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당신] 88년 가객의 일기, 김현식

1988년 김현식의 일기
글 입력 2020.09.06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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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김현식씨가 日刊스포츠에 연재한 자서전과 스포츠조선에 실린 '김현식 스타일기'를 참고해 제작한 가상의 일기입니다. 1988년 2월, 김현식씨는 재기 콘서트를 시작으로 4집 <김현식 VOL.4>를 발매, 이후 골든디스크를 수상했습니다. 88년은 김현식씨가 솔로로 가장 왕성한 음악활동을 펼친 시기이기도 하며, 동시에 건강 악화로 이후의 음악과 커리어에 변화를 맞이한 시기이기도 합니다. 위 자료들의 문장을 가져와 살을 붙여 당시 김현식씨의 가상 일기를 작성했습니다.

 

 

 

1. 88년 2월, 콘서트로 돌아오다.



나는 가수라고 직업을 가진 평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보잘것없이 시작한 가수 생활이지만, 점점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인생을 음악으로 채우는 큰 행운을 얻었다. 단지 음악이 좋아서 무작정 거리로 나가 노래 부르고 밤무대를 전전하며 생계를 이어가던 시절이 있었다. 그 세월을 해쳐나가  좋아하는 선후배들과 사랑을 노래하는 삶이 된 것은 큰 축복이다.


작년 11월, 나는 지금은 생각하기도 싫은 일을 맞았다. 나를 비롯해서 들국화의 전인권, 허성욱 등이 마약 상용 혐의로 구속된 것이다. 동부이촌동 집에서 밥을 먹다 갑자기 구속되었고, 향정신성 의약품 관리법, 대마 관리법 등이 적용되어 몇 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나는 감옥생활보다 나의 가수 생활과 팬들의 마음이 더 무겁게 느껴졌다. 나를 아껴주던 팬들을 실망시키진 않았을까, 무명이 아니게 된 지금 잘못된 길로 들어선 게 아닐까 생각했다.


구속기간 동안 나는 내 삶과 나의 음악에 관해서 생각했다. 모든 세월이 짧은 시간 동안 스쳐 지나갔다. 기타를 처음 잡을 때부터 인기를 얻은 가수가 되기까지 세월은 그 시간만큼의 고통과 기쁨과 함께 참 많이도 흘러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나간다면 맑은 노래를 부르는 건강한 가수가 되고 싶었다. 지난날의 방황을 접고 음악에 온전히 집중하고 싶었다.


다시 나와보니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오히려 3집 <비처럼 음악처럼>의 판매량이 더 늘어났다는 소식이었다. 팬들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이 동시에 느껴졌다. 다시 무대 위에 설 수 있을까? 팬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야 할까? 많은 고민들과 걱정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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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년 2월 나는 재기의 콘서트를 63 빌딩에서 열었다. 나를 사랑하는 팬들을 실망시킨데 대한 사죄의 뜻으로 나는 삭발을 했었다. 나를 아껴주던 팬들이 다시 무대에 선 나를 비웃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마저 가지고 나는 무대에 올라 천천히 나와 노래 <비처럼 음악처럼>을 불렀다. 공연장에는 6천여 명의 관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고, 노래가 끝났을 때 나도 모르게 눈에 고인 눈물 너머로 관중들이 환호하는 것이 보였다.


그들의 함성이 나의 귀에는 아득하게 들렸다. 팬들은 나를 용서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나의 노래로서 그들에게 용서받은 것이었다. 가수 생활 중 수 십 번의 콘서트를 했지만, 그날만큼 기억나는 콘서트는 없었다. 나는 나를 용서한 팬들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노래 불렀고 그들은 박수로서 다시 나의 가는 길을 열어주었던 것이다. 아마 이 날의 콘서트는 영영 잊지 못할 것이다.

 

 


2. <김현식 VOL.4>, 골든 디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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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항상 혼자이고 싶은 갈증이 있었다. 그동안 나의 음악 활동에 아쉬움은 없지만, '김현식'이라는 이름은 항상 다른 어딘가의 소속으로 설명되곤 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활동은 지금의 나를 만들고, 3집 <비처럼 음악처럼>은 '봄 여름 가을 겨울'과 함께했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 노래를 만들고 앨범을 채우고 싶은 생각으로 가득했다. 그룹사운드 전문 보컬리스트 김현식이 아닌, 싱어송라이터 김현식으로 말이다.


게다가 공백기 이후로 처음 내놓는 앨범이기에 더욱 소중한 기회였다. 나는 더 성숙하고 맑은 음악을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곡을 찾아다니는 데 더 집중했다. 몇 곡은 신촌블루스로 자주 공연 다니던 선배 이정선에게 받았다. 작년에 세상을 떠난 아끼는 후배 유재하를 추모하기 위해 '그대 내 품에'도 수록했다. 또한, 송홍섭의 소개로 작곡가 윤상의 '여름밤의 꿈'을 처음 받기도 했다.


