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삶을 위한 장례식 [영화]

글 입력 2020.08.24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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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바닷물처럼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밀려온다. 그렇지만 죽음이 쓸려 내려간 자리에 남는 것은 제각각이다. 영화 ‘스틸 라이프’는 아무도 잡지 않는 흔적을 모아 정리하는 ‘존 메이’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그는 연고가 없이 죽은 이들의 유품을 정리하고, 아무도 오려 하지 않는 장례식을 치른다. 메이는 들을 사람이 없어도 망자를 위해 늘 추도문을 작성하고 장송곡을 고르며 그들이 최소한의 추모를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한다. 22년 동안 구청 공무원으로서 이 업무를 해온 메이의 삶은 자신이 마주하는 일상적 죽음만큼이나 고요하게 정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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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같은 일을 마친 뒤 같은 길을 지나 퇴근하는 메이의 일상이 요동치기 시작하는 것은 그가 같은 아파트에 살던 ‘빌리 스토크’의 죽음을 처리하게 되었을 때부터이다. 비효율적이고 돈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메이의 방식을 마음에 들지 않아 하던 상사는 메이를 해고하고, 스토크의 장례는 메이가 처리할 마지막 업무가 된다.

 

묘한 마음으로 여느 때처럼 망자의 유품을 정리하기 위해 스토크의 아파트에 들어간 메이는 곧 그의 호실이 자신이 사는 호실과 정확히 마주 보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일면식도 없었던 이웃의 장례를 위해 메이는 그의 옛 연인, 딸, 동료들을 찾아다니고 사비로 묘비와 관을 주문한다.

 

스토크의 장례를 마무리하는 것은 메이에게 무슨 의미였을까? 스토크의 아파트에서 찾은 사진을 바탕으로 그를 알 만할 사람들을 몇몇 찾았으나, 장례식에 오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딸이 있는 듯했지만, 사진에서는 아무런 정보도 찾을 수 없었고, 메이는 구청에 돌아와 새로 온 직원이 마치 음식물 쓰레기를 비우듯 아무렇지 않게 유골함을 비우는 모습을 바라본다.

 

결국 메이는 단념하듯 시체 보관소의 직원에게 ‘기다리지 말고 준비되는 대로 화장하라’고 말한다. 화장은 그의 방식이 아니었다. 사무실로 돌아와 스토크의 딸로 보이는 어린아이의 사진을 응시하던 메이는 막 퇴근하던 그의 상사에게 뛰어가 스토크 건을 마무리할 수 있게 해달라고 말한다. 늘 일정한 보폭으로 걷던 메이가 뛰는 것은 영화에서 이 장면이 유일하다.

 

물론 22년간의 업무를 유종의 미로 마무리하려는 마음 역시 물론 있었겠지만, 메이가 스토크의 장례에 올 만한 이들을 다시 열심히 찾기 시작하는 것은 이 장면 이후부터이다. 메이를 해고한 상사는 장례식이란 결국 ‘산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상사의 말은 망자의 죽음을 기리고자 하는 사람도 없는 듯하니 괜한 일 벌이지 말고 화장으로 빨리 처리하라는 의미였겠지만, 그의 말은 곧 죽음에 슬퍼할 사람이 하나라도 남아 있다면 제대로 된 장례가 치러져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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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메이는 죽은 이들을 위해 장례를 해왔다. 망자의 집을 찾아가 그가 남긴 흔적, 그가 아끼던 물건을 정리하고, 그의 가족을 찾고자 했던 모든 노력은 망자를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스토크의 죽음을 맡기 전까지 메이의 삶이란 죽음으로 기우는 궤도였다. 그의 일상이 꼭 죽은 것처럼 보이는 까닭은 그의 일이 곧 죽음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랬던 메이가 상사에게 부탁한 것은 그에게 장례의 의미가 죽음에서 삶으로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메이는 처음으로 산 사람을 위해 장례를 준비하고, 죽은 듯 잠들어 있던 메이의 삶은 조금씩 깨어난다. 저녁으로 참치 캔을 먹는 대신 살아있는 생선을 구워 먹고, 상사의 차에 오줌을 갈기기도 한다.

 

스토크가 수감되었던 감옥의 면회 기록을 조사하던 메이는 마침내 스토크의 딸을 찾아낸다. 켈리 스토크는 자신의 아버지가 몇 주전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슬퍼한다. 가족이 망자의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에 나는 생경함과 동시에 안도감을 느꼈다. 켈리가 눈물을 삼키는 모습을 보는 메이의 시선 역시 그랬을 것이다.

 

켈리가 나오기 전까지 망자의 친지들은 죽음에 크게 동요하지 않는다. 메이는 장례 비용이 청구되냐고 묻는 망자의 자식과 통화를 하기도 했다. 부고를 알리거나, 망자가 키우던 동물을 처리하기 위해 이곳저곳 걸었던 전화에서 답변은 끔찍하게 무미건조했고, 장례식에 오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영화에서 장례식에 참석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이는 켈리뿐이었다. 그러니 얼마나 반가웠을까? 자신이 해온 일이 살아있는 사람에게 의미를 줄 수 있음을 진정으로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다만 영화의 결말은 조금 의문스러웠다. 꼭 그렇게 마무리할 필요는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영화의 제목만큼은 꽤 마음에 든다. 정물화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다르게 보면 ‘그런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뜻을 가지고 있기도 한 제목은 꼭 배경처럼 늘 그 자리에 멈춰 있는, 눈에 띄지 않는 삶일지라도 ‘삶’이라는 이름을 가지기에 충분하다고 말하는 것만 같다.

 

그들의 장례식에 참석하려는 이가 없었던 것은 그들의 삶이 의미 없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그들이 세상에 남긴 추억과 감정이 사람들의 기억 저편에 묻혀 있었기 때문이다. 메이가 한 일은 그것을 파내어 드러낸 것뿐이다. 비록 메이 자신을 위해서는 그런 일을 해줄 사람이 없을지라도, 그가 남긴 모든 친절과 호의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아무도 그의 죽음을 위해 울어주지 않는다 해도 삶은 여전히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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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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