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바이러스 시대의 의료계 집단파업, 그리고 민주주의

“너희 집에서 친구들이랑 놀기로 했는데, 너도 올래?”식의 논리는 안 된다
글 입력 2020.09.02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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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3일, 대한의사협회 회원들이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무분별한 의대정원 증원을 반대'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 유의사항


 

사회 문제를 다루는 대부분 칼럼이 그렇듯, 이 글 역시 기본적으로 편향적이다. 그런데도 굳이 유의사항이라는 표지까지 붙여가며 글의 편향성을 상기시키는 이유는, 이번 칼럼의 방향성이 보편적인 표현에 의하면 “닫혀 있어서”다. 그간 플랫폼에 게재됐던 사회/정치 일반 관련 오피니언 및 칼럼의 경향성은 (적어도 내가 일독했던 글들에서는) “깨어 있는, 열려 있는” 편에 가까웠다. 그런 논의를 지향하는 사람에게 이 글의 논조는 다소 불편할지 모른다.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엘리트주의와 소수 전문성을 옹호하고, 공공화의 가치를 간과하는 기득권적인 인간상으로 비칠 수도 있겠다. 감수해야 할 일이다. 글의 진짜 의도는 그렇지 않대도 말이다.

 

 

 

0. 들어가기 전에: 사소한, “비논리적인” 조각글


 

지난 8월 31일, 한겨레는 의료계 집단파업이 엘리트주의와 피해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 기사에서 밝혔다. 제목부터 자극적이다. “의사만 ‘전문가’라는 우월의식...대안 안내고 강경투쟁만.” 기사를 쓴 기자나, 언론사가 직접적으로 견해를 밝힌 건 아니다. 그렇지만 저널리즘에서, 논조의 중립성 고수가 ‘비현실적인’ 사명감으로 치부되기 시작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결국, 기사의 주된 방향성은 기사를 쓴 기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고. 보다 포괄적으로는, 기사를 싣는 신문의 편향된 논조에 좌우된다. 따라서 “한겨레가 밝혔다”라고 말해도 별다른 문제는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열악한 노동환경에 놓인 전공의들의 불만 표출이, 어떻게 의사만이 의료의 주체여야 한다는 우월의식과 논리적인 연결고리를 형성하는지 의문이다. 기사의 주장처럼 피해의식에서 비롯된 문제일 순 있다. 건강보험 수가 등의 의료정책으로 전공의 측이 임금 면에서 손해를 보는 상황일 때, 의사의 분노에는 개원의보다 돈을 벌지 못한다는 피해의식이 물론 표출될 수 있다. 하지만 직장을 가진 사람이라면, 노동자라면 누군들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겠나. 직종을 막론하고, 자본주의 경쟁 사회에서 내 옆 사람이 나보다 더 많은 이익을 취하는 것 같다면 무의식적인 박탈감과 시기심을 느끼는 게 정상이다. 자연스러운 욕망을 어떻게 엘리트주의적인 사고에서 기인한 비정상적인 특권의식과 결부시킬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이번 파업은 의사‘만’ 전문가라는 우월의식이 아니라, 의사‘가’ 전문가이기에 나오는 항변이다. 부당하고 열악한 근무 환경은 논외의 문제다. 국회가 입법을 시도하고, 정부가 천명하는 정책의 실효성을 의심하는 타당한 문제 제기다. 공공의대 설립과 의대 입학 인원 증원. 정부는 긍정적인 면모만을 부각한다. 공공의료 확장을 통한 의료 접근성 강화, 의료 인력난 해결.

 

의료계 종사자들은 서비스의 ‘질’을 말한다. 바이탈 등 기피과를 포함해, 이미 국내 의료계의 세부 전공 중 상당수는 물자 공급 부족과 낮은 수가에 허덕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공급만 늘어날 경우, 의료의 질은 낮아질 수밖에 없다. 이뿐만이 아니다. 공공의대를 전국 곳곳에 설립한 후에, 입학생들을 교육할 인력과 실습 환경 등은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의료기술 습득, 의학 커리큘럼의 복잡성 등을 생각해봤을 때 이는 단지 세금과 공공 예산만으로 충당 가능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정부와 여당은 정책안의 현실적인 한계를 짚어내지 못한다.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라면, 해당 분야의 직접적 종사자가 아니라면 집어내기 어려운 지점들이다. 이들의 항변은 어째서 이기주의라 단정적으로 규정되는가.