88년 말 나는 제4집 앨범을 냈다. 타이틀곡은 <언제나 그대 내 곁에>와 <사랑할 수 없어> 두곡으로 했다. 또한 하모니카 연주곡으로 <한국사람>도 수록해 욕심을 냈다. 독집으로만 4번째의 앨범을 냈으니 나도 어느새 중견의 가수가 되어 간다는 느낌이었고, 중견이라면 이제 남은 삶을 좀 더 엄숙하게 대해야 한다는 생각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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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말 나는 10년이 넘는 가수 생활에서 처음으로 큰상을 받았다. 日刊스포츠가 시상하는 골든디스크 상을 수상한 것이다. 언더 그라운드로 자주 방송을 안 타서 그런지 이런 상은 처음이었고, 더구나 한동안의 공백 뒤에 다시 재기의 무대를 갖고 활동한 직후에 수상한 것이라 정말 감격적이었다. 또한, 디스크 판매량이 가장 큰 기준이 되는 이 상을 받게 해 준 팬들에게도 무척 고마웠다. 88년은 지금 생각하면 연초의 재기 공연에서부터 연말의 골든디스크 수상까지 나에게는 여러 면에서 운이 좋은 해였다.

 

 

 

3. 술과 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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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게 완벽해 보였지만, 하나 후회되는 점이 있다면 바로 술을 끊지 못했던 것이다. 적어도 87년 가을까지는 큰 변화가 없었다. 황달이 낀 눈 외엔 외형적으로 괜찮았다. '돌개바람'이나 '봄 여름 가을 겨울' 활동을 하던 87년까지의 사진을 보면 얼굴도 붓지 않았고, 배도 전혀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영어(囹圄)의 몸이 됐다 풀려나온 후로 몸이 망가지기 시작했다. 항정신성 의약품을 끊고 나서 금단증세가 오는 듯했고, 증상을 술로 해결하려 했다. 마치 담배를 끊으면 생전 단것을 안 먹던 사람이 사탕이나 초콜릿을 물고 다닌다든지 뭘 많이 먹어 체중이 급격히 증가하는 경우가 있듯이, 나는 술에 의지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건강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나는 예전부터 술을 보통 남자 이상으로 마시기는 했지만, 몸이 상할 만큼 폭주하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마약을 끊고 나서 생기는 어떤 금단 현상을 이겨내기 위해서 나는 친지들에게 술이라도 마셔야 된다면서 밥처럼 술을 마셔댔다.


아침에 눈을 뜨면 술 한 잔을 마신 뒤 하루를 시작할 정도였다. 나는 술이 생각나면 배가 고팠다. 약물 복용의 후유증인지 술 중독 증세였는지 나는 때로 무대에 서기가 두려웠고, 남들이 나를 보는 게 무서웠다. 일종의 무대공포였는지 오히려 나는 술을 더욱 찾았다.


이미 88년 초 의사가 경고했다. 앞으로 술을 계속 먹으면 죽는다고. 줄곧 병원을 들락거렸던 나에게 의사는 손대고 고칠 병이 아니라 술만 끊으면 된다고 당부했지만, 그 사실을 알면서도 나는 술을 끊지 못했다. 나의 어머니와 아내는 집 부근의 동부이촌동 가게를 찾아다니며 김현식이 오면 술을 팔지 말아 달라, 술을 계속 마시면 그는 곧 죽는다고 호소했다. 나의 주벽을 익히 알고 있는 동네의 가게 사람은 '김현식에게는 술 안 팔기'를 결의해 내가 아무리 애원하고 소리쳐도 술은 팔지 않았다. 그럴 때면 나는 집으로 온 음악 친구들에게 나 대신 술 좀 사달라며 부탁했다.


술을 멀리하려 노력했지만, 결국 나중에는 병원신세를 자주 졌다. 건강이 꽤 나빠졌는지 나의 몸은 고무풍선처럼 변화가 심했었다. 정상체중은 63kg였지만, 한창 부을 때는 80kg까지 올라간 적도 있다. 병상에서 술을 멀리하면 정상으로 돌아갔지만,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술을 가까이하면 비정상으로 부었다. 종종 지방 공연을 위해 움직일 때는 차 뒤칸에 드러누워 힘들게 다녔고, 공연 대기실에선 동료들이 나를 주물러주기도 했다.


나는 병실에서 시간을 많이 보냈지만, 대부분의 곡을 병원에서 만들었다고 할 만큼 음악을 포기하지 않았다. 어쩌면 나라는 사람의 존재 이유는 노래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나는 가수이기 때문에 언제나 노래해야 했다. 그곳이 무대 위가 아닌 병원 침대 위일지라도 말이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듯이 앞으로도 나는 가수일 것이다. 가수는 가장 확실한 나의 미래다. 지금까지 내가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유형의 가수였다면 앞으로 또한 나는 내가 원하는 나의 유형을 만들어가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거기서 언제나 나의 전제는 사랑이 될 것이다.


나 역시 세월이 흐르면서 흩어질 것이다. 다만, 삶이 이어지는 동안은 계속 음악을 이어갈 것이다. 내가 잠깐 세상에 들렀다 가는 손님처럼 떠날지라도 나의 음악만큼은 거기에 있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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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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