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영원한 관계 대신, 영원한 감정 – 도서 '오후의 이자벨'

사랑은 영원하다. 사람은 그렇지 않다.
글 입력 2020.09.10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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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의 이자벨_표지 앞면.jpg

 

 

 

1. 자기변명적 언어로서 ‘타이밍’


 

 
“…지금까지 쓴 내용을 다시 읽어 보니, 이런 생각이 들어. 인생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늘 타이밍이 중요하다는 생각. 사람들은 운명적인 만남과 진정한 사랑을 이야기하지. 나는 당신에게서 진정으로 사랑을 느꼈어. 열렬한 사랑이었지만 유감스럽게도 타이밍이 나빴지. … 당신과 함께하는 생을 꿈꾸었는데 이제는 레베카가 내 미래야. 그래, 언제나 타이밍이 문제야.” (p218)

 

 

로맨스 소설과 영화에서 단골 대사처럼 등장하는 대사가 하나 있다. 본 작품에서도 나온다. “사랑은 타이밍이다.” 서로를 향한 열렬한 감정만으로는 관계의 성사가 보증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각자가 처한 종합적인 환경에 따라 관계의 성공이 좌우된다는 격언. 실제로도 이 격언이 통용되는 상황을 꽤 자주 목격할 수 있다. 일례로 친한 지인이 연애에 실패하고 낙담한 채로 우리 앞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둘 다 타이밍이 안 맞았어. 나는 일이 너무 바빠서 관계에 소홀했어. 상대방도 집안 사정이 급해서 어쩔 수 없었어. 마음은 서로 있었는데.” 때로는 스스로 그런 말을 내뱉곤 한다. 내 경우엔 이랬다. 타이밍이 문제였지. 나한테 마음의 여유와 정신적 안정감이 충분하지 않았고, 그 애도 내 심리 상태를 잘 받아줄 처지가 아니었어. 그래도 좋아서 만났는데 씁쓸하네.

 

사랑이 타이밍의 문제라는 결론을 내뱉는 과정은 제각기 상이할지라도, 결론이 갖는 공통점은 뚜렷하다. 자기변명의 성격이 강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애정 관계의 실패 원인을 자연스럽게 타이밍의 문제로 돌리면서 자신이 관계에서 못다한 책임들을 손쉽게 덜어내곤 한다. 사실은 책임의 경중이 자신의 무관심과 실수, 잘못에 기울어져 있음에도 타이밍을 거론함으로써 어차피 순탄하게 풀리지 않을 관계였다며 매듭을 짓는 셈이다.

 

이자벨과 불안한 사랑을 이어나가는 동안, 안정적인 관계에 고파 레베카와의 만남을 시작했던 새뮤얼도 마찬가지였다. 이자벨은 샘과 만남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그와의 관계가 독점적인 형태로 나아갈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그런데도 샘은 만남을 이어나가면서 꾸준히 독점형 관계를 원했고, 그럴 수 없는 이자벨의 환경에 절망하며 레베카에게로 도망친 것이다.

 

레베카와 결혼까지 진행할 정도로 그녀와의 관계는 안정적, 상호 독점적이었기에 결과적으로 샘은 이자벨과 이어왔던 애정 관계를 명시적으로 끊어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도망치고자 결심했던 쪽은 본인이었는데도 샘은 끝까지 고고한 태도를 표면적으로 유지했다. 그 자신이 말하듯 권력자라도 된 양 말이다. 이렇듯 새뮤얼뿐 아니라, 독자인 우리들 역시도 자신의 결정을 정당화시키려는 이유를 들어 사랑을 죽이는 말을 할 때, 다시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을 스스로 지워버리는 비열한 말을 할 때, 마치 자신이 대단한 권력의 소유자라도 된 듯 우월감을 느낀다. (p219) 그래서 타이밍을 거론하는 것은 상대가 알든 모르든, 관계의 책임을 회피하고자 선수를 치는 것과 다름없다. 관계를 좌지우지할 권력이 자신에게 있음을 상대에게 과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사건이 소설에서든 현실에서든 발생하면, 책임을 먼저 저버리고 관계를 끊어낸 쪽에서 후회를 한다. 이별에 대한 모든 책임이 아무런 해결책을 내놓지 않은 상대에게 있기에 그런 끔찍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자신을 설득해 봐도 주어진 결과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자신이 져야 한다. (p219) 특히 상대방이 이별에 대한 아픔을 잊고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기 시작하는 것처럼 보일 때, 후회감은 극도로 커진다. 자신이 아닌 타인과 관계를 이어나가는 상대를 보며, 현재 상대의 옆에 있는 타인과 마찬가지로 자신과도 보냈을 즐거운 시간들을 회고하는 것이다.