 

 

 

1. ‘공공성’의 그림자


 

수 주 전, 학교가 발칵 뒤집혔다. 논란의 화두는 의대 입학생 증원과 공공의대 설립안으로 지펴졌다. 정부는 먼저 2022년부터 10년간, 의과대학 입학정원을 총 4천 명 상향 조정하겠다는 초기 방안을 내놨다. 그 가운데 3천 명은 중증 및 필수의료 분야에서 의무 복무하는 기간이 정해진 ‘지역의사’로 선발된다. 남은 천 명 중 절반은 특수 전문분야에서 일하는 의사로, 또 다른 절반은 기초과학 및 제약, 바이오 연구분야 인력으로 충원된다.

 

또한, 정원 확대와 별개로 전북 지역 등에 공공의료 분야 전문 의사를 직접 양성할 공공의대를 설립하겠다고도 말했다. 공공의대 설립은 지난 6월 중순, 야당이 참석하지 않은 제21대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여당 복지위 위원들은 지방 지역의 공공의료 확충을 주된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의료 인력을 확대해, 지방을 중심으로 공적 의료의 제공 범위를 늘려야 한다는 취지다. 이를 위해 공공의료 분야를 집중적으로 전담할 공공의대를 각지에 설립하겠다는 골자다. 이에 일각에서는 공공의사를 ‘지역별로’ 뽑아야 한다는 의견이 힘을 얻고 있다. 지역별 도청, 시민단체 등 ‘공적’ 성격을 갖는 집단을 중심으로 그렇다. 정부 역시도 논의 과정에 해당 단체들을 직접적으로 관여시키는 등, 우호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오랜 실습과 강도 높은 수련, 고차원적인 지식 내재화로 완성되는 의료라는 전문 영역에 그 영역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단체들의 개입을 적극적으로 허용하겠다는 암시다.

 

여당의 입장이 언론보도를 통해 공론화되자, 파장은 엄청났다. 교내 에브리타임의 HOT 게시글은 공공의대 설립을 둘러싼 비판적인 의견 교환, 그리고 정책을 발의한 정부에 대한 비판으로 점철됐다. 의예과 학생을 포함해, 학생들 대부분은 정부의 정책안이 ‘성급한 발의’였다는 점에 동의했다. 의학계열 종사자들과 충분한 협의를 거치지 않고 도출됐다는 주장이다. 특히 의대생과 교수진 대부분은 분노의 목소리를 높였다. 인력 확대를 통한 의료의 공공성 강화, 접근성 강화라는 명목적 취지에 공감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정책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했고, 정책안 발의 과정의 일방성을 규탄했다. 정부는 개편안을 자의적으로 발의한 ‘이후’ 의료계에 대화를 요청했다.

 

근본적인 문제는 후자에 있었다. 공론화가 먼저였고, 합의는 후순위였다. 민주주의적인 합의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는 증거다. 정부는 일단 정책안을 낸 후에 의사들과 이야기를 나누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분명 여당의 주요 인사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취약한 공공지역을 중심으로 의료 인력이 추가적으로 파견돼야 하는 것은 맞다. 의료 인프라가 수도권에 집중돼 있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니 말이다. 그러나 정책의 제안 과정에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히기 시작할 때, 문제의 쟁점은 이처럼 ‘취지 따지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 취지가 앞세워진 상태에서, 쟁점은 무엇이 부가적으로 “끼워 넣어지는지”로 옮겨진다. 전공의와 교수진, 의대생, 그리고 정책안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은, 발의된 정책에 무엇이 끼워 넣어지는지에 주목했다. 그 결과 그들이 발견한 것은, 자신들과의 논의에 앞서 ‘당연하게 전제된’ 시민단체를 포함한 지자체 협의회와의 약속이었다.

