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엇갈린 운명과 비극적 사랑을 향해 달려가는 발레 '오네긴' [공연예술]

글 입력 2020.07.31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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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첫 전막 발레를 관람했다. 보통 한 해가 시작되고 3월이나 4월쯤 첫 전막 발레가 열리면서 발레 공연이 시작되지만, 올해는 코로나 19로 인해 이례적으로 하반기라는 7월에 처음으로 전막 발레가 오픈되었다.

 

그래서 작년 12월 크리스마스이브에 본 <호두까기인형> 이후 처음으로 발레를 보러 충무아트센터를 찾았다. 정말로 오랜만에 보게 된 발레 공연은 유니버설발레단의 <오네긴>이었다. 공연장과 같이 다수의 사람이 모이는 공간은 굉장히 오랜만에 가보았는데, 생각보다 꼼꼼히 열 체크도 하고, 전자 명부를 발급받아 공연장에 입장했다.

 

발레 <오네긴>은 러시아 근대 문학의 아버지로 여겨지는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시로 쓰인 소설 『예브게니 오네긴』이 원작이다. 나는 작년 말 2020년의 버킷리스트로 『예브게니 오네긴』 소설을 읽고 이를 바탕으로 발레 공연을 관람하고 싶다고 계획을 세웠다. 4월쯤 소설을 읽었고, 지난 7월 18일 유니버셜발레단의 <오네긴> 공연을 관람함으로써 올해 버킷리스트 하나를 성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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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이 오르기 전에


 

발레는 거칠게 분류하자면 <잠자는 숲속의 미녀>, <백조의 호수>, <호두까기 인형>과 같이 화려하고 고난도 기술과 마임이 동원되는 클래식 발레, <봄의 제전>과 같이 전통적인 발레 문법에서 벗어나 새롭고 다양한 시도들을 선보이는 모던 발레로 나눠볼 수 있다.

 

<오네긴>은 드라마 발레의 대표작으로 불리는데, 드라마 발레의 특징으로는 클래식에서 사용되는 고난도의 기술보다 무용수들의 연기에 포인트를 두는 발레라고 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유니버설발레단의 <오네긴>은 드라마 발레의 대가인 안무가 존 그랑코의 작품이다.
 
<로미오와 줄리엣(1962)>, <오네긴(1965)>, <말괄량이 길들이기(1969)>등의 대표작을 남긴 존 그랑코는 발레의 연극적 요소를 중요시 여겨 그랑 파드되(고전발레 작품에서 주역 남녀 무용수의 2인무로 도입 춤, 2인무와 독무, 마무리 춤으로 구성)와 디베르티스망(이야기의 줄거리와 상관없이 볼거리를 위해 넣은 춤), 정형화된 마임을 과감하게 생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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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드라마적 요소를 강하게 부여하여 등장인물의 감정을 점프와 리프트를 사용해 빠른 템포에서 반복적으로 표현했다. 또, 인물의 감정 변화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고자 ‘스틸 포즈’를 사용했는데, 정지동작 기법을 통해 동작을 강조하고 감정을 집중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안무가의 의도는 섬세한 연기를 해내는 무용수들을 통해 효과가 극대화된다. <오네긴>은 스토리도 단순하고 기존의 발레 문법들을 생략했기 때문에, 발레 초심자가 보기에도 이해하기 쉬운 발레로 잘 알려져 있다.
 
또한 유니버설발레단의 문훈숙 단장은 공연을 시작하기 전에 <오네긴>의 간단한 스토리 라인을 설명하며 공연에 대한 관객들의 이해를 높인다. 문훈숙 단장은 때론 직접 발레 동작을 시범 보이기도 하며 오만함이 가득한 오네긴의 몸짓들과 몇몇 마임들을 선보인다. 또, 무대 속 소품들이 지닌 의미를 설명하며 극 흐름의 이해를 돕는다.
 
연극처럼 대사가 있지도, 뮤지컬처럼 노래가 있지도 않은 발레는 오직 몸짓으로 작품을 표현한다. 발레 언어가 익숙하지 않다면 관람을 해도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는데 미리 설명을 듣고 관람할 수 있어서 <오네긴>이라는 작품을 이해하는 데 훨씬 도움이 되었다.
 
 


엇갈린 운명과 비극적 사랑


 

