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시민이 원하는 정치란 [도서]

"침묵하는 시민은 그에 걸맞는 정부를 갖는다"라는 말은 유효한가
글 입력 2020.08.17 01:02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시민으로 살아남기


 

올해는 각종 이슈와 갈등으로 그 어느 때보다 크고 작은 분열이 격화되고 있음을 자주 체감한다. 코로나19로 인해 연초부터 일상이 마비되면서 대중은 웃음보다는 분노를, 여유보다는 짜증을 이리저리 표출하며 사회의 각종 영역에서 부딪히고, 논쟁하고 있다.

 

일상에서 비롯된 불만이 사회로 확장되면, 자연스럽게 국민의 관심은 국회와 정부로 향한다. 연령대를 막론하고 열띤 갑론을박이 벌어지는 요즘 상황에도 이와 같은 이유가 크게 기여했을 것이다. 다만 논쟁에서 결국 이기는 건 목소리 큰 사람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듯, 어느 진영에서든 극단적인 논리를 들고 외쳐대는 사람의 말이 부각되곤 한다. 이는 크게 관심갖지 않고 있던 대중들로 하여금 몇몇 극단적인 주장에 노출되어 피로감을 느끼거나, 혹은 그러한 주장에 무비판적으로 편승하게 만드는 악효과를 불러올 수 있다.

 

어느새 2020년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이 사회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떤 시민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잠시 이성과 객관성을 다잡고 되돌아볼 만한 시점이 아닐까 싶다. 모두가 익히 한번쯤은 읽거나 들어 보았을 소설 『1984』와 『동물농장』은 같은 작가가 쓴 책이다. 두 책 모두 전체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을 주제로 하고 있다. 『동물농장』에서는 정치 권력이 어떻게 부패할 수 있는가를, 『1984』에서는 부패한 정권이 어떻게 정권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가를 다루고 있다.

 

 

 

모든 권력은 대중에게로 귀결된다는 것


 

『동물농장』이 던지는 메시지는 결국  ‘대중이 깨어 있고 끊임없이 정부를 감시해야만 그에 걸맞는 청렴한 정부를 가질 수 있다’ 였다.  그리고 『1984』에서도 역시 빅 브라더와 당의 세뇌에 길들여져 아무런 비판도, 생각도 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충성을 다하는 대중을 보며 같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두 책 모두 암울한 현대사회를 소름끼치도록 정확히, 날카롭게 예언했다는 평을 받아오고 있다.

 

『1984』의 빅 브라더와 골드스타인은 『동물농장』의 나폴레옹과 스노볼의 관계와 같다. 빅 브라더, 즉 당은 허구의 적인 골드스타인을 내세워 국민의 분노를 일깨우고, 그것을 이용해 국민을 단결시키며 당에 충성하도록 만든다. 『동물농장』의 나폴레옹은 동물들의 적개심을 이용해 동물들을 하나로 모으고 자신에게 충성하도록 만든다. 자신의 권력 유지에 위협이 되는 몇몇 동물들을 색출해내 스노볼을 도왔거나 그의 사상을 퍼트리고 다녔다는 명분으로 개들을 시켜 처형하며 주기적으로 공포심을 조장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1984_still4.jpg

 

 

『1984』의 당 역시 사상경찰을 통해 골드스타인을 명분으로 사람들을 억압하고 처형한다. 광장에서 열리는 처형식에는 항상 수많은 군중이 참석한다. 처형식을 보며 군중은 골드스타인과 관련된 거짓 죄목을 고백하는 사형수에게 죽일 듯한 분노를, 그리고 범죄자들의 우두머리 골드스타인으로부터 자신들을 지켜주는 빅 브라더에 대해 무한한 경외심을 느낀다. 즉  외부의 적을 설정하고 그를 통해 군중을 하나로 모으려 하는 전형적인 독재자의 모습이다.

 

문제는 『1984』의 군중들과 『동물농장』의 동물들 모두 자신들이 세뇌당하는 데에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1984』의 파슨스는 모든 군중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는 체육위원회라든가 단체 행군, 시위, 저축 운동, 그리고 자발적인 활동을 조직하는 각종 위원회의 지도적인 인물이다. 파슨스는 밤에 잠꼬대로 빅 브라더를 타도하자는 말을 읊조려 감옥에 수감되는데, 그럼에도 자신이 더 큰 죄를 짓기 전에 체포되어 정말 다행이라고 말한다.

 

『동물농장』의 동물들 역시 나폴레옹과 그의 심복 스퀼러의 선동과 세뇌에 금세 넘어가는 어리석은 대중을 상징한다. 그들의 눈 앞에서 동료가 개에게 물어뜯기고, 스노볼이 부당한 이유로 축출당하고,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는 계명을 어기고 돼지들만이 본가에 들어가서 지내는데도 동물들은 반발하지 않는다. 잠시 의구심을 갖다가도 돼지 스퀼러의 교묘한 궤변에 넘어가 수긍할 뿐이다. 시민이 깨어 있지 않으면 그 우둔함에 맞는 정부를 가질 수 밖에 없다.