 

의료계는 반대했다. 이미 국내 의료계의 세부 전공 분야 중 상당수는 저비용, 저부담 위주의 수가 시스템으로 재정난과 과도한 노동 강도에 시달리고 있다. 그중에서도 ‘기피과’로 분류된 예방의학과, 외상외과, 흉부외과 등 바이탈을 다루는 과들의 내부 사정은 더할 나위 없이 심각하다.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이국종 교수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이 과들은 매년 적자에 시달린다. 인력난은 말할 것도 없다. 몇 안 되는 전공의들은 자신의 일상을 열악한 현장에 ‘바쳐야’ 한다. 개인의 희생이 당연시되는 구조다.

 

이런 상황에서 의대 정원을 확대하고, 공공의대를 설립하는 등의 방법으로 무리하게 인력 공급을 진행할 경우 수가 문제가 지금보다 심각해지기만 하리라는 의견이다. 즉, 그들의 의견에 따르면 막대한 예산이 투입되지 않는 한 의사의 절대적인 숫자만 많아지는 결과를 낳는다. 따라서 반대 측은 바이탈 전공의 한 명에게 돌아가는 물질적 보상은 지금보다 박해질 것이며, 수술을 집도할 환경적 조건들 역시 지금보다 열악해질 것이라 항변했다. 타당한 반박이다. 나라가 운용할 수 있는 예산은 한정돼 있기에, 어느 한 분야에 사용 액수를 급격하게 많이, 동시에 항구적으로 늘릴 수 없다. 또한, 그렇게 기피과를 지원할 의지와 예산이 충분했다면 이렇듯 개편안을 내놓기 전부터 진작 지원 방안을 구체적으로 논의해왔을 터다.

 

의사들의 항변은 집단파업과 휴진으로 이어졌다. 전국 각지의 전공의 교수들과 의대생들, 의대 교수진들은 집단행동에 동참했다. 본과 학생들은 국가고시에 단체로 응시하지 않고 단체 휴학을 도모하기도 했다. 의료계 (예비)종사자들의 집단 행위는 커다란 논란을 일으켰다. 여론은 대체로 반으로 갈라졌다. 한쪽에서는 코로나19로 뒤숭숭한 ‘이 시국에’ 하필 파업할 이유가 있냐는 비난이, 다른 한쪽에서는 ‘이 시국에’ 의료계 개편안을 발표할 일이냐는 비난이 일었다. 예견된 분열이었다. 정부의 행보는 합리적이지 않다. 양쪽에 통용되는 어구 하나를 빌려 말하자면, ‘이 시국에’ 바이러스로 어지러운 여론을 또 한 번 이렇게 분열시켜야만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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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인지하고 있는

대통령의 책무에 '편 가르기'는 없다.

내가 알고 있는 한 그렇다.

 

 

 

2. 의사들이 이기적이고 오만해서, ‘근본적으로’ 문제인가


 

국민권익위원회의 보도에 따르면, 설문 참여자들 가운데 과반이 공공의대 설립과 의대 정원 확대에 찬성한다고 답변했다. 의료계 인력난 해결과 의료 접근성 강화라는 정부의 외침이 어느 정도 설득력 있었던 셈이다. 언론보도를 통해 잇따른 휴진으로 진료에 어려움을 겪는 환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특히나 코로나19의 불씨가 여전한 와중에서, ‘굳이 지금’ 파업을 진행해야 하냐는 윤리적인 비난도 가해졌다. 의료계와 의대 내에 잔존하는 ‘집단이기주의적’ 문화도 재조명이 됐다. 파업에 참여하지 않는 의사나 국시를 취소하지 않는 학생을 내부에서 비방하고 그들에게 불이익을 준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또한, 사회적 지위와 고소득이 보장되는 의사 직업의 특성상 이들의 파업 행위 자체가 선민의식 발현의 일환이라는 지적도 잇따랐다. ‘감히’ 의사들의 영역에 발을 딛게 할 수 없다는 의지라는 것이다.

