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끝도 없이 파멸하는 Cherry가 주는 위로 - 체리

글 입력 2020.08.30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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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난 문학 재능과 신선한 창의력으로 수많은 젊은이의 가슴을 붉게 물들인 전쟁의 어두운 일면을 그리고 있다. 끝도 없고 의미도 없는 전쟁의 실체와 그로 인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마약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잔인한 일상과 진실한 사랑 이야기가 출간 전부터 언론의 호평을 받으며 단숨에 전 세계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

 

사람은 어떤 글을 읽을 때 필자의 의도보다 자신이 ‘꽂힌 부분’, 직감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포인트를 위주로 글을 읽고, 기억하며, 전달한다. 만약 내가 도서<체리>를 소개하는 출판사 소개글만 읽었다면 누군가에게 이 책을 이렇게 소개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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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전쟁에 참전했던 한 남자가

전쟁 휴유증으로 파멸하는 이야기

  

 

<체리>의 소개글을 읽으며 무의식 중에 '꽂혔던’ 단어는 ‘전쟁’이었다. 역사적인 사건을 배경으로 하는 서사를 접하면 알고리즘이 있는 것처럼 괜히 숙연해지고, 가슴이 웅장해지기 마련이다. 솔직히 어떤 애국심이나 인류애 때문은 아니다. 꽤 오래 전에 일어난 일들인데도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영감을 줄 만큼 생명력있다는 사실 자체 때문이다. 어떤 사회에서든 그 일을 단 1초도 겪지 않은 사람의 마음에도 파고들어 코끝을 찡하게 만드는 사건들이 있지 않은가.

 

한국인에게는 6.25 전쟁과 일제강점기, 중국인에게는 천안문사태, 유럽인에게는 제2차 세계대전과 나치즘이 대표적이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도서 <체리>의 주인공이 겪었던 ‘이라크 전쟁’도 미국 사회에서 걷히지 않는 먹구름같은 상흔이 아닌가. 그래서 나 역시 ‘이라크 전쟁’이라는 단어를 보자마자 이 책의 핵심은 전쟁이 틀림없다고 판단했던 거다.

 

하지만 <체리>를 모두 읽고 난 지금은 전쟁이 아닌 다른 어그러진 단어들만이 머릿속을 맴돈다. 그 단어들을 한데 모아 문장으로 만들면 이렇다.

 

 

허무함과 무력감에서

헤어나오는 법을 모르는 한 사람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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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리>의 주인공이 헤어나오지 못하는 건 크게 두 가지다. 여자, 그리고 마약.

 

 


에밀리를 사랑했던 남자.

하지만 에밀리보다 마약을 더 사랑했던 남자.


 

주인공은 군대 동료와 이런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두 가지 구린내를 위하여.

여자와 화약, 하나를 위해 살고 하나를 위해 죽지.

두 냄새 모두 사ㅡ랑한다.”


p. 254

 

<체리>의 주인공은 수많은 여자들에게 껄떡대고, 그들과 잠자리를 갖는다. 하지만 그래도 가장 사랑했다고 할 수 있는 여자는 둘만의 결혼식까지 올렸던 에밀리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결국 이혼할 것 같아.”

에밀리가 예언하듯 말했다.

나는 그래도 괜찮다고 했다.

”네가 원한다면 이혼해줄게.”


p. 136

 

처음엔 저 말이 로맨틱하다고 생각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하면 그 사람과 평생을 함께 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그 마음이 사랑을 넘어 헌신까지 발전했을 때는 자신의 욕망을 접어두고 그 사람이 원하는 대로 해주고 싶어진다. 태어난 김에 사는 듯한 주인공이 에밀리에게 긴 세월 지고지순한 태도를 보여주는 걸 보면서, 그녀에 대해서만큼은 진심이구나ㅡ라는 생각이 들었던 거다.