<예브게니 오네긴>을 처음 읽었을 때, 굵직한 사건만 놓고 본다면 이야기가 정말 단순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발레로 구성했을 때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했다. <오네긴>의 줄거리는 매우 단순하다. 세상에 권태로움을 느끼는 오만방자한 젊은 귀족 오네긴과 낭만적인 사랑을 꿈꾸는 순진한 시골 소녀 타티아나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가 주요 줄거리이다. 그 외에 타티아나의 여동생 올가와 약혼자 렌스키의 파국까지 얽히며 두 주인공의 엇갈린 운명은 비극을 향해 달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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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네긴>은 총 3막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내용을 거칠게 요약하자면 이렇다. 1막에서는 러시아 여성들의 전통 놀이인 ‘거울 점’을 통해 오네긴을 본 타티아나는 사랑에 빠지게 되고, 꿈속에서 그와 함께 아름다운 사랑의 파드되(2인무)를 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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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막에서는 타티아나의 생일 파티가 열리고, 파티에서 타티아나가 오네긴에게 고백 편지를 준다. 하지만 오네긴은 타티아나의 눈앞에서 편지를 찢어버리고, 여전히 권태로움을 느끼며 새로운 유흥을 찾아 나선다. 오네긴은 친구인 렌스키의 약혼녀인 올가를 유혹하고, 올가는 오네긴의 장난을 즐겁게 받아준다. 올가와 오네긴의 모습을 본 렌스키는 오네긴에게 결투를 신청한고, 결투 중 렌스키는 오네긴의 총에 맞아 사망하고 만다. 오네긴은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깨닫고 자책하며 러시아를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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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막에서는 몇 년 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 오네긴이 그레민 공작부인이 된 타티아나를 만나게 되고 자신이 한때 거절했던 타티아나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 타티아나는 오네긴에 대한 감정이 남아있음을 깨닫지만, 현실을 생각하며 그가 보낸 편지를 찢고 영원히 떠나 달라고 말한다. 절망한 오네긴은 도망치듯 떠나고, 혼자 남겨진 타티아나는 엇갈린 운명에 울부짖는다.
 
 
 

무대를 완성하는 소품과 연출의 힘



<오네긴>은 다른 발레 공연들과 다르게 무대 속 소품들을 효과적으로 활용한다. 가령 1막 타티아나의 침실 안, 배경으로 활용되는 큰 기둥은 오네긴을 향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그레민 공작과 같은 상류사회 귀족과의 결혼을 의미한다. 타티아나가 상류사회에 진출한 후에 3막의 배경이 되는 화려한 금색 기둥은 시골 파티 배경인 2막의 기둥과 비교되며 상트페테르부르크와 시골의 공간성을 대조시키는 효과를 가져온다.

 
여섯 그루의 나무는 등장인물들의 심리상태와 운명을 암시하는 데 효과적으로 활용된다. 1막에서 푸른 잎이 풍성한 나무들은 낭만적인 사랑을 꿈꾸는 타티아나의 기대감과 설렘을 나타내고, 2막의 잎 없이 앙상한 나무들은 타티아나와 오네긴, 올가와 렌스키를 둘러싼 어긋난 사랑을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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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또한 극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로 등장한다. 1막 1장에서 타티아나가 ‘거울 점’을 보고 있을 때 거울은 오네긴을 비추었다. 이때 거울은 타티아나와 오네긴의 인연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보여줌과 동시에 타티아나가 오네긴과의 낭만적 사랑을 꿈꾸게 하는 계기가 된다. 또, 1막 2장 타티아나의 꿈속에서 거울을 통해 등장하고 퇴장하는 오네긴은 타티아나의 열망 섞인 바람이 만들어낸 오네긴임을 알 수 있다. 오네긴의 고백 편지를 받은 3막에서 타티아나는 거울을 보는데, 거울 속엔 오네긴이 아닌 남편인 그레민 공작이 자리한다.
 
거울과 같이 편지 또한 어긋난 운명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소품으로 사용된다. 2막에서 타티아나는 오네긴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편지를 전해주지만, 오네긴은 편지를 갈기갈기 찢어버린다. 반면 3막에서는 오네긴이 처절하게 구애하며 타티아나에게 편지를 건네지만, 타티아나는 고통스럽게 얼굴을 찡그리며 편지를 찢는다.
 
찢어진 종이를 다시 붙일 수 없듯, 타티아나와 오네긴은 어긋난 타이밍에 서로를 향해 구애하고 비극적 결말을 맞는다. 소품을 통해 수미상관적 통일감을 부여한 연출은 극의 분위기를 한층 더 고조시킨다.
 
 
 

타티아나와 오네긴에 빙의된 무용수들의 열연


 

드라마 발레에서 무용수들의 표정을 포착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화려한 기술과 다수의 무용수들이 만들어내는 대칭 구조적인 군무보다 주역 무용수들의 감정의 흐름에 포인트가 있기 때문이다. <오네긴> 공연의 막이 오른 충무아트센터는 앞쪽 좌석이 무대보다 낮게 위치하기 때문에 1열은 좋은 좌석은 아니다. 나는 일찍 예매해둔 덕분에 5열이라는 가깝지만 멀지 않은 자리에서 무용수들의 표정을 자세히 관찰하며 오네긴과 타티아나의 비극적 운명에 몰입할 수 있었다.

 
내가 생각한 <오네긴>의 관전 포인트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인물들의 성격이었다. 특히 1막과 3막에서 타티아나와 오네긴은 마치 완전히 다른 인물이 된 듯한데, 타티아나 역할의 손유희 발레리나와 오네긴 역할의 이현준 발레리노는 그 부분을 표정과 몸짓으로 섬세하게 잘 살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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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막에서 타티아나는 순진한 시골 소녀다. 낭만적인 사랑을 믿고, 첫사랑을 꿈꾸는 마음으로 오네긴을 향해 수줍게 고백한다. 천진난만한 타티아나는 손유희 발레리나의 손끝과 발끝에서 재탄생한다.
 