 

상황은 점차 의료진들에게 나쁜 방향으로 전개됐다. 의사들에게 부정적인 여론이 많아지고 있었다. 7월 중반에서 말 즈음에 이르러 그런 분위기가 심해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정부의 입장은 그에 반비례하듯 강경해졌다. 대화로 해결하자며 ‘부드러운’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집단행동 개시자들이 벌이는 작금의 파업은 의료 공백을 낳아 국민을 괴롭게 한다며 현장에 복귀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재수 없는’ 엘리트 의사 이미지를 이용한 계획적인 호도에 가까웠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런 기사들의 댓글에는, 정부의 성급한 결정을 비판하는 의견도 많았지만 반대로 의사들의 이기심을 원망하는 의견들도 많았다. 교내 에브리타임 HOT 게시물에서도 의료계가 집단행위의 표면적 이미지를 잘못 잡았다는 의견이 제기되곤 했다. (인문대, 사회과학대 학생회의 컨설팅을 받아야 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을 정도였다. 그쪽 양반들에게 ‘운동’은 상대적으로 예삿일이 아니라는 인식에서 비롯된 거다.)

 

그렇다면 정말로 의사들의 문제인가. 지방 지역이 중심이 되는 공공의료 강화는 도의적으로 개진되는 것이 마땅하며, 이 과정에서 의사라는 전문적 권위와 물질적 보상을 포기하지 못하는 의료계 종사자들이 ‘악’으로 몰리는 게 당연한 이치인가. 앞뒤 인과관계를 면밀하게 따지지 않고, 그들에게 그런 프레임을 일방적으로 씌우는 것이 정당하다고 볼 수 있는가.

 

공통적으로, 정부를 포함해 의사 파업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그들의 행위가 현 시국에서 이기적이라는 데에 의견을 같이했다. 전국민이 코로나19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만큼, 의료진들의 도움과 협력은 절실한 수준을 넘어 필수적인 것에 가깝다. 파업 반대자의 관점에서, 오만한 의사들은 자신들의 밥그릇만 걱정할 줄 알고 사회에 헌신할 줄 모른다. 그들의 엘리트주의적인 태도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현장에 복귀하라고 강경히 대응하는 정부는 옳다. 일부 반대자들은 파업을 개진하는 병원에 방문하지 말자는 보이콧 선언을 내놓기도 했다. 에브리타임과 같은 학내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도, 의료계의 파업 행위에 회의적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이 조금씩 늘어갔다. 그렇게 잘난 척을 하더니, 밥그릇을 뺏길 위기에 놓여 쌤통이라는 극단적인 반응도 있었다.

 

하지만 ‘본질적인’ 원인, 다시 말해 작금의 상황이 초래된 일차적인 원인은 앞서 말했듯 정부와 의료계 당사자들의 소통 부재에 있다. 최근의 분란은 정부와 여당, 둘에 우호적인 개인들이 이야기하는 바와 같이 의사들이 이기적이고 오만해서 생긴 문제가 아니다. 물론, 일각의 주장처럼 일부 의사들은 집단적 엘리트주의와 이기주의에 빠져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집단 내부를 둘러싼 이야기들은 개별적으로 검토해야 할 문제다. 다른 의제라는 뜻이다. 의사집단 내부의 분위기 문제와 의사 수 증진이라는 문제 사이에는 직접적인 연관과 인과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공공의대 설립 및 의대 증원이 논의됐던 일차적 계기 역시도, 이기적인 의사들을 짓누르기 위함이 아니라 인력 확보 및 의료 접근성 확대에 있었다. 그러니 이런 계기를 고려했을 때, 실효성이 검증되지 않은 정책을 일방적으로 개진한 정부에게 궁극적인 책임 소재가 크다. 그것도 하필 이 시국에 말이다. 정부는 파업에 참여한 의사를 감염 시국에 헌신하지 않는 이기주의자로 몰곤 했다.