 

 

 

2. 변명이 낳는 가정들, 그리고 합리화


 

떠나간 후에야 소중함을 알았다는 상투적인 문구로 이 상황을 간단하게 설명하리란 어려워 보인다. 관계는 이미 끊어지고 난 뒷일 것이므로, 그런 깨달음을 얻었다 한들 끊어내기 이전으로 관계를 회복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미 완전히 부서진 관계라면 말이다. 수많은 새뮤얼이 이런 상황에서 쉽게 하는 행동은 ‘가정을 하는 것’이다. 만약 그때 상황이 그런 식으로 전개되지 않았더라면, 나에게 조금만 더 여유가 있었더라면. 상대방과 대화를 더 나눠봤더라면 지금처럼 관계가 마무리되지 않았을 수도 있나, 관계의 유지가 가능했을까.

   

 

“…이미 나는 어떻게 행동하는 게 최선인지 결정한 상태였다. 이자벨과 함께했던 오후는 지나간 일로 묻어두기로 했다. 우리는 늘 옳은 선택을 했다고 자신을 다독거리지만 그저 불확실한 미래와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불안감을 달래기 위해 비교적 안정적인 길을 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도 그랬다.

 

가끔 상상했다. 눈에 갇힌 그 날 오후에 이자벨이 나에게 전화했더라면, 혹은 알링턴 역까지 걸어 파크스트리트 역에서 환승하고 하버드스퀘어 역에 내려 내 방까지 왔다면 어떤 결과로 이어졌을까?” (p251)

  

 

무슨 소용일까. 레베카와 결혼하기로 이미 마음을 먹은 상태에서, 새뮤얼은 사랑이 타이밍에 좌우된다는 변명을 내뱉고 합리화의 단계에 진입하기 시작한다. 그는 오히려 이자벨에게 독점적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는 선언을 들은 후, 레베카와 일생을 함께하겠다고 다짐한다. 그렇게 거절을 당한 다음에야 레베카와 쌓았던 추억들이 얼마나 ‘안정적이었음을’ 깨닫는다. 결론을 내린 것이다. 안정성이라는 기준에 부합하지 않았던 이자벨을 삶에서 저버리기로.

 

결과적으로 현재 시점에서 그가 내린 결말은, 새뮤얼이 가정하는 상황처럼 현실적으로 일어나기 어려운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 한 영구히 바꿀 수 없다. 그러므로 매듭을 짓기로 결론을 도출한 상태에서 또 다른 상황을 가정하는 행동은 그리 생산적인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다. 소용이 없다. 따라서 새뮤얼이 가정하는 만약의 상황들은 변명에서 기인한, 변명의 연속들로 전락한다. 이어진 변명은 곧 강력한 합리화를 낳는다. 이자벨이 남편을 버리고 자신을 선택하는 비현실적인 상황은 실제로 연출되기 어렵기에, 어차피 이자벨과의 관계는 언젠가 끝날 운명이었다는 합리화로 이어진다.