두 책의 결말은 모두 디스토피아적이다. 『동물농장』의 경우 나폴레옹이 인간과 같이 두 발로 서서 걸으며 인간이 살던 집에서 인간들과 함께 술을 마시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그러나 누가 돼지고 누가 인간인지, 어느 것이 어느 것인지 이미 분간할 수 없었다”가 책의 마지막 문장이다. 『1984』 역시 윈스턴은 거대한 체제를 전복시키는 것에 성공하지 못한다. 자신의 가치관을 지켜내는 것 역시 하지 못하고 고문과 협박에 굴복하고 만다.

 


5cd96a1a93a1527355441ef3.jpeg

 

 

『1984』의 마지막 두 문장은 “그는 자신과의 투쟁에서 승리했다. 그는 빅 브라더를 사랑했다”이다.이 두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결국 무엇인가? 물론 두 책을 조금만 읽어 보아도 작가가 사회주의와 전체주의 체제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작가가 이 두 책을 통해 극단적인 독재 정권 하에서 ‘시민의 진정한 역할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고 생각해볼 법 하다.

 

진정한 시민이란 눈과 귀를 닫고 독재와 세뇌에 휘둘리는 무기력한 가축 같은 존재가 아니라, 정부가 어떤 행동을 취하는지 끊임없이 감시하고 비판하는, 정부가 두려워할 수 있는 존재라고 말하려던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1984』에서 윈스턴이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무산계급에만 있다”라고 강조했듯 시민은 충분히 자신이 속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세상에 나쁜 정치는 '있다'


 

즉, 정치에 대한 이야기의 핵심이자 근본은 언제나 국민이다. 종종 (어쩌면 자주) 그 효능감을 느끼지 못하고, 때로는 무기력함마저 느낀다 해도 정부에 대한 관심과 정당하고 건전한 비판은 그에 맞는 국가를 만들어낸다. 나쁜 정치란 그 누구도 견제하지 않을 때 탄생하곤 한다.

 

한편, 국민의 무관심과 일방적인 비난뿐 아니라, 정부가 나서서 국민의 견제를 막아버리는 경우도 분명 있으며 우리도 종종 목도한다. 『1984』의 경우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하고,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 문장을 통해 그것을 노골적으로 보인다.

 

주인공 윈스턴은 과거 빅 브라더가 연설한 내용 중 현재에 실행되지 못하였거나 변경되지 못한 것들을 찾아내 그것을 언급했던 모든 매체에서 그 내용을 지워 버리는 일을 한다. 심지어 윈스턴은 없는 사람을 만들어 내기도 하는데, 그러면서도 스스로가 소름끼쳐한다. 이미 ‘증발’ 된 고위당원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윈스턴은 ‘오길비 동지’라는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낸다.

 

이 대목에서 작가는 “죽은 사람의 존재는 만들어낼 수 있지만 산 사람은 그럴 수 없다는 것이 묘한 충격으로 다가왔다…지금까지 결코 존재한 적이 없는 오길비 동지가 이제부터는 과거 속에 존재하게 된다. 일단 날조 행위가 잊히고 나면 그는 샤를마뉴 대제나 줄리어스 시저처럼 확실한 증거 위에 틀림없이 존재하게 될 것이다” 라고 적었는데, 이를 읽으면서 정말로 어딘가 소름끼치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히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이 ‘확실한 증거’ 위에 명백히 존재하게 되었으며, 분명히 존재하였던 사람이 이제는 단 한 순간도 존재한 적 없던 사람이 되어 버리는 사회, 그리고 그것이 정부의 지시 아래 끊임없이 자행되고 있는 사회. 작가가 예견한 미래의 디스토피아이다.

 

또한 당은 과거를 왜곡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언어 자체를 새로 만들어낸다. 일명 ‘신어’이다. 이는 구어(영어)를 더욱 획일화, 단순화시킨 언어 체제로 ‘좋은-나쁜’과 같은 대립어들을 몽땅 ‘좋은-좋지 않은’ 과 같이 바꿔 버리는 식이다. 이를 통해 당은 국민의 사상까지도 단순·획일화 시킬 수 있다. 국민이 영리해지는 것을 막는 것이다.

 

 

812_656_3349.jpg

 

 

다만 2020년의 대중들은 대다수가 스스로를 깨어있다, 똑똑하다고 믿고 있다는 데서 책과는 많이 다르다. 실제로 우리는 매일같이 방대한 양의 정보를 수시로 접하며 그 어느 때보다도 영리한 국민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한편, 이러한 신념은 때로 자기성찰 및 자기객관성을 잃게 만드는 눈가리개가 되기도 한다.

 

격화되고 세분화되는 사회의 갈등은 때로 피로감을 불러일으키고 정치적 무관심을 확산시킬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 사회를 바라보고, 비판하고 또 한편으로는 이해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결국 수십 년 전의 고전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여전히, 어쩌면 그 어느 때보다 유효하다는 점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크게 한 발자국을 앞으로 내딛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이규원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8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