 

3. ‘민주주의적’ 강요, 존중의 부재


 

 

“정부가 정책을 철회하는 것은 다른 모든 이해관계 집단과의 논의 결과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이해관계자에는 지방의 의사 부족을 호소하는 시민단체와 병원계, 공공의료 확충의 필요성을 부르짖는 학계, 전문가 등이 있습니다. … 정부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의사단체와 논의하여 개선방안을 찾아 나갈 예정입니다.”

 

(보건복지부가 제작한 의대 정원 증원 Q&A 카드뉴스 중 일부, 2020.08.26.)

 

 

민간인이 만든 카드뉴스가 아니다. 보건복지부가 실제로 제작해서 국민에게 배포했던 카드뉴스다. 지금은 내용이 일부 수정됐거나 사라진 것으로 안다. 저 대목까지 수정됐는지는 확인해보지 않았다. 중요한 사실은, 정부가 “다른 이해관계 집단들”과의 관계성을 언급했다는 것이다. 제일 직접적인 이해당사자인 의사 집단과의 사전 논의를 거치지 않고서. 여타 이해관계 집단과 이야기를 나눴다는 점 자체를 문제 삼으려는 것은 아니다. 우선시해야 할 대상을 잘못 설정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할 뿐이다. ‘의사’를 늘리고, ‘의사’를 양성하기 위한 기관을 별도로 만들고자 한다면, 어째서 ‘의사’들과 먼저 관련된 논의를 나눠보지 않았나. 흡사 이런 상황 같다. “너희 집에서 친구들이랑 놀기로 했는데, 너도 올래?”

 

정부는 민주주의를 말했다. 여타 집단, 즉 최대한 많은 사람의 이해관계를 결론 도출에 반영하겠다고 주장함으로써 말이다. 시민단체와 지방 지역의 협의회 등, 공공의대를 세우고 의사 인력을 증진시켜야 더 나은 삶을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소수의 의료진보다는 의료계에 종사하지 않는 다수 개인의 의견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논리. 정부는 의료계의 파업, 진료 거부를 “무책임한,” “집단 이기주의적인” 행동으로 재단했다. 저런 논리가 전제되지 않았다면 나올 수 없는 발언이다. 의료진들의 희생으로 실체화된 ‘K-방역’을 자랑스럽게 제창했을 때도 그랬다. 대통령을 비롯한 여권은 민주주의에 입각한 시민의식과 ‘그에 걸맞은’ 의료진의 노력으로 바이러스 방역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는 중이라 발언했다. 여기서도 다수 시민의 존재가 방역의 주체로 천명됐다. 의료진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바이러스 감염을 막기 위한 수단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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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난달, 황운화 의원 외 13명이 발의한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 일부개정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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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해당 개정안의 입법예고 현황.

 

 

그들이 말하는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단순히 시민이라는 정체성을 띤, 절대다수를 위한 정책을 펴는 것인가. 시민이라 일컬어진 집단의 목소리를 표면적으로 우선시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이때 회자되는 시민이란 누구인가. 의사들은 시민이 아닌가. 그들의 파업을, ‘시민의’ 생명을 경시하는 죄악으로 여길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정부의 주장은 민주주의에 기반을 둔 ‘협의’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탈을 쓴 ‘강요’에 가까웠다. 특정 집단을 위해 다른 집단을 민주주의라는 논리로 굴복시키려는 행위나 마찬가지였다. 의료계 논란을 둘러싼 정부의 논의 과정에서 의료계 종사자들에 대한 존중은 없었다.

 

얼마 전 여당 의원들은 의료 인력을 재난관리 ‘자원’으로 분류하자는 내용의 법안을 발의했다. 의료진들에 대한 존중이 부재한 상태이며, 의료계 개혁을 위한 법안을 처음 제안했을 때부터 이들을 시민 외적인 존재로 치부했다는 증거다. 의료진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일반 사회의 시민이 아닌 관리 자원으로 치부됐다. 그들의 분노는 당연하다. 선민의식의 발현이 아니다. 기본적인 인격성을 존중받지 못한 상태에서, 의료진은 불만을 표출할 권리가 있다.

