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고요한 인생 [도서]

이제는 더 이상 행복을 꿈꾸려 하지 않겠다. 행복이란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믿지 않겠다.
글 입력 2020.09.09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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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단편소설이자 책의 이름을 대표하는 <고요한 인생>의 첫 페이지를 펼치면 어쩐지 서글픈 시 하나가 나를 반긴다.

 

 
아이들은 자신이 어른이라는 걸 알고 있을까. 네가 되기 전의 너는 무엇이었을까. 지금의 너를 '오랜 시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 너는 어째서 네가 돌아간 곳에서 다시 아이로 돌아왔는가.
 

 

페터 한트케의 '아이의 노래'라는 시에서 발아한 것이다. <고요한 인생>을 읽기 전에는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파악되지 않았지만, 소설을 읽고 나면 어렴풋이나마 이해가 된다. 그러다 곧 소설의 내용을 찬찬히 되짚어 보게 되고, 되짚어 본 자리에는 씁쓸함이 발자국 남듯 덩그러니 남겨지게 된다.

 

신중선 작가의 책 《고요한 인생》은 남겨진 발자국을 따라 걷게 되는 그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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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라는 공간


 

가족이 모두 등장하는 소설이라 그럴까. 책 안을 채우는 단편소설에는 '집'이라는 공간이 계속 나온다. 그러나 여기서 '집'은 몸을 지켜주고 온기를 주는 따뜻한 집이 아니다. 떠나고 싶어 하는, 떠나는 중인 그런 집들이다.

 

<고요한 인생>에서 수은은 원하지 않은 때에 나오게 된 아이이다. 아버지가 막 도박에 빠졌을 때라서. 눈보라가 휘몰아칠 때라서. 이미 작년에 아이를 낳았기에 애초에 연년생으로 들어선 수은을 그녀의 어머니는 낳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수은은 예정된 날보다 열흘을 앞서 태어났고, 고스란히 집안에서 발생하는 안 좋은 일의 모든 원인들을 가져가게 되었다. 다른 남매들과 한 군데도 닮지 않은 수은은 그들을 가족이라 여기지 않았고, 구두 닦는 아버지를 친부라 여기지 않았고, 벽면에 부딪힌 자신보다 찢어진 옥당목을 더 걱정한 어머니 또한 친모가 아니라 생각하게 된다.

 

수은은 그렇게 점차 곰팡내 나는 집구석을, 자신의 신경을 건드리는 연년생 언니를, 친부모가 아니라 생각하는 그들을 떠나려 마음먹는다. 그들을 떠나서 아무도 자신을 건드리지 않는 곳으로, 아쿠아리움 같은 고요한 적막이 있는 곳으로 찾아 발걸음을 옮긴다. 수은에게 '집'이란 자신에게 고요함을 주는, 그것이 깨지면 언제든지 거처를 옮길 수 있는 그런 곳이었다.

 

<아들>에서는 아들과 아버지가 목적지 없이 하염없이 길을 걷다가 마을을 발견한다. 입구에 공중전화박스가 있는 마을이다. 그 마을에서 아들과 아버지는 잠시 머문다. 그러다 아들에게 말 한마디 없이 아버지가 떠나게 되고, 아들은 아버지가 혹여나 돌아올까 봐 판자와 거적때기만으로 지붕과 벽을 해단 집안에서 20년 동안 기다린다. 아버지를 그리워하여 매일 같이 아버지 몫의 밥을 짓는 아들에게 집이란 참 쓸쓸한 공간이며, 아버지만 돌아온다면 금방이라도 같이 떠날 곳이지 않았을까 싶다.

