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상처 입은 어른들을 위한 동화같은 드라마 '사이코지만 괜찮아' [TV/드라마]

글 입력 2020.08.10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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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방송을 시청하고 매주 주말마다 이 드라마를 시청할 것을 결심했다. <사이코지만 괜찮아>는 흔한 드라마의 클리셰를 남녀 주인공에게 바꾸어 놓았다는 데 신선함이 있었고, 소위 ‘집착광공’이라는 ‘노빠꾸’ 여주인공 캐릭터를 미친 듯이 잘 소화해내는 서예지의 연기와 독특한 저음의 목소리가 자꾸만 다음 화로 이끌었다.
 
하지만 회차가 진행될수록 ‘집착광공’이라는 공격적인 이미지로 똘똘 뭉쳐진 고문영(서예지 분)에게는 깊은 상처가 있음이 드러났고, 그건 문강태(김수현 분)와 문상태(오정세 분)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어른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상처가 낫지 않은 어린아이 시절을 간직하고 있었다.
 
 

치유되지 못한 상처, 트라우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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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는 <사이코지만 괜찮아> 드라마를 관통하는 핵심 소재다. 좁게는 메인 캐릭터인 문영, 강태, 상태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데 사용되고, 넓게는 강태가 근무하는 ‘괜찮은 병원’의 환자들에게까지 적용된다.
 
드라마의 주인공들이 무릇 그러하듯 문영과 상태, 강태 형제가 만나 인연을 맺게 된 건 필연적인 절차였다. 그들이 각자 가지고 있는 상처는 사실 어린 시절에 생겨난 것으로, 알고 보면 같은 인물로부터 비롯된 두려움이었다. 그 인물은 바로 문영의 엄마이자 상태와 강태의 엄마를 살해한 도희재 작가였다. 문영과 상태와 강태는 세월이 흘러 어른이 되었어도 도희재라는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간다.
 
도희재가 엄마를 살해하던 것을 목격한 상태는 본 것을 말하면 죽인다고 협박하는 도희재의 가슴팍에 달려있었던 나비 브로치를 극도로 무서워하게 된다. 그래서 상태는 나비로부터 오는 두려움 속에 갇히게 되고, 봄이 오면 나비 악몽을 꾼다. 때문에, 형제는 1년마다 이사를 하며 나비로부터 ‘도망’ 다닌다. 그러던 중 형제는 트라우마는 직면해야 한다고 말하는 ‘괜찮은 병원’의 오 원장의 기사를 보고 모든 일이 시작되었던 고향 성진 시로 향한다.
 
문영은 어렸을 때부터 사이코패스인 엄마와 아빠의 무관심 속에 자라오면서 반사회적 인격 성향을 띤다. 문영에게 엄마는 두려운 존재이고 아빠는 엄마를 막지 못한 방관자이기에 어린 시절 외로움은 당연했을 터다. 성인이 되어서도 엄마에 관한 악몽을 꿀만큼 문영의 상처는 엄마에 대한 공포로부터 기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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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 작가인 문영이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은 동화 속 메시지를 통해서다. 그의 작품인 『악몽을 먹고 자라난 소년』 속엔 이미 악몽을 꾸지 않을 방법이 제시되어 있다. “그러니 잊지 마. 잊지 말고 이겨내. 이겨내지 못하면… 너는 영혼이 자라지 않는 어린애일 뿐이야.” 문영은 상처를 마주 봐야 진정한 어른이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어린애의 방에서 어른이 되는 곳으로 나가는 문의 열쇠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가 가지지 못한 건 열쇠로 문을 열 ‘용기’였다.
 
강태는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형 상태를 위해 항상 살아왔다. 그의 행동의 모든 동기는 형이기에 자신을 위한 삶은 없다. 뭐 하나 맘대로 해 본 적 없는 인내의 삶을 사는 강태. 어렸을 때도 이렇게 철저히 감정을 숨긴 것은 아니었다.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아들 상태를 둔 엄마는 늘 마음속에 자신이 죽으면 아들이 어찌 살까 하는 걱정이 있었다. 그 걱정은 자연스레 강태도 지게 되었는데, 엄마는 종종 강태에게 상태를 지켜주라며 “너 그러라고 낳았어.”라고 말한다. 자신의 존재 의미가 오로지 형을 지키기 위함이라고 한다면 어린 마음에 받을 상처는 얼마나 클까.
 
