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인간의 미지근한 온도야말로 우리를 죽이기도, 살게도 한다. [문학]

『금각사』와 자기인식의 연속성
글 입력 2020.09.15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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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에 탄 금각사.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 『금각사』는 1950년에 일어난 금각사 방화 사건을 모티프로 한 이야기다. 1963년을 기점으로 정치적으로 극단적인 성향을 보이기 전인 1956년에 연재하던 소설을 책으로 출간했다.

 

그는 실제 사건의 범인이었던 하야시 쇼켄을 미조구치라는 인물에 대입시키며 동시에 작가 자신의 관념을 심어낸다. 미시마 유키오는 미조구치를 통해 자기고백을 하고, 동시에 그를 미와 추, 인식과 행위라는 경계에 세운다.

 

 


인식과 행위_경계의 존재


 

미조구치는 어릴 적에 같은 동네에 살던 우이코의 죽음을 목격하고 강렬한 인상을 받는다. 또한 같은 시기에 그의 머릿속에는 금각에 대한 찬미가 자리 잡고 있다. 이후 미조구치는 금각사에서 도제 생활을 하게 되고 자신이 추구하는 미 가운데서 가지지 못한 아름다움에 대해 지속적으로 고민한다.

 

 
나 자신도 모르는 곳에 이미 미라는 것이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에 불만과 초조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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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화 사건이 있기 전 금각사의 모습.

 

 

이와 함께 미조구치는 쓰루카와와 가시와기를 만나게 되는데, 둘은 각각 인식의 명암을 대변하는 존재들이고 미조구치의 인식과 행위에 영향을 미친다.

 

미조구치가 가진 인식의 교착을 대변하는 존재가 우이코라고 한다면, 쓰루카와와 가시와기라는 두 명암이 채근하는 일방(一方)에의 결정을 타파하고 가장 근원적인 범행 동기가 된 것은 우이코에 대한 마음일 것이다. 그가 파괴적으로 극복하고 싶어 했던 미에 관한 인식 투쟁의 기반이 바로 금각과 우이코이기 때문이다.

 

 

모든 의미를 거절하고 그 미가 그토록 빛난 적은 없었다. (…) 지금 내가 듣고 있는 것은 완전한 정지, 완전한 무음이었다. 그곳에서 흘러가는 것, 변하는 것이 전혀 없었다. 금각은 음악의 엄청난 중지처럼, 울려펴지는 침묵처럼 그곳에 존재하며 우뚝 서있었다. ‘금각과 나와의 관계는 끊겼구나’하고 나는 생각했다. (…) 미가 저쪽에 있고 내가 이쪽에 있는 사태. 이 세상이 계속되는 한 변함없을 사태...

 

 

 

살 수밖에 없다


 

미조구치처럼 결코 어떤 사건을 겪음으로 인해 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은, 정확히 말해 어떤 사건이 불러일으킨 모종의 정념을 느끼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은 우리가 소위 ‘좋은 서사’라고 부르는 것의 조건 중 하나다. 그 과정에서 인식의 발로에서 출발하는 행위와 행위 아래 눌리는 인식, 그 둘의 내부에서 요동치는 미. 미조구치는 이것들을 견디다 결국 금각을 불태우는 행위에 도달하게 된다. 금각에 불을 지른 후 산으로 내달려온 미조구치는 한 마디를 내뱉는다. “살아야지.” 그렇다. 살 수밖에 없다.

 

하지만 미조구치가 마지막에 내뱉은 ‘살아야지’는 그의 미에 대한 극복 여부에 오히려 의문부호를 붙인다. 그가 인식의 세계에서 행위자로 돋움 한 것은 사실이지만 기억 속 환상처럼 명멸하는 우이코를 수년 동안 의식 속에 안고 있던 것처럼 자신이 불태운 금각 역시 그가 사는 시간 동안 의식 속에서 버젓이 되살아날 것이다. 그리고 해소나 통찰의 상징처럼 여겨진 방화의 이후, 그에 따르는 적요하고 끝이 보이지 않는 자기인식을 견뎌야 할 것이다. 마치 휴가철이 끝난 해수욕장의 허무처럼.

 

나는 불타는 금각의 열도보다 죽기 전까지 식지 않는 인간의 미지근한 온도야말로 우리를 죽이기도, 살게도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미조구치는 소설의 마지막 장 밖의 삶에서도 여전히 고통스러울 테다. 인간은 살 수밖에 없는 존재지만 단순히 살기만 하는 존재는 아니기 때문이다.

 

 
정신이 이처럼 소박한 실재감을 지니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것을 육체로부터 배워야 하는가를 생각했다. 하여간에 나의 삶에는 쓰루카와의 삶과 같은 확고한 상징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 나는 허무와도 연대감을 지니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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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용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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