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인생의 신맛 조절하기 - 레몬청 만드는 법, 핑거라임

인생을 마주하는 방법
글 입력 2020.08.03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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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삶에서 느끼는 수많은 감정이나 상태를 ‘맛’으로 표현하곤 한다. 사전에 따르면 달다는 ‘흡족하여 기분이 좋다’라는 의미를, 쓰다는 ‘달갑지 않고 싫거나 괴롭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맛에 포함이 되지는 않지만 맵다는 ‘성미가 사납고 독하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애달프거나 불쌍한 상황을 보면 ‘짠 내 난다’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이렇게 인생은 달고, 쓰고, 맵고, 짜다. 그렇다면 신맛은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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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청 만드는 법 / 핑거 라임>은 신맛을 통해 삶을 이해해 보려 하는 두 편의 단편 소설이다. 이 책에는 조금 흥미로운 점이 세 가지 있다. 첫 번째로 흥미로운 점은 한국어 버전 뒤에는 영어 버전이 수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어느 한 버전을 쓴 후 번역한 것이 아니라, 한 작가가 같은 이야기를 두 가지 언어로 쓴 것이기 때문에 미묘한 표현의 차이를 보는 것이 즐겁다.

 

둘째는, <레몬청 만드는 법>을 앞에서부터 읽고 나면 책을 뒤집어 뒤에서부터 읽어야 <핑거 라임>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앞표지만 두 개라고 할 수 있다. 한쪽은 레몬색, 한쪽은 라임색. 책을 받아 들었을 때 그 색 조합이 시각적으로 참 마음에 들었다. 보기만 해도 시원한 늘 이런 시각적인 즐거움은 책을 읽을 때도 계속된다.

 

이 책은 텍스트만 있는 소설집이 아니라 일러스트레이터 노경무 작가와 함께 한 일러스트 소설집이다. 어른들의 그림책이랄까. <레몬청 만드는 법>의 일러스트는 무채색과 레몬색만을 사용했다. <레몬청 만드는 법>의 일러스트는 따스하면서도 어딘지 애달픈 느낌이 드는 반면 <핑거 라임>의 일러스트는 스산하고 혼란스러운 느낌을 주었다. 색이 가진 특유의 느낌도 그러했고, 두 소설의 이야기가 주는 느낌도 그러했다.

 

<레몬청 만드는 법 / 핑거 라임>이라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두 소설은 각각 레몬과 핑거 라임을 소재로 하고 있으며 신맛과 삶의 고통이라는 큰 주제가 두 소설을 하나로 관통하고 있다.

 

 

 

레몬청 만드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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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함께 오던 이 없이 홀로 충혈된 눈으로 식당을 찾아온 여자는 따뜻한 레몬티를 열세 잔을 마신다.

 

여자가 빈 머그컵에 레몬청을 채우고 뜨거운 물을 붓는 행위를 열두 번 반복하는 동안, 뜨뜻미지근한 레몬을 잘근잘근 씹는 동안-그녀의 마음속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얼마나 뒤돌아보고, 무엇을 놓고 무엇을 놓지 못했는지 이 이야기의 화자와 독자 모두 절대 알 수는 없다. 달고 신 레몬 차가 열 세잔이나 필요한 날도 있을 거라는 걸 어림짐작하는 것이다. 모두가 삶에서 그런 경험들이 있으니.

 

 

코를 막고 레몬 조각에 이를 깊이 박아 보았다. 강렬한 신맛에 입 안이 아렸다. 시큼한 향이 피부에서 스며 나오는 기분이었다.레몬차를 마실 때에는 달달한 설탕이 레몬의 신맛을 가린다. 그렇지만 음미하다 보면 문득 날카로운 신맛이 혀를 찌른다.

 

- 23P

 

 

레몬청은 레몬 한 층을 쌓고, 그 위에 설탕을 한 층 쌓는 과정을 반복한 후 약간의 숙성기간을 거쳐 만들어진다. 이렇게 만들어진 레몬청에 뜨거운 물을 부어 만들어진 레몬 차는 마냥 시지도 마냥 달지도 않은 오묘한 맛이다. 한 모금 넘길 때마다 가슴부터 따뜻함이 퍼지고 입안에 달달함이 감돌고 끝에 신맛이 찾아온다.

