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nion] 무비판적 태도에 대한 경계: 설국열차와 파수꾼 [문화 전반]

글 입력 2020.08.02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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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계급화한 사회 구조가 어쩔 수 없는 인간 본능이며 사회 안정을 위한 최선의 방법인 걸까? 봉준호 감독의 영화 <설국열차>와 이강백의 소설 <파수꾼>을 통해 기득권의 사회적 세뇌와 대중의 무비판적 태도에 대한 문제점을 이야기해보고 싶다.

 

 

 

설국열차

"Balance is the best value"


 

설국 속을 끊임없이 달리는 열차 속에서 질서(Balance)는 최상의 가치이자 모든 것은 탄생과 동시에 역할이 정해진다는 전제로 인간에게 도구적 잣대를 들이대는 이유로 작용한다. 타락의 정점인 열차 앞 칸 지배층은 안정을 위한 꼬리칸 사람들의 희생을 이상적이라고 여긴다. 여기서 희생과 안정이 공존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과 1:1과 같은 수적 비례와 사회 이상을 동일시하는 것에 대한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안정은 기득권 유지를 위한 이기적인 변명일 뿐이며 이를 위한 희생은 절대로 정당화될 수 없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는 이념적 평등이지 피라미드 구조를 기반으로 한 수치적 균형이 아니다. 균형이라는 명목하에 살인을 정당화하면서 끝까지 자신의 특권은 포기하지 않는 지배층의 이중적인 면모는 그들의 신념이 거짓되었음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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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설국열차(Snowpiercer)>, 2013

 

 

꼬리 칸 피지배층 사람들이 처참하게 대량학살당하는 장면이 있다. 여기서 나는 '총을 피할 수 있다'라는 믿음을 담은 패를 차고 우금치에 뛰어든 동학군의 전멸이 떠올랐다. 무지함으로 인한 안타까운 패배는 그저 약자의 한계에서 비롯되는 우연일 뿐일까?

 

"Happy New Year!"

 

어둠 속에서 학살을 행하기 전 생선의 배를 가른다. 다소 이해가 안되는 이 의식이 행해지는 이유를 이후 지배층이 초밥을 먹는 장면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한정된 자원과 공간을 가진 열차는 완벽한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존재하는 모든 것의 개체 수를 조절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개체 수가 한정된 생선을 먹는 행위는 인구의 변화가 일어날 때 예외적으로 허용되는 일종의 이벤트라고 볼 수 있다.

 

학살이 일어날 것임 알려주는 복선인 것이다. '물고기'는 사회라는 거시적 가치를 위해 개인의 희생을 요구하는(죽어도 관계없다는) 윌포드의 전체주의 입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오브제이다.  혁명조차 인구수의 균형을 위한 수단이었다.

 

 


파수꾼

"이리 떼가 나타났다!"


 

1970년대 대한민국, 군사정권은 전쟁으로부터 사회를 안정시키고 국민의 안전을 지키겠다는 명분으로 부당하게 권력을 잡았다. 그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들은 사회의 혼란을 야기하는 집단으로 간주하면서 국민들의 사상을 통제하고 억압했다.

 

또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쟁에 대한 공포심을 자극해 사람들로 하여금 개인의 자유보다 국가 안정을 우선시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이러한 군사 독재 정권 아래에는 권력의 하수인으로서 거짓 보도를 일삼던 언론인들이 있었다. 이들은 지식인임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윤리의식도 가지지 않은 채 자신의 이익과 당장의 안일함을 위해 권력의 굴복했다.

 

이강백의 소설 <파수꾼>은 우화적인 기법으로 권력층의 위선을 간접적으로 드러내어 국가 당면 과제를 앞세워 개인의 자유를 침해했던 1970년대 정치 상황을 비판한다.

 

거짓으로 공포감을 조성하여 마을을 통제하고 자신의 이익을 취하는 인물인 '촌장'은 당시 정부를 상징하고, 망루에서 존재하지도 않는 이리 떼가 몰려온다고 거짓을 외치고 양철 북을 두드려 대는 파수꾼 '가'는 당시 지배 이념에 대한 비판의식 없이 이를 확산, 증폭시킨 당시 지식인, 언론인을 반영한다. 한때 진실을 밝히려 했던 파수꾼 '다' 또한 촌장의 회유에 무너져 이리 떼가 나타났다고 거짓을 소리치며 소설은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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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고귀하게 희생된 거야."