 

 

[크기변환]3.jpg


 

하지만 책을 읽다보니 주인공인 에밀리가 아닌, 자신과 함께 마약을 하며 환락에 빠져줄 수 있는 사람을 원했던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과 달리 학업과 일을 병행하며 애착있게 삶을 가꿔나가던 에밀리는 주인공때문에 마약에 눈을 떠버렸고, 주인공은 자신과 함께 약을 해주는 동반자가있다는 안정감에 취해버렸다. 주인공은 자신과 이혼하고 싶어하는 에밀리를 붙잡으면서도 헤로인을 잔뜩 머금은 상태였으니.

 

에밀리가 이혼하자고 했다.

우리는 이혼했고 나는 집으로 돌아갔다.

돈이 조금 있었고 약을 잔뜩 할 수 있다면

그래도 되는 일이었고, 

결국은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것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3월의 어느 날 밤 약에 취해서

에밀리에게 전화를걸었다.


p.259

 

그러니 주인공이 여자와 마약 중 어느 쪽에 더 몰두해 있었느냐고 하면 단연 마약에 가깝다. 사람들이 하루를 버티기 위해 카페인으로 몸을 깨우고 담배로 머릿속을 환기하는 것처럼, 주인공은 마약으로 자신의 하루하루를 일으켰다. 에밀리를 사랑한다고 해서 주인공의 삶 자체가 변하진 않았으나, 마약값 때문에 은행 강도질까지 시작했으니 주인공이 인생을 바쳐가면서 사랑했던 건 마약이었던거다.

 



다시, 전쟁


 

첫인상이 강렬하다지만, 소개글을 읽을 때 꽂혔던 '전쟁’이라는 단어와 그 자체가 주는 어떤 숙연함을 책을 읽는 동안 전혀 느끼지 못했다. 이라크 전쟁 참전 준비 과정부터 주둔 기간, 그리고 미국 본토로 돌아오는 과정을 모두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는 데도 그랬다. 전쟁 자체가 주인공의 인생에서 대단한 사건이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저 마약쟁이의 인생, 그 뿐인데 이라크 전쟁은 이 책에서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싶었다.

 

전쟁은 어디로 갔을까. 주인공에게 전쟁은 무엇이었을까.

 

책 속에서 주인공의 말투는 시종일관 무미건조하다. 누군가의 죽음을 이야기할 때도, 섹스가 주는 흥분감을 이야기할 때도 그렇다. 작가가 부러 감정을 철저히 제거하며 글을 썼다면, 답은 내용에 있을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마음에 걸렸던 문장들을 다시 건져올려 보았다.

 

마약을 제조할 때는

인생이 너무도 아름답기만 했다.

그 순간 만큼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약쟁이가 친구처럼 느껴졌고,

내가 잘못한 일이나 내 실수로 망친 것들

그리고 지금까지 낭비한 세월같은 건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p.426

 

주인공의 인생이 망가졌다고 생각하는 건 우리 뿐만이 아니었다. 주인공 자신도 그렇게 여겼다. 그리고 그 중심엔 전쟁이 있었다. 어떤 의욕이나 사명감없이 보낸 군생활, 손 쓸 수 있는 것 하나 없이 동료와 적들이 죽어나갔던 무력한 날들이 말이다.

 

돌아오는 길에 다리에서

조약돌 소녀에게 전투 식량을 주었다.

아이는 가슴에 식량을 꼭 쥐고 달려갔다.

그런데 맨발의 사내아이에게 붙잡히더니
머리를 흠씬 두들겨 맞고 급기야 식량까지 빼앗겨버렸다.
우리가 차를 몰고 떠날 때 조약돌 소녀는

흙바닥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P.165

 

이 책은 주인공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리고 주인공은 이라크에서 목격했던 한 소녀에 대해 읊조린다. 그는 작은 소녀의 주린 배를 채워줄 만한 전투 식량조차 보장되지 않는 비정한 전쟁의 단면을 기억하고 있다. 단순한 약쟁이라면 스쳐지나가는 소녀에 대한 기억을 복기할 이유도 없었을 거다. 이라크전에서 어처구니 없이 죽어나간 동료들부터, 먹을 것을 빼앗긴 작은 소녀를 생생하게 기억할 만큼 그는 어쩌면 마음이 약하고 순한 사람이었을 거다.