 

레몬만 있다면 너무 시어서 먹을 수 없고, 설탕만 있다면 달기만 한 무(無) 맛이 기 때문에 설탕의 단 맛이 약간 역하게 느껴질 것이다. 사실 신맛은 그 자체로 즐기는 것이라기보다는 다른 맛들, 특히 단맛과 섞어 먹을 때 진가를 드러낸다고 한다. 신맛도 단맛도 홀로 있을 때보다 함께 있을 때 그 맛과 향이 더욱 풍부해진다. 레몬을 쌓고 설탕을 붓는 일련의 과정들을 머릿속에 그리다 보니 이것이 우리 삶 그 자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삶에 존재하는 아픔들은 필연적이다. 어쩔 수 없이 찾아오는 아픔들은 근본적으로 없앨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다. 하지만 그 아픔들을 그저 입에 넣기에는 너무 시어 쓰기까지 하다. 아픔에서 벗어났다고 느끼는 것은 여러 차례 부어진 설탕과 적당히 지난 시간들이 만들어 준 감각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을 때 비로소 그 위에 뜨거운 물을 부어 우려낸 차를 마시는 것이 우리가 삶의 아픔에 마주하는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핑거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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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거 라임>은 일반 라임보다 훨씬 더 신 개량종 핑거 라임을 통한 심리치료를 진행하고 있는 상담사가 등장한다. 여러 치료들을 다 거친 후에도 효과를 얻지 못한 내담자에게 극도로 신 핑거 라임 알맹이를 씹도록 하는 것이다. 일반 라임보다 100배는 시고 50배는 쓰기 때문에 그것을 먹은 내담자는 극도로 고통스러워한다. 이것은 약간의 충격 요법으로 작용하여 심리 치료에 도움을 준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미 존재하는 고통을 다른 종류의 고통으로 치유하는 것이다.

 

 

핑거 라임을 씹는 순간에 느낀 고도의 해방감, 평상시의 고통에서 잠시 벗어났던 감각을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치료 과정 전체에 적신호가 켜진다. 핑거 라임에 익숙해지면 보다 큰 자극, 보다 큰 고통이 필요해지고, 근본 원인을 고스란히 남긴 상태로 문제를 덮어 버리는 악순환의 고리만 굳어진다.

 

- 53P

 

 

김록인 작가는 ‘고통을 다른 고통으로 치유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서 이 소설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글쎄. 고통을 다른 고통으로 잊어버릴 수는 있지만, ‘치유’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까. 기존의 고통과는 다른 종류의 고통 혹은 더 센 강도의 고통이 생긴다면 아마 기존의 고통은 잘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치유라고 부를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핑거 라임>에서 자신에게 할당된 핑거 라임 치료를 모두 받고 난 이후에도 핑거 라임을 더 달라고 요구하는 환자의 모습을 보며 알코올 중독을 떠올렸다. 술에 거나하게 취해 현실의 고통을 잊어버리려고 하는 것, 술에 깨고 나면 여전히 고통은 그곳에 존재하는 것-이런 것들을 생각하다보면 고통을 다른 고통으로 치유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특히 그것이 심리적인 고통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무언가를 아예 잊어버릴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은 치료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핑거 라임>의 주인공은 상담치료의 효과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드러내며 “인간은 세상을 대하는 태도를 어디까지 바꿀 수 있을까?(53P)”라고 자문한다. 길지는 않지만 여태껏 살아온 바에 의하면 산다는 건 고통의 연속이었고 세상은 항상 ‘요지경’이었다. 우리는 이전의 고통을 현재의 고통으로 덮어버리거나 잊어버리면서 조금씩 앞으로 걸어왔던 건 아닐까.

 

 

"줄곧 레몬이나 라임을 소재로 무언가를 쓰고 싶었습니다. 너무 시어서 괴로운데 동시에 맛있기도 하고, 그런 오묘함이 인생과 닮았다고 생각해요."

 

- '작가들의 대화' 중에서

 

 

과한 신맛은 너무 써 인상을 찌푸리게 한다. 하지만 적당한 신맛은 향과 맛을 풍부하게 한다. 인생에 있어서 신 맛은 달 거나 쓴 것처럼 어떤 특정한 순간을 이야기하기보다는 그 모든 순간들을 아우르는 말인 듯 하다. 신 맛의 정도를 조금씩 조절해가면서 사는 것이 우리가 삶을 대하는 태도가 되어야하지 않을까-라고 책장을 덮으며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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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청 만드는 법, 핑거라임
- 나는 레몬 조각에 이를 깊이 박았다 -


지은이
김록인 글, 노경무 그림

출판사 : 바다는기다란섬

분야
한국소설

규격
118*177mm, 양장본

쪽 수 : 112쪽

발행일
2020년 06월 30일

정가 : 11,000원

ISBN
979-11-961389-2-9 (02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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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글쓴이_ 김록인
 
레몬-라임을 좋아해서 해마다 제주 레몬이 나는 겨울, 제주 라임이 나는 초가을을 기다린다. 소설을 많이 읽고 조금씩 쓴다. 꼭 필요한 말만 남기고 군더더기를 없애기 시작하자 글이 점점 짧아졌다. <레몬청 만드는 법 / 핑거라임> 이후 동물 실험에 관한 짧은 소설을 작은 책으로 낼 예정이다.
 
 
그린이_ 노경무
 
자신을 돌보기 위한 방법으로 그림을 선택했다. 그림책 <불에서 나온 사람>과 만화 <불안을 걷다>는 아픈 몸을 살아 내는 이야기다. 여행을 좋아해 틈틈이 쓰고 그려 여행 에세이 <남해여행자>를 내기도 했다. 현재 애니메이션을 공부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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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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