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신에 대한 마지막 토론 - 연극, 라스트 세션 [공연]

신 존재에 대하여
글 입력 2020.08.10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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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라스트세션BW_[프로이트] 신구 (사진제공_파크컴퍼니).jpg



지난 8월 4일, 혜화동 예스24 스테이지에서 펼쳐진 ‘라스트 세션’을 보고 왔다. 극장은 만석이었다. 홀로 객석에 앉아 연극을 기다리노라면, 역시 흐르는 눈은 둘 곳이 없어 무대와 소품에 머물게 되곤 한다. 차려진 무대는 보아하니 꽤 오랜 서재 같다. 클래식이란 낱말이 어울리는 곳, 좌측엔 책장 곁에 소파가 놓여 있고 우측 편에는 놓인 책상 하나를 숱한 작은 조각상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개중 부처의 형상이 눈에 띈다.


극은 2차 세계대전 시기 영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모든 이들이 익히 아는 인물,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서재에서 이루어진다. 서재에 앉아, 고요히 사색에 잠긴 프로이트가 라디오 방송을 듣는 것으로 극은 시작되었다.


프로이트 역에는 배우 신구 님이 캐스팅되었다. 유명인을 가까이서 보는 일은 좀체 없었는데, 아무래도 직접 연기를 하는 것을 구경하는 일이란 아예 처음이다. 다문 입의 주변으로 풍성히 나 있는, 흰 더벅수염이 인상적이다. 인상적이다. 다만 그뿐이었다. 신기하다는 감상은 잠깐만에 스치고 지나간다. 아무래도 무대 위의 배우에게선, 이미 배우의 향기가 지워져 있었던 때문이었나 보다.



[라스트세션] 공연사진_신구(1)(사진제공_파크컴퍼니).jpg

 

 

그에게서는 조금의 이질감, 그러니까 형성되어가는 캐릭터에 여전히 남아 있는 조금의 이질감, 그로써 곧 배우의 본디 아이덴티티를 표지하는 어떤 티끌의 감각도 지워져 있었다. 무대 위의 인물은 무대가 그리는 저 너머의 세계로 이미 건너가, 긴 어둠이 들어찬 미래를 그리곤 폭 빠져 있었다. 그때 그의 미간은 성급하지도 과장되지도 않은 채로 굳게 가까워 오고 있었다.


라디오에서는 독일의 폴란드 침공을 보도하고 있었다. 바야흐로 세기의 비극인 2차 세계 대전의 막이, 막 오르고 있었고 노인 프로이트는 가만 침묵 속에 사색으로 빠져들어 가 있었다. 그는 이 불안으로 가득 찬 소식을 접하면서도, 우왕좌왕하는 기색 없이 가만 서재에 앉아 있었다. 그때 기차역은 피난 인파로 분명 가득 차 있었을 것이다.


런던이 폭격에 노출되는 것은, 사실 시간문제인 까닭이다. 비록 아직은 영국의 참전에 대한 성명이 없지만, 뭇 시민들은 일단 되는대로 이곳 런던에서 최대한으로 벗어나고자 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마 각지의 친척에게로 바삐 내닫고 있었을 것이다. 이 노인은 무엇이 그리 여유로운지 느릿한 몸짓으로 서재 안을 괜히 왔다 갔다 한다. 그러면서 그는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손님으로 오실 분은 C.S 루이스, 나니아 연대기로 유명한 영국의 작가이다. 무신론자에서 유명한 기독교 변증가가 된 그는, 곧 프로이트와 함께 신 존재에 대한 토론을 벌이게 된다. 물론 둘의 만남은 실제 일어난 바 없었다. 이 극은 현실적 소재를 차용해 벌이는 팩션극. 친구 J.R.R 톨킨에 의해 실제로 무신론자에서 기독교 변증론자가 된 루이스는, 맹렬한 종교 비판가이기도 한 프로이트와 함께하기에 적합한 인물. 적절한 가상 캐스팅이 아닌가 한다.


개가 막 짖고, 영국의 참전 소식과 함께 손님이 이제 막 도착하였다. 루이스는 최근 집필한 저작에서 프로이트를 비판한 것 때문에 초대된 것으로 생각하며 첫 운을 떼었지만, 프로이트는 그의 신 존재에 대한 변증에 흥미를 느껴 초대하게 되었다고 고한다. 신의 존재를 철저히 부정하는 그로서는 철저한 무신론자가 독실한 신자가 된 그 까닭과 일련이 몹시 흥미로웠던 것이다. 더군다나 그가 우리도 익히 아는, 정신분석의 대가라고 한다면야 그 궁금증이 그에게 얼마나 지대했을지 예상이 된다.