 

물론 이자벨도 처지가 달랐을 뿐, 결론의 성격은 새뮤얼의 것과 똑같았을 거다. 새뮤얼이 만약 로스쿨을 졸업한 이후 자신이 종사할 직군과 가지게 될 직장을 생각하며, 이자벨과 살아갈 방안을 구체적으로 마련해 그녀에게 늘어놨더라면. 그녀는 남편과의 관계를 끝내고 새뮤얼과 살림을 꾸렸을지 모른다. 하지만 열정에 눈이 멀어 현실을 생각하지 못했던, 이십 대의 샘에게 그런 이성적인 대처를 바라기는 어려웠다. 실현하기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이자벨이 새뮤얼과의 사랑을 제한적인 시간대에, 제한적인 장소에서 나누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을지 모른다. 어차피 영구적으로 함께 있을 수 없는 사이라면, 순간의 열정에 집중함으로써 애정의 불씨를 미약하게나마 유지하려고 했을는지도 모르겠다. 결과적으로는 그녀의 룰도 관계에서 자신이 직면했던 책임감을 덜어내기 위한 합리화 기제에 불과했다. 그녀 역시도 새뮤얼이 아닌 가정을 선택한 것이니까.

 

 

 

3. 영원한 관계에 대한 환상을 깨고


 

도피처인 동시에 옳은 길로 여겼던 레베카도 결혼생활을 이어나가면서 불안정한 정신 상태를 보이자, 새뮤얼은 이자벨과 다른 여인들에게서 애정을 갈구하기 시작한다. 설상가상으로, 아이가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뇌수막염에 걸리자 그가 원했던 안정적인 가정은 파국을 맞이한다. 새뮤얼로서는, 관계의 지속성을 갈망하며 레베카를 선택했었기에 최악의 상황이었다. 아들 이던이 청력장애에 시달리게 되고, 레베카의 강박증세와 우울증이 심각해지자 새뮤얼은 마침내 그녀와의 결혼생황을 청산하기로 마음먹는다.

 

확실히 해야 할 점은, 그를 힘들게 했던 건 레베카와의 사랑이 끝났다는 사실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가 이혼 과정에서 절망감을 느꼈던 이유는 아이의 양육권을 온전히 자신 쪽으로 가져오지 못했다는 점, 그리고 자신의 아이가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가게 됐다는 사실이었다. 사랑은 사랑대로 하고 있었다. 이혼 절차를 밟기 직전, 밟는 과정에서 새뮤얼은 외도를 저질렀다. 월스트리트 저널에 다니는 기자의 소개로 만난 희곡 작가 피비와 사랑을 나눴다. 동시에, 개인 프랑스어 교습도 받으며 이자벨에 대한 그리움도 여전히 키워나간다. 사랑은 사랑대로 여전히 진행되고 있었다. 새뮤얼이 초반부부터 원했던 지속성, 안정성만 없었을 뿐 그는 애정 관계를 꾸준히 이어 왔다.

 

이처럼 그가 새로운 여인들을 계속해서 만났다는 서술, 이자벨을 향한 사랑을 간직하고 있었다는 서술은 성애적 관계에 영원이 담보되리란 어렵다는 것을 보여준다. 작가는 영원한 관계가 단지 새뮤얼이 아이처럼 좇았던 환상에 불과했음을 독자에게 들려준다. 그런 관계를 원하는 새뮤얼 스스로도 순간의 욕망과 찰나의 성애적 욕구에 충실한 사람임을 알려주고 있다. 이자벨 역시 그랬다. 친구 이상 연인 이하의 관계성을 유지하며 이혼으로 힘들어하는 새뮤얼을 위로해주다가도, 자신의 딸 에밀리가 충동적으로 강변에 몸을 던져 불구가 될 위기에 처하자 그와의 관계를 또다시 단칼에 끊어버린다. 처음부터 서로가 완전히 섞일 수 없는 사이였음을 상기시키면서 새뮤얼을 밀어낸다. 몇십 년이 지난 와중에도 그녀의 태도는 여전했다. 자신의 규칙을 완고히 지키려는 이자벨의 태도를 통해, 작가는 영원히 깨어지지 않는 관계가 가능하리라는 사람들의 바람이 헛된 것이라고 폭로한다. 이들의 관계는 애초부터 순간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었음을 암시하면서.