 

그들 역시 사회의 일원으로서, 사회의 생산성 향상에 이바지하는 노동자다. 그런데도 왜 의사들은 여권과 여권 옹호자들이 지지하는 노동자 계층에 포함되지 못할까. 직종과 신분을 막론하고 모든 이들의 노동이 존중받아야 한다고 외치면서도, 의료계를 비롯한 여타 “전문직”의 노동은 거만한 엘리트주의의 산물로 쉽게 적폐화된다. '고소득 직종, 귀족 전문직'이라는 프레임이 의료계 종사자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씌워진다. 당신은 그만큼 많이 벌고, 사회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압도적으로 똑똑한 계층에 속하니 ‘일반’ 시민의 사정을 헤아릴 수 없을 거다. 이기적인 태도를 그만 버려라. 이처럼 ‘끌어내리기식’에 가까운 비판과 비난이 정당화되곤 한다.


 

 

4. 강요 뒤에 숨겨진 의혹


 

카드뉴스에서 시작된 논란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지난달 24일 보건복지부가 유포한 카드뉴스에는 전문가와 시민사회단체 관계자 등이 참여하는 “중립적 시·도 추천위원회”를 구성해, 입학생 선발 과정에서 공공성을 확보하겠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공공의대 관련 입법안이 ‘현대판 음서제’라 비판받은 주된 원인이다. 구체적인 의도야 어찌 되었건, 일단은 시민단체를 포함한 각종 협의회가 입학 후보자를 추천할 수 있다는 소리였다. 정부는 이로써 입학 과정의 공정성과 중립성을 확보할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민간단체의 개입을 중립성 확보의 ‘올바른’ 방법론으로 당연시하고 있다.

 

정부가 해명하는 것처럼, 부정입학을 우려하는 걱정은 기우일 수 있다. 시민단체의 자녀나 직간접적 이해당사자들이 뒷길을 경유해 입학할 것이리란 지적은 지나친 음모론 신봉에 가까울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가능성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것이라 확신할 수 없는 게 사실이다. 정부와 여당이 적폐라 규정하는 고위층, 기득권 자제들이 교육기관 입시를 치르며 부정입학을 시도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가진 권력 때문이었다. 경제력과 사회적 지위 등으로 만들어지는 힘이었다.

 

만약 카드뉴스에서 명시하고 있는 것처럼 각종 단체와 위원회가 선발 과정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면, 이런 힘 역시도 권력이 된다. 한 단체를 운영할 자본력, 경제력을 가진 협의체가 개인의 입학 당락을 좌우할 지위에 설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시민단체 역시 유사한 논란을 빚어낼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에서 자유롭긴 힘들다. 인간사에서 권력이 관여했던 영역 가운데, 비리와 부패가 발생하지 않았던 사례는 극히 드물었으니 말이다. 일단 문제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말 던지기는 쉽다. 부패를 저질렀던 이도, 대놓고 자신이 부패를 저지를 것이라 만민 앞에서 천명했겠는가. 사람들의 이목이 쏠릴 때는 일단 규범성과 윤리 의식을 앞세웠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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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한' 입법인가?

 

 

설사 그렇지 않더라고 확언할 수 있더라도, 도대체 어떤 근거로 시민단체와 여타 지자체 위원회, 협의회를 입학생 선발 과정에 관여시키는 것이 ‘공정’하다고 보는지는 별개의 논란거리다. 단지 양적으로 더 많은 사람의 목소리를 반영함으로써 민주주의 실현과 공익성 증진, 공정성 강화에 양의 곡선을 그릴 수 있는가. 관여의 권한을 수여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어떤 단체에, 어떤 정당한 이유로 전문 의료 ‘기술’ 교육 대상자를 추천할 자격을 줄 것인가.