[라스트세션] 공연사진_이석준(1)(사진제공_파크컴퍼니).jpg

배우 이석준 님, C.S 루이스 역


 

 

1. 신 존재에 대한 변증



짧은 서론이 오가고, 프로이트 교수가 운을 뗀다. ‘자네같이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가 어떻게 신의 개념을 받아들였는가.’ 질문한다. 과학적 사고방식, 그러니까 정량적인 계산과 수치화와 증명을 선호하는 사고방식 하에서 신의 존재란 영영 미심쩍기에. 분명히 증명해낼 수 있는 직접적 근거가 적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루이스는 이에 대하여, 역사적 방법론을 꺼내 든다. 성경을 하나의 절대적 진리라고 보는 대신, 역사적 상관물로 바라보는 것이다. 고대에 한 인간이 있었고, 그는 스스로를 신의 아들이라 자청하였다. 이 현상을 무어라 보아야 하는가 하고 그는 질문한다. 그 인간, 신의 아들 예수에 대한 진실은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가 대단한 미치광이이거나, 정말로 신의 아들이거나.


그가 대단한 미치광이었다고 하자. 이제 루이스는 심리학자 프로이트에게 질문한다. 그의 알려진 행적 중에 과대망상이나 정신착란 증세가 있더냐고. 그러자 프로이트는 시인하였다. 예수가 스스로 신의 아들이라고 이야기한 것과 차후 행적에서는 일관성이 보이고, 그 외 행동 방식에서 정신착란과 과대망상의 징후는 보이지 않았다고 말이다.


성경은 그가 이야기한 바를 집대성한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기나긴 이야기이자 가르침이고, 그가 만약 미친자였더라면 이렇게 긴 책이 태어날 수나 있었을 것이며, 그렇게 탄생한 책이 이 긴 역사를 관통하여 내내 구전될 수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루이스는 프로이트를 압박한다.



[라스트세션] 공연사진_이석준,남명렬(2)(사진제공_파크컴퍼니).jpg



정황 증거로 그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다. 고대에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스스로를 증명하며 한 마디의 언어를 설파했다. ‘너희 모두 죄인이며, 죄인 아닌 사람이 없나니, 내게 네 죄를 고하라. 그러면 내가 너희의 죄를 사하겠노라.’ 프로이트와 루이스 모두 이 부분을 주목한다. 신의 아들을 자청하며 나타난 이가 대단한 권능을 내세우는 것도 아니요, 대단한 권위를 내세우는 것도 아니며, 무력을 과시하는 것도 아니었으니 그가 주는 것은 그 한마디, 네 죄를 내가 사하겠노라는 말 한마디였다는 것이다.


인간의 논리로 보았을 때, 죄를 사하는 자는 오직 피해자이다. 인간의 사이에 죄가 있다면, 그것은 죄와 가해자와 피해자로 이루어져 있고, 오직 그 저질러진 죄는 피해자의 용서로만 사해질 수 있는 것. 여기 어떤 이가 나타나 그 죄는 너희 모든 인간의 것이요, 그 사함을 신의 이름으로 하겠노라 말한 것이다. 그 사함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묻노라면, 아마 그곳에 구원이 있다 말씀하시리다.


프로이트도 루이스도 이 점에 주목한다. 나는 신이니 대단한 권위와 권력과 권능을 가지고 있노라 하시며 인간을 지배하려 하지 않았다는 점. 뜬금없이 너희는 죄인이니 너희 죄를 내가 대신 짊어짐으로써 사하겠노라 말하였다는 점. 만약 예수가 미치광이어서 신의 대리인을 자청하였다고 가정한다면, 무엇이 그 행위의 동기요 보상될 것인가. 그가 권능을 보임으로써 인간에 군림하려 하지도 않았다면 말이다. 대체 그가 정말 신의 아들이 아니라면, 무엇이 그런 행동을 자아냈겠느냐는 말이다. 죄를 사하겠노라. 일찍이, 그리고 그 이후에도 그러한 행동 양태는 없었다. 신의 아들을 자처하여, 하는 일이라곤 보상 없는 박애라니.


