지 후배 작가들이 차용하는 방식이 되었다. 성별뿐 아니라 인종, 제3세계, 젠더 등으로 확대되며 인권감수성을 일깨우는 것이 예술의 중요한 역할이 되었다.

 

안타깝게도, 고착된 기존의 생각을 그대로 주입시키지 않고 새로이 생각할 지점을 만드는 것이 교육의 의무라고 생각되는데, 여전히 학교 미술교육과정을 보면 최근에서야 형식적으로 페미니즘을 넣었을 뿐 기존의 그림에 대한 해설은 별 차이가 없다.

 

오래전에 쓰인 미술사를 기반으로 하는 미술교육이 아니라, 현시대의 문제의식과 감수성을 적극적으로 반영하여 개편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러기 위해 제도를 변화시킬 수 있는, 미술 제도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더욱 끊임없이 미술과 사회를 주시하며, 문제를 포착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올바른 가치관은 올바른 교육으로부터 싹트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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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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