   

 
“나는 언젠가 이렇게 끝날 거라고 생각해왔다. 완성된 관계가 아니므로 완벽하게 정당해질 수 없다고 생각해왔다.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나는 과연 무엇이 옳고, 무엇이 완성된 것인지 답을 알 수 없었다.” (p404)
 

 

그런 로맨틱한 관계가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새뮤얼은 여전히, 독자들은 여전히 아가페적 사랑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운명의 상대를 만나 온전한 사랑을 나누는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자벨의 건강이 악화돼 사망한 이후에도 새뮤얼은 새로운 사랑을 찾는다. 그런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으리라고 이상을 품은 상태로 타인을 만난다. 이성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작가 역시 이런 굴레에 대한 설명을 작품에서 주지 않는다. 우리가 작품을 읽으며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욕망이 지긋지긋할 정도로 솔직하고 인간은 여기에 얽매일 수밖에 없다는 앎 정도다.

 

 

 

4. 돌아오는 대답에 확신이 없을지라도


 

 

나는 당신이라는 사람을 완전히 알 수 없을 거야. 당신도 나라는 사람을 완전히 알 수는 없겠지. 인생의 가장 큰 미스터리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야. 인생의 가장 큰 미스터리는 자기 자신이야.

 

로리가 지금 내 옆에 있었다.

우리가 함께 미래를 꿈꿀 수 있을까? 

서로를 행복하게 만들어줄 방법을 찾을 수 있을까?

한편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어둠 속에 혼자 있지 않다는 사실을.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전부가 아닌가?” (p439)

 

  

힘이 빠져 있다가도 당분이 들어가면 피가 돌아가는 게 인간의 육체다. 여기서 당분이란 단 음식과 음료만을 포함하지 않는다. 사람과 맺는 애정 관계도 당분의 일종으로 포섭된다. 단 음식이 한 가지에 국한되지 않는 것처럼, 사랑도 평생을 거쳐 한 사람과만 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누군가에겐 잔인하고 씁쓸한 소리겠지만, 사랑을 나누는 주체가 달라진다고 해서 사랑이라는 감정의 존재 자체가 사라지지는 않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또 다른 누군가와 사랑에 빠진다. 그러면서도 매번 새로운 상대와 똑같은 영원을 꿈꾼다. 이번 관계는 저번과 다를 수 있으리라 믿으며, 우리는 또 한 번 타인에게 기대를 건다. 어떤 때는 타르트를, 또 어떤 때는 케이크나 마카롱으로 당분을 섭취하듯이 그러하다.

 

소설의 초반부까지만 읽었을 때는, 철없는 이십 대 남자와 가정에 염증이 난 삼십 대 여자의 그저 그런 로맨스 이야기인 줄 알았다. 하지만 페이지를 넘길수록 더글라스 케네디가 소설에서 다루고자 했던 내용이 당분으로서 사랑의 본질에 대한 것임을 깨달으며 이것 참, 생각 이상으로 사람 복잡하게 만드는 작품이라고 느꼈다. 어리석은 행동을 반복했던 내 지난날과 현재를 톺아보기도 했다. 지나간 사람에게, 지금의 사람에게 나는 매번 똑같은 관계성을 속으로 요구한다. 때때로 불안정해지곤 하는 나를 언제나 잘 잡아줄 것. 문구만큼 실제 요구는 그리 거창하지 않다. 지금의 감정을 놓지 말고 옆에 계속 안정적인 상태로 있어 주기를 원할 뿐이다.

 

제각각의 이유로 내 바람은 현실로 구현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이런 종류의 애정을 원하고 있다. 비록 돌아오는 대답에 백 퍼센트라는 확신이 쥐어지지 않더라도, 미래의 어느 순간을 기약하는 발언들을 눈치챌 때마다 안정감을 느낀다. 사람의 심리가 이렇다.

 

*

 

새뮤얼은 로리와 계속 만남을 이어나갔을까. 이어나갔다면 그가 생의 마지막을 맞이할 때까지 그랬을까.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더 크리라 짐작해 본다. 하지만 그의 소망은 여전했을 것이다. 상대가 누구든 간에, 그 순간만큼은 운명적인 사랑을 함께 노래하는 것.

 

 

 

실무진 명함.jpg

 

 



[이소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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