 

 

2. 신의 권위에 대한 반박


 

그러나 정황 근거가 그의 존재를 증명한들, 여전히 그의 존재만으로 천국의 실재함과 신의 실체가 증명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다시 그의 논리로 돌아가 보자. 그가 전능하고 또 전지하다면, 무엇으로 세계의 악은 생겨나는가. 이에 대한 기독교리의 답은 ‘자유의지’이다만, 왜 하필 거기에 ‘선악과’를 두셨냐는 말이다. 자유의지로 악을 택하게 하셨다는 말보다 먼저, 왜 세계에 선과 악을 ‘마련’하였느냐는 근본적인 질문이다. 이에 루이스는 답할 수 없다. 지금, 전선에서는 수많은 인간이 죽어가고 있었기에.


물론, ‘악’이라는 현상을 가치 판단의 하나로 볼 수도 있다. 즉,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보느냐에 달린 문제로, 치부해버릴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도저히 용납되지 않는 악, 절대악이라고 시원하게 말해볼 법한 것들도 세상에는 존재한다. 차마 입에 담기가 거북한 죄악들, 한 인간의 다른 인간에 대한 일방적 침노와 약탈.


가정을 꾸려두었고, 그 슬하에 뭇 자식들을 낳으셨으나, 왜 이 자식들 간의 미움과 반목에 침묵하시는가. 자유의지라고 이야기해보기엔, 아무리 생각해도 회피 혹은 포기의 일이라고밖에 생각들지 않는다. 도대체가 우리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질 정도로 우릴 사랑하는 당신 ‘아버지’께서는, 왜 모든 것을 이미 아시고 모든 것을 해결할 능력이 있는 당신 ‘아버지’께서는, 왜 이 땅 많은 소년과 소녀의 죽음 앞에 침묵하시는가.

 

 

[라스트세션] 공연사진_신구(3)(사진제공_파크컴퍼니).jpg

 

 

오직 하시는 것이라곤, 있는지 없는지도 불분명한 죄의 사함이 전부라니. 그것도 참 넌센스이다. 인간계에는 간섭하지 못하심일까. 오직 우리 영혼의 구원, 그러니까 사후의 처신에만 힘쓰실 수 있는 것일까. 천국이 있고, 또 지옥이 있나니 너는 선하여 천국으로 인도되거나 나를 믿음으로써 천국으로 인도되거라 하심이란…. 지옥은 무엇을 위함이었는가. 자유의지 네 글자로 죄 된 자식들을 방목하시더니, 이제 사후에나 까마득히 몰랐던 우리를 단죄하심이라니.


왜 이 땅에 신의 현상계를 단단히 못 박아 두지 못하셨던가. 고개를 들어 태양의 곁에 천국을 자리해두심으로써, 뭇 인간에게 천국의 당당한 지엄함을 선보이지 못하셨는가. 당신을 믿음으로써 천국으로 오라니, 그렇게 말씀하시기엔 우리 불신자들에게 당신 스스로 선보이심을 소홀하셨다. 거기 신이 계시고, 그 신이 우리 아버지라 하신다면, 불신자인 우리조차 당신 몫이다. 차라리 시험하심이라 보는 것이 옳다. ‘네 영혼의 순수함을 스스로 증명해 보이라, 그러면 너는 진정 나의 아들딸이 되어 내 천국으로 거두리라.’ 그렇다면 우리는 당신의 자식이 아니요, 당신이 우리의 아버지가 아니이다. 당신이 우리를 ‘입양’하는 것에 불구한 것이다.

 

 

 

3. 형이상학 논쟁의 마무리, 우리의 일상



[라스트세션] 공연사진_신구(2)(사진제공_파크컴퍼니).jpg



둘의 논쟁은 격해져 간다. 기독교리에 대한 무신론과 유신론의 대립구도는 적당한 선에서 타협이 불가한, 양 극단의 충돌이기에. 그 와중에 라디오는 전황을 알리고, 느닷 창밖에선 두려운 폭격기의 소리가 들려오고, 프로이트의 구강 통증은 심각해져 간다.


프로이트는 당시 구강암으로 인해 입천장을 전부 드러낸 상태, 인생 말기에 처해 있었다. 그는 죽음을 기다리다 못해, 안락사를 꾀하고 있다. 구강암으로 인한 그의 고통은, 둘의 토론 도중에 거듭 표현된다. 세계는 전화에 휩싸이고, 그 스스로는 극도의 고통 속을 살아가고, 또 연로하니 프로이트로서는 무언가 더 이상의 삶을 기대하지 않을 법도 하다. 그러나 기독교도에게 자살은 최악의 죄로, 그를 두고 침묵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죄라고 느낄 정도였으니 루이스는 경악한다.