 

그런 그가 이라크 전 당시 느꼈던 좌절감과 공포를 생생하게 느끼는 순간, 전쟁의 기억이 자신의 삶을 잡아먹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전쟁의 기억과 자신의 삶을 더욱 기계적으로 전달했을 것이다. 그리고 전쟁이 자신의 일상에 파고들 틈을 주지 않기 위해 헤로인을 해댔을 것이다.

 

우리는 너무 두려운 나머지

남은 약을 더 맞기로 했다.

각자 80밀리그램 씩. 그제야 기분이 좀 나아졌다.

단돈 90달러에 기분이 바뀌었고,

그렇게 밤을 편히 보낼 수 있었다.

내일도 90달러 어치 약만있으면

우리는 밤새 편히 보낼 것이다.


p. 321

 

한 사람의 삶에서 전쟁이 그렇게 쉽게 사라질리 없다. 전쟁이 그렇게 쉽게 주인공을 놓아줬을리 없다. 그러니까, 이 책은 내게 다시 전쟁에 관한 이야기가 됐다. 책 소개에서 느꼈던 첫인상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전쟁으로 인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는 마치 맨틀처럼 밑바닥에 깔려 알게모르게 주인공의 삶과 이 책의 스토리를 이리저리 휘두르고 있었다.

 

*

 

책을 읽는 동안엔 다소 버거울지도 모른다. 마약과 섹스, 강도질이나 해대는 주인공의 삶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그걸 극복할만한 의지조차 주인공에겐 없다. 그러니 암울하고 답답할 수밖에.

 

하지만 그래서 나는 이 작품과 작가가 마음에 든다. 온갖 장애물을 극복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에 골인하는 멜로물을 보면 연애 한 번 제대로 못하는 스스로가 바보같아진다. 죽음의 고비를 넘기면서도 때부자가 되는 주인공을 보면, 인간관계 하나 때문에 끙끙 앓는 자신이 한심해보인다.

 

하지만 이 책의 주인공은 비현실적으로 초인적이거나 운이 좋지 않다. 끝도 없이 타락하며 파멸한다. 물론 희망찬 꽃밭을 심어주는 스토리도 좋지만, 때로는 이렇게 앞이 보이지 않을만큼 컴컴한 터널같은 스토리가 위로가 된다. 삶에는 무척 극복하기 힘든 일도 있다는 걸, 그래서 어쩌지 못하고 도망치다 끝내 주저앉아 우는 사람도 있다는 걸, 그럴 수 있다는 걸 말해주는 기분이 들어서다.

 

책 제목인 Cherry는 미국에서 처음 전쟁에 참전한 병사를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여자와 마약에 도취된 주인공은 전쟁도 인생도 처음인 어린 Cherry였다. 독자인 우리는 인생과 세상을 처음 겪는 Cherry이거나, Cherry였던 시절이 있다. 그래서 마약을 하지 않아도, 전쟁에 참전한 적 없어도 주인공을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책이 위로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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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니코 워커

 

1985년 클리블랜드 출생.

《체리》는 2018년 알프레드 A. 크노프에서 출간된

자전적 데뷔 소설이다.

 

 

목차

프롤로그|11

1부 인생이 시작되는 순간, 나는 당신을 보았다|27

2부 모험|73

3부 체리|139

4부 벌새|247

5부 위대한 약쟁이의 로맨스|303

6부 파멸|361

 

 

도서 정보

제목: 체리 (원제: CHERRY)

분류: 소설 / 외국소설 / 영미소설

지은이: 니코 워커(Nico Walker)

옮긴이: 정윤희

출판사: 도서출판 잔

발행일: 2020년 7월 27일

판형: 130×195(mm) / 페이퍼백

페이지: 432쪽

정가: 14,800원

ISBN: 979-11-90234-07-8 03840

 

 

[반채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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