모든 것이 조심스러우면서도 세상의 아름다움만을 보고 사는 타티아나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이현준 발레리노가 연기한 1막의 오네긴은 세상에 염증을 느껴 매사에 건방지고 제멋대로인 남자로 등장한다. 오네긴은 타티아나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고, 타티아나가 읽는 책을 보고 가소롭다는 듯 실소를 날리기도 한다. 이현준 발레리노가 연기한 오네긴의 거만함과 무심함은 나쁜 남자 오네긴을 돋보이게 한다.
 
하지만 3막에서 인물들은 반전된다. 공작부인이 된 타티아나에게 천진한 소녀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손유희 발레리나는 언제 순진한 시골 소녀였냐는 듯 드레스를 빼입고 원숙한 모습으로 돌아온다. 타티아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던 오네긴이 그에게 마음을 빼앗긴 것은 타티아나의 변화된 모습 때문일까? 타티아나가 1막의 꿈속에서 다정한 오네긴이라는 이상적인 모습을 봤다면, 오네긴은 순진무구함을 벗고 우아하고 화려한 공작부인이 된 이상적인 타티아나를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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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떤 발레 레퍼토리든 감정이 격해지는 장면을 좋아한다. 특히 슬픔이나 분노 같은 부정적인 감정으로 등장인물의 감정이 최고조에 이를 때,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빨라지고 음성이 커지며 무용수의 몸짓은 격렬해진다.
 
<오네긴>은 오케스트라 없이 스피커 음향으로 차이콥스키의 선율이 들려왔지만 역시 등장인물의 심경에 큰 자극이 가해질 때마다 귀가 아플 정도로 음악 소리는 커졌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3막의 회환의 파드되와 이어지는 마지막 장면, 오네긴의 구애를 거절한 타티아나가 흐느끼는 장면이다.
 
오네긴에 대한 원망과 분노, 후회와 아쉬움이 터져 나온 타티아나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흐느끼며 무너지고 만다. 그 절절한 마음을 끝으로 무대의 막이 내리는데, 사랑을 모두 잃은 절망적인 마음이 잘 와닿았다. 손유희 발레리나의 가녀린 어깨가 세차게 흔들렸고, 그가 오열하며 관객석을 향해 두 손을 뻗고 막이 내릴 때 전율과 함께 여운은 짙었다.
 
 
 

막이 내린 후에



공연을 보고 나서, 공연을 보기 전에 샀던 프로그램북을 다시 보면서 공연의 포인트를 되새겼다. 프로그램북엔 공연 시놉시스부터 공연 중 사용된 음악, 유니버설발레단 단원들의 공연 연습 사진, 발레 감상 포인트에 대한 설명, 주역 무용수의 인터뷰 등 다양하고 알차게 구성되어 있었다.

 

책을 읽고 발레를 관람했던 나에게 발레 공연은 여러 감각을 확장 시켜주었다. 책으로 읽었을 때 늘어졌던 서사들은 압축적으로 무대 위에 올려졌고, 오네긴과 타티아나, 올가와 렌스키의 감정들은 섬세한 몸짓으로 무용수들의 손끝에서 피어났다.
 
발레에서 발레리노가 무릇 그러하듯 발레리나에게 사랑을 맹세하지 않고 오히려 고백한 여성을 거절한 뒤 다시 자신이 구애한다는 점에서 오네긴은 뻔뻔하고 신박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특유의 오만방자함으로 사랑하는 여성은 물론 절친한 친구마저 잃고 말았다.
 
한편으로는 <오네긴>에 만연해있는 ‘사랑’의 감정에 대해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타티아나가 오네긴을 마음에 품고 용기 낼 수 있었던 힘도, 렌스키가 친구 오네긴과 결투를 하여 죽음까지 불사했던 일도, 오만방자하던 오네긴이 자존심을 버리고 자신이 거절했던 타티아나에게 매달릴 수 있었던 이유도 모두 똑같은 ‘사랑’이라고 설명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다면적인 감정을 너무 납작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우리는 사랑이 모든 행동의 동기가 되는 세상에 살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오네긴>을 통해 사랑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어진다. 모두 같은 ‘사랑’이라고 부르지 않고 각각의 사랑에 이름을 붙여주고 싶다. 오네긴을 향한 타티아나의 낭만 속 이상적 동경, 올가를 향한 소유욕과 체면 꺾인 렌스키의 집착, 뒤늦은 깨달음과 회환으로 타티아나에게 처절히 매달리는 오네긴의 절박, 첫사랑의 감정을 간직했지만 성숙한 어른으로서 현실적인 선택을 내릴 수밖에 없는 타티아나의 괴로움.
 

어그러진 시간 속에서 입체적인 감정들은 한데 뒤엉켜 운명을 뒤흔들고 비극적인 결말로 인물들을 이끈다. 발레 <오네긴>은 비극적 ‘사랑’으로 달려가는 순간의 감정들을 포착해 드라마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 모든 사진의 출처는 유니버설발레단 인스타그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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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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