 

'촌장'이 사회 안정을 위한 하수인들의 희생을 정당화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문장이다. 그는 이리 떼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거짓에 대한 책임은 무시한 채, 이를 통해 사람들이 단결했다는 효과에만 초점을 맞춰 주장을 펼쳐나간다. 하지만 주체적으로 판단할 권리를 박탈당한 상태에서 공정한 논의는 이루어질 수 없는 법. 번영, 공존, 자유와 같은 번지르르한 가치들을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할 근거로 가져오지만, 이는 대단히 상식적인 말로 비판의 여지를 제거하려는 더러운 수법이다.

 

고민하지 않고 받아들이길 유도하고 작은 의심이라도 가지면 윤리적 가치들을 모두 배반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방식이 마치 협박과 같다. 촌장이 주장하는 '거짓을 기반으로 한 단결'은 특정한 대상에 대한 무비판적 찬양을 요구하는 사이비 종교의 논리와 다를 점이 없다고 본다.

 

 

 

세뇌


 

“keep your place!”

 

영화 '설국열차'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대사이다. 양갱 요리사로 열차 한 칸 나아가게 된 인물, ‘폴’이 “여기가 내 자리잖아?”라며 바퀴벌레 양갱을 직접 먹는 장면은 절망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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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설국열차(Snowpiercer)>, 2013

 

 

무엇이 대중을 이토록 어리석게 만드는가. 오랜 시간 강력한 기득권을 유지하는 최고의 방법은 ‘세뇌’를 통해 특정한 신념을 주입하는 것이다. 북한의 김정일, 한국의 박정희를 겪은 세대들의 의식은 우리의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힘들 만큼 확고하다. 그 맹목적임은 마치 사이비 종교와 같아 합리적 사고의 불가능을 초래하는데, 이러한 세뇌 교육의 섬뜩함을 떠올리면 박정희 시대의 어린이였던 어머니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과거 박정희의 장례식 날 자신도 tv를 바라보며 엉엉 울었다고 하셨다. 굉장히 어렸을 때인데 어떤 감정으로 눈물을 흘린 것이냐 물으니 "그땐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다"라고 대답했다. 어린 시절의 작은 일부분이라 그녀의 전체 사상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지만 여전히 그때의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이렇듯 독재의 보편적인 정치 형태는 공포정치이며 세뇌를 전제로 행해진다. 설국열차에서 등장하는 유치원칸 또한 조기적인 세뇌가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꼬리 칸 사람들의 혁명적인 사건이었던 '7인의 반란'의 주인공들이 시체 더미를 1년의 한번 창밖에서 만날 수 있는데, 아이들은 이를 마치 동물원을 구경을 하듯이 바라보고 조롱한다. 이 열차의 구조에 순응하지 않으면 너희들도 저기에 놓이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윌포드는 열차 사회에 반항하다 ‘얼어붙은 7인’과의 경계를 강조하며 우리라는 말 아래 복종을 요구한다. 타자화를 통해 불안감 생성-> 그렇게 되지 않음에 안도-> 독재자를 찬양하게 되는 필연적인 정신적 구조를 탄생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불안의 대상은 허상일 뿐이었다. 이러한 수법은 소설 <파수꾼>에서도 등장한다. 사실 마을을 공격하던 이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실을 숨기고 있는 촌장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질서, 그것이 뭔지 알기나 하니? 그것은 마을을 지켜주는 거야.” 그는 윌포드처럼 사회의 질서와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불안’이란 감정을 상기시켜 집단을 길들인 것이다.

 

 

 

무비판적 태도와 무책임한 관심


 

설국열차와 파수꾼의 세계는 현실의 계급 구조를 압축한 사회의 단면이다. 극 중 상황과 인물들의 행동이 극단적이고 과장되어 보이지만 현실 세계를 되돌아보았을 때 모두 대입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구조 속엔 모순이 담겨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 때문에 비판이 결여된 질서정연한 사회는 이상이 될 수 없다. 균형이란 힘없는 사람들은 아래에 깔아져야 함을 전재하기에 자신이 피라미드의 일부가 되었다는 것에서 안정감을 느껴선 안된다. 당연하게 나의 위나 아래에 군림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한다.

 

우리는 무비판적인 권력 추종에 대한 비판의식을 가져야 하며 관심에도 비판을 기반한 책임이 필요하다. 권력 유지를 위한 이벤트에 동참하고 있진 않았는지, 근본적으로 같은 것을 추구하고 있을지 모를 양측 지배층의 쇼에 너무 흥분하진 않았는지, 진정으로 분노해야 할 대상에 분노했는지 차분하게 짚어볼 필요가 있다. 아니 뗀 굴뚝에 연기였을 가십과 거짓에 열정을 쏟기엔 세상에 소외된 차별들이 너무 많다.

 

 



[정다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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