설상가상 태권도 빨간 띠를 땄다고 엄마에게 자랑하고 싶었던 어린 강태는 만면에 환한 웃음을 띠고 집에 오지만 강태를 기다리는 건 엄마의 날 선 질책이다. 강태가 없는 동안 동네 아이들에게 맞은 상태가 속상한 엄마는 형 지키지 못하고 뭐 했냐, 그러라고 비싼 도장 보낸 줄 아느냐며 강태를 혼낸다. 엄마의 칭찬을 원했던 강태는 어린 마음에 설움이 폭발하고 그 길로 가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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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는 형이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소리쳤지만, 반은 진심이고 반은 아니다. 하지만 형이 빙판 아래 빠지자 망설인다. 형을 구해야 하나? 형이 죽는다면 어쩌면 형을 지켜야 하는 지긋지긋한 생활에서 벗어날 수도 있을 텐데? 머뭇거리는 순간이 억만 겹 같고, 결국 괴로워하던 강태는 고민한 시간 자체가 죄스럽다는 듯 자신의 몸을 모두 던져 형을 구해낸다.
 
그날의 일은 형제에게 묻어버리고 싶은 기억이어서 십몇 년 동안 서로의 마음 깊숙한 곳에 감춰두었지만, 그 사건을 목격했던 문영이 기억과 함께 형제의 감정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 강태에게는 ‘위선자’라 부르며 부정하고 싶었던 감정을 끄집어내고, 상태에게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동화의 교훈을 알려주며 비밀은 속에 묻어두면 병이 난다고 부추긴다.
 
늘 형다운 형이 되고 싶지만 오히려 동생에게 보호받는 상태는 강태가 어렸을 적 자신을 버리고 도망치려 했던 것도 기억하고, 자신에게 둘러댔던 강태의 선의의 거짓말들도 모두 알고 있었다. 형제는 항상 서로를 위하며 참고, 참고, 참으며 하고 싶은 말을 삼켰지만, 마음 한켠엔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편한 진실과 과거에 묶인 불안이 자리하고 있었다. 형제는 인내로 포장되었던 평화를 깨고 티격태격 싸우면서 ‘상처 주고 상처받았던, 처절하게 후회했던, 아프고 고통스러웠던 기억들’을 마주한다. 그렇게 트라우마를 앞에서 마주 본다.
 
 
 
트라우마를 직면할 용기를 말하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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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의 인물들이 많으면 그들의 에피소드를 챙기느라 드라마가 산으로 가는 경우도 허다하다. 떡밥을 뿌려놓고 마지막 화까지 해결하지 않은 채 조연의 이야기는 버리고 간다거나, 분량 조절에 실패해서 메인 캐릭터의 이야기를 충분히 풀어내지 못한다거나 말이다. 하지만 <사이코지만 괜찮아>는 ‘괜찮은 병원’ 환자들의 에피소드를 적절히 풀어내며, 마지막 화에 고문영의 동화라는 장치를 활용해 그 모든 에피소드를 연결하고 완벽하게 하나의 이야기로 다시 써냈다.
 
문영의 마지막 동화 『진짜 진짜 얼굴을 찾아서』에 나온 관심이 필요한 광대 곽기도(곽동연 분)와 딸을 잃은 슬픔에 우울증을 가진 엄마 여우 강은자(배해선 분)뿐 아니라 해리성 인격 장애를 가진 유선해(주인영 분)와 베트남 전쟁 파병 후 살육의 트라우마로 PTSD를 가지게 된 간필옹(김기천 분)의 에피소드는 메인 캐릭터의 성장을 위해 함께 쓰이며 서사에 완결성을 더했다.
 