 

보건복지부는 8월 25일, 보완설명을 담은 카드뉴스를 통해 추천위원회 설립과 관련된 논란에 나름대로 해명했다. “‘공정하고 투명한 선발’ 원칙을 철저히 이행하겠습니다.” / “통상적인 입시에서 반영하는 시험성적, 학점, 심층 면접 등의 절차는 공공의대도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논란이 불거진 핵심 부분에 대한 설명은 대체로 부실했다. 사람들이 제기하는 의혹에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정부는 소통과 합의를 통해 개선방안을 찾아가겠다고, 지난달 26일 자 카드뉴스에서 견해를 밝혔다. 정부 측이 주장하는 대화와 소통의 방향성이, 과연 의사단체와 정당한 비판을 제기하는 다수 개인의 의견까지 충분히 반영하고 있는지는 더 고민해봐야 할 문제다.

 

 

 

5. 진짜 소통을 시도해라


 

의료계 파업을 막고 싶다면, 정부는 ‘진짜 소통’을 시도해야 한다. ‘일단’ 파업을 중단해라, 대화로 해결하자-라는 태도만으로는 한참 부족하다. 여전히 시민단체는 집단휴진을 이어가는 전공의들을 처벌하고, 공공의료를 강화하라고 정부에 요구하고 있다. 아직도 정부 여당에 우호적인 민간단체와 협의회는 의사들을 기본적으로 ‘이기적인 엘리트’로 전제하며, 의사들이 제기하는 현실적인 어려움과 비판점에 ‘밥그릇 챙기기’라는 비난만 가하고 있다. 그들의 집단행동을 멈추고 싶다면, 그들을 ‘악’으로 치부하는 프레임부터 먼저 버려야 한다. 진심으로 의료계와 소통을 하고 싶다면 말이다.

 

갈 길이 멀어 보인다. 9월 2일 오늘 자 업데이트된 언론사 기사에 따르면, 정세균 총리가 전북 남원시에 공공의대를 설립하라고 국회의원에 압력을 넣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언론에 공개된 국회 회의록에 의하면, 국회 내에서는 이미 공공의대 설립 안건이 총리 측의 주도로 “전부터 (입법하기로) 결론이 났던 문제”라 인식됐던 모양새다. 녹취된 김승희 전 미래통합당 의원의 발언에 따르면, 정세균 총리는 수개월 전부터 남원 지역 공공의대 설립 안건을 강경히 밀어붙이고자 결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현 정부가 여당을 위시해 소통 없는 정책안을 통과시키고자 했음이 드러난다.

 

나는 의대생도, 의료계 종사자도 아니다. 어떤 단체에 귀속된 회원도 아니다. 사회에서 통용되는 표현을 빌리자면 나야말로 특정한 이해관계에 사로잡히지 않은 ‘일반 시민’에 가깝다. 그런데도 “국민을 위한” 공공의료 확대라는 정부의 문구에 쉽게 동의하지 못하겠다. 시민단체 등으로 ‘대표되는’ 국민의 의견에는 내 목소리가 없다. 정부가 주장하는 공정성과 중립성 추구에, 나와 같이 단체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의 의견은 어떻게 담보되는가. 지금 정부의 소통 방식은 양적 측면의 목소리도, 질적 측면의 목소리도 충분히 포용하지 못한다.

 

대의민주주의 사회에서 정부와 국회는 권리 주체로서의 국민을 대리하는 기관이다. 그런 만큼 신중해야 한다. 고심 없이 ‘반짝’ 무언가를 발의하는 행위는, 발의 과정에 얽힌 사람들과 국민에게 혼란만 유발할 뿐이다. 작금의 의료계 파업이 그 예시다. 무려 정부의 주도로, 의료계 전반의 논의 양상은 현재 “정의롭지 못한 의료진 대 공공성을 수호하는 정부와 각종 협의체”라는 ‘편 가르기’로 변질하고 있다. 기묘한 일이다. 유권자를 대리하는 주체가 유권자 위에서 논의를 호도하고, 여론을 어수선하게 만들고 있다.

 

공공성을 수호하는 사람들답게, 책임감을 느꼈으면 좋겠다. 공공의대를 그토록 설립하고 싶다면, 의대 정원을 그토록 늘리고 싶다면 ‘왜’ 그래야 하는지, 문자 그대로의 ‘전국민’에게 설득력 있는 근거를 내놓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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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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