그러자 프로이트는 묻는다. 너무한 것 아니냐고.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말이다. 이 암이라는 병, 세포의 돌연변이로 인한 병마저 신의 뜻이냐고. 앞서 기독교리를 근거로 나누었던 토론의 객관적 구도는, 이제 개인의 생애로 그 배경을 달리한다. 루이스는 한 인간의 고통 앞에서조차 노도와 같은 태도를 견지하진 못했다. 그도 하나의 인간인 까닭이요, 그가 그 고통마저 신의 뜻이라고 광오하게 말해보기엔, 스스로 신의 사자가 아닌 까닭이다. 둘은 그렇게, 타협점을 찾지 못한 채 논쟁을 마무리 짓는다.

 

**

 

결국, 이 논쟁에서도 결론은 서지 않는다.

 

그 누가 감히 이제 와 기독교를 완전히 부정함으로써, 이 땅에서 살라버릴 수가 있을까. 이제는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하고도 공고한 역사가 된 양식을 말이다. 또 이 땅에 교회와 성역을 선포하고 그 안에 안식으로 살아가는, 그 뭇 사람들과 그들의 믿음을 말이다.


또 누가 있어, 신을 대신하여 신의 실재함을 진리처럼 선포할 수 있을까. 우리는 불신자, 근거가 있어도 좀체 믿음을 두려워하고 멀리하는 존재들인데 말이다. 이 문제는 영원한 인간의 의문, 그러므로 영원한 토론의 주제이다.

 

‘라스트 세션’ 세션을 무엇으로 해석할지가 모호하지만, 나는 토론이라 해석하기로 했다. 마지막 토론, 그것은 유사이래 최악의 살육을 앞두고서 하는, 신에 대한 마지막 토론이다. 5천만의 죽음이라니, 이 정도 숫자면 실감도 나지 아니한다.


저기 위에 신은 계실까. 신이 계신다면 그는 우릴 보고 있을 터이다. 그는 이 마지막 토론을 굽어보면서, 또 한 편의 눈으로는 전장을 살피고 계실 터이다. 그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까. 신에게 생각이란 것이 있을 리가, 개인적으로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 그는 대체 어떤 침묵 속에 머무르고 있었을까.


5천만의 죽음 이후, 신 존재에 대한 개념은 그곳 그대로이겠으나 그 개념에 대한 우리 믿음은 모종 달라졌을 터이다. 어쩌면 그때부터 신과 내세의 개념은 진정한 회의의 길로 접어들었을는지도 모르지. 그러니 마지막 세션이다. 그리고, 그럼에도 인류의 영원한 세션이다.

 


[라스트세션] 공연사진_이석준,남명렬(3)(사진제공_파크컴퍼니).jpg



둘은 이제 헤어진다. 루이스는 대학으로 곧잘 가겠노라 말하곤 서재를 나섰다. 프로이트는 다시금 침묵으로 빠져, 지금 고통과 얼마 남지 않은 생애와 바깥의 전란과 신 개념에 대한 자신의 믿음과 그 믿음에 대한 회의 등을 잔뜩 버무린 듯한 얼굴을 표한다.

 

의자에 기대어, 약간은 침통한 표정으로 사색에 빠진다. 이제 무대에는 조명이 꺼지고, 그를 비추는 한 줄기의 조명만이 그의 뒤를 비춘다. 그러자 한 줄기 가느다란 빛이 프로이트의 윤곽만을 밝히고, 그의 얼굴엔 짙은 그림자와 어둠과 굵은 윤곽선만이 강조된다.


그리고 자막이 영사된다. 그는 결국, 소원대로 그리고 약조대로 주치의의 처방 아래 안락사로 생을 마감한다. 강렬하고도, 강렬하였다. 신 존재에 대한 고찰과 그 이면에 담기어 있는 우리 인간 개인사의 문제들이 마구 교차한다.

 

신을 믿거나 믿지 않거나, 그 까닭은 결국 자신의 삶에 놓여 있다고 프로이트는 말했다. 그는 심리학자이니 말이다. 모든 인간 행위에는 기저 동기가 있게 마련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의 신에 대한 철저함에 가까운 부정은, 오히려 임종을 앞에 두고, 자살을 앞에 두고 있었기에 더욱 분명했으며, 루이스의 신에 대한 강한 긍정은 스스로 죄 사함을 필요하기 때문.


인류 최악의 전쟁 하에 이뤄진

인류의 영원한 의문,

‘라스트 세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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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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