특히 간필옹 환자는 상태에게 과거에 갇히면 영원히 못 나온다며 상태의 나비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데 열쇠를 제공한다. 과거에 갇혀 문을 열고 나가지 못하는 간필옹 환자에게 상태가 건네주는 책은 문영의 『악몽을 먹고 자란 소년』이다. 잊어버리고 이겨내지 못하면 영혼이 자라지 않는 어린애일 뿐이라는 동화책의 말. <사이코지만 괜찮아>는 친절하게도 처음부터 끝까지 그 사실을 반복하여 알려준다.
 
그래서 <사이코지만 괜찮아>는 한결같이 캐릭터들의 트라우마를 확인하고 마주 보는 데 집중한다. 문영과 강태와 상태가 특히 두려움을 느끼거나 약해졌을 때 어린 모습으로 교차되는 연출이 자주 있는 이유도 아직 그들이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어린애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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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드라마의 가장 스릴러 적 요소는 도희재를 둘러싼 이야기였다. 죽은 줄 알았던 도희재는 알고 보니 수간호사였다는 반전 요소.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서 소설가에서 간호사가 될 수 있었는지, 도희재인 척했던 박옥란과는 어떤 관계인 건지, 도희재를 둘러싼 이야기가 덜 풀려 아쉬운 느낌이 있었다.
 
그러나 문영과 형제가 도희재라는 트라우마에 직면할 것을 결심하자 그동안 그들을 지독하게 괴롭혔던 악인이 맞나 싶을 정도로 도희재는 힘도 못 추리고 처리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이런 결말은 사실 그동안 트라우마와 맞서지 않았기 때문에 도희재를 향한 공포와 두려움이 과장되어 있었던 게 아닐까, ‘악몽을 먹고 자란 소년’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It’s okay not to be ok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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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화에서 보여준 문영과 상태가 작업한 동화 『진짜 진짜 얼굴을 찾아서』에서 알려주듯 그림자 마녀가 가져간 건 그들의 진짜 진짜 얼굴이 아니라 ‘행복을 찾으려는 용기’였다.
 
가면을 쓴 소년 강태는 늘 자신의 감정을 숨기며 형을 지키고 보호하는 사람으로 인내하며 살아왔지만, 이제는 비로소 상태의 보호자가 아닌 강태 자신을 위해 살 수 있는 어른이 된다. 깡통 공주 문영은 더이상 감정 없이 살아가는 속이 빈 깡통이 아니라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며 온기와 배부름을 느끼고 엄마의 그림자에서 벗어난 어른이 된다. 박스 속에 갇힌 아저씨 상태는 늘 자신만의 공간 속에서 강태의 보호만을 받아왔지만, 상자를 벗고 사람들의 감정을 이해하면서 보살핌이 필요한 존재에서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로 변화하며 어른이 된다.
 
가면, 깡통, 상자. 자신을 억압하면서 동시에 자신을 보호할 요량으로 썼던 것들을 벗어던짐으로써 그들의 거리는 한 발자국 더 가까워지고, 서로가 함께 행복한 기억들로 그림자 마녀를 완전히 덧칠해 지워버림으로써 그들은 어른으로 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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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되지 않은 상처 하나쯤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상처의 치유는 그 기억을 마주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는 것. 과거의 기억 속에서 벗어나는 건 때론 너무 어렵지만,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이 용기를 제공해 줄 수 있다는 것. <사이코지만 괜찮아>가 남긴 따뜻한 메시지는 마지막까지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부드럽게 극을 이끌어나갔다. 마지막 화를 보고 잔잔히 차오르는 감동은 용두사미형 결말이 많은 한국 드라마 장르에서 소중함을 배로 더했다. 따뜻한 동화책을 읽고 흐뭇함으로 마지막 장을 덮는 것처럼, <사이코지만 괜찮아>를 마지막 화까지 시청하고 주인공들이 그토록 찾고자 하는 감정을 느꼈다.
 
“아…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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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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