 

<언니와의 봄>의 첫 페이지에선 "난희언니는 해마다 봄이 오면 이사계획을 세웠습니다."라는 문장만 봐도 난희언니가 현재 머물고 있는 집을 떠나 다른 집으로 이사 가고 싶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리고 <아이 러브 유>에 등장하는 화자는 새벽만 되면 "어서 집을 빠져나가라고" 스스로에게 재촉한다. 이렇듯 책 안에 들어있는 소설들을 살펴보면 하나같이 현재 머물고 있는 집에 대한 애정을 찾아보기 힘들다. 마치 집이라는 공간이 꼭 인물들이 처해있는 현재 상황을 대변해 주는 것 같다.

 

다른 집으로 가고 싶었으나 끝내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난희언니의 상황을, 대낮에도 집에만 있으며 혹시 내일도 누군가를 만날 일이 있는가를 가늠하며 잠드는 <낮술>의 '그'의 상황을, 도망치라고 되뇌면서 결국엔 다시 원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던 <아이 러브 유>의 그녀의 상황을 말이다.

 

 

 

늘 아프다



 

그가 혼자생각에 킥킥대는 데도 송 상무나 김 피디 둘 중 누구 하나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각자의 상념에 잠겨있느라 타인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는 것 같다. 조금쯤 우울한 분위기가 세 사람을 감싼다.

 

- p.125

 

 

소설을 읽으면 늘 아프다. 직설적인 문장에서도, 온갖 비유가 덮인 문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 이유는 평소엔 다른 사람의 우울을 엿볼 틈도 없이 각자의 상념에 잠겨있지만, 소설을 읽을 때는 그것을 직면해야 하기 때문인 거 같다.

 

<낮술>에 등장한 위의 세 인물처럼 말이다. 시골보쌈집이라는 가게 이름에 혼자 킥킥대는 '그', 그리고 각자의 상념에 잠겨있기에 '그'가 웃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 송 상무나 김 피디처럼. 우리는 평소에 한 공간 안에 있음에도 서로 다른 생각을 하는 그들처럼 살고 있다. 그러나 소설을 읽을 때면 한정적인 인물에 시점이 맞춰져 책을 덮지 않는 이상 인물을 쭉 따라가야 한다. 그렇기에 소설을 읽으면 눈앞에 비치는 상황에 가슴이 아프다.

 

《고요한 인생》을 읽으면서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답지 않게 성숙한 인물들의 모습이 안쓰럽기도 했으며. 도망가고 싶지만 갈 곳이 없어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게 되는 모습에 공감하기도 했고. 그렇게라도 아내 옆에서 아이들 옆에서 살고 싶다, 살아내고 싶다고 하는 장면에서 절로 미간이 찌푸려지기도 했다.

 

희망이 없는데도 희망을 꿈꾸지 않는 인물들의 모습이 꼭 이상에서 현실로 날 끌어내리는 것 같았다. 애초에 올라가지도 않았는데, 이상하게 높은 곳에서 떨어진 느낌이다. 그리고 넘어져 아픈 곳이 괜찮아지기도 전에, 애초에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강요하던 사람이 없음에도 무언가에 얽매여 있는 사실을 깨달아 허탈해진다.

 

작가 신중선의 《고요한 인생》이란 그런 책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행복을 꿈꾸려 하지 않겠다. 행복이란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믿지 않겠다. 어째서 남들처럼 살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까. 감히 행복을 차지하려 들다니. 특별하길 원했던 게 아니다. 더도 덜도 말고 이웃처럼 살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것마저 넘친 바람이었다면 하는 수 없다. 포기할 수밖에. 지금이라도 훌훌 털어 내버리면 그뿐이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강요하는 사람은 없다. 단지 어쩐지 억울해서 결단을 유보하고 있을 뿐이다.

 

- p.135

 

 

 

고요한 인생

- 먼지 같은 관계 속에 소멸되는 시간과 공간 -
 

지은이 : 신중선

출판사 : 내일의문학

분야
한국소설

규격
134*200

쪽 수 : 204쪽

발행일
2020년 07월 27일

정가 : 15,000원

ISBN
978-89-98204-76-1 (03810)

 

 

[김승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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