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기꺼이 '불편함'을 표출해볼 것 [문화 전반]

글 입력 2020.07.31 17:16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5c482a982600007001faeda2.jpeg

 

 

언젠가, 부모님은 나에게 어른이 되어갈수록 삶과 일상에 무뎌져 갈 거라고 말씀하셨다. 세상에는 마땅히 분노하고 슬퍼해야 할 일이 많지만, 어른이 되는 것은 그 모든 것에 지쳐가는 일과 같다고 덧붙이시면서 말이다.

 

그러나 20대와 30대 사이 어디인가에 서 있는 지금, 나는 여전히 ‘불편함’을 느끼고 있다. 저녁 뉴스를 채우는 수많은 범죄 소식들, 그 중에서도 가해자와 피해자가 교묘하게 바뀌어 가는 신물나는 세태가 내 불편함의 주된 이유다.

 

30여 년 전, 전국에 생중계되었던 어느 탈주범의 울부짖음이 이따금씩 떠오르고는 한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아니, 아주 극단적으로 얘기하면 ‘여성유죄, 남성무죄’일지도. 2020년의 대한민국, 도대체 무엇이 얼마나 바뀌었던가.

 

 

다운로드.jpg

 

 

지난 가을, 여성 인권 문제에 대해 진화해가는 미디어의 시선을 오피니언의 주제로 다루었던 적이 있다. 당시 글에도 적었었지만, 나는 그 때 분명 희망을 보았었다.

 

작년 하반기, 영화 <82년생 김지영>을 필두로 메인 미디어에서는 점진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오랜 세월 미디어에서 공고히 유지되었던 여성의 이미지들이 서서히 깨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미디어를 시작으로 우리 사회에도 수많은 긴즈버그(*미국 최초의 여성 대법관. 미국의 양성평등 의식을 크게 끌어올린 장본인이다.)들이 활약할 수 있기를, 여성이 불안하게 살지 않을 사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랬다.

 

하지만 해가 바뀐 지금, 우리 사회 여성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내 기대감은 실망으로, 혹은 좌절으로 손쉽게 상해버리고 말았다. 유명 정치가들의 성범죄가 저녁 뉴스 메인으로 하루가 멀다시피 보도되었다. 연예인과 공직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익명의 비밀 채팅방에서는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만큼 끔찍한 미성년자 대상 디지털 성범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세계 최대 포르노 사이트를 운영했던 핵심 주축 또한 한국인이었다.

 

하나같이 믿기지 않는 사건들이었다. 당연히 세상은 들끓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최소한의 의식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다 함께 분노했고, 범죄를 저지른 장본인들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하지만 법은 사람들이 든 분노의 횃불 앞에서도 코웃음을 쳤고, 납득되지 않는 재판 결과들이 이어졌다. 그러자 금세 세상은 무기력의 소용돌이로 빠져 들어갔다. 아무리 애를 써도 사회는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성별에 따른 카르텔은 더욱 공고해질 뿐이었다.

 

어떤 가해자는 사과없이 세상을 등지는 방법을 택했고, 어떤 가해자는 비교적 솜방망이 같은 처벌 앞에서도 항소를 택했다. 또 어떤 가해자는 스스로를 ‘악마’로 지칭하며 희대의 허언을 남겼으며, 어떤 가해자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그럴듯한 이유로 미국으로의 송환을 피하기도 했다. 그동안 피해자들은 점점 더 궁지로, 더 궁지로 몰려질 뿐이었다. 혹자들은 그녀들을 ‘꽃뱀’이라고도 했다. 또 ‘범죄를 당할 당시에는 왜 침묵했느냐’며 비난하기도 했다. 그렇다. 정의는 이제, 이토록 희미해졌다.

 


j1n4xbd4u7u2tem7msy8.jpg

 


그러나 우리, 이대로 목소리를 잃어야만 하는가? 누군가 이와 같은 질문을 나에게 한다면,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소리를 낼 것’이라고 대답하겠다.

 

2020년의 우리 사회가 보여주는 여성 인권은 믿기 힘들 정도로 후진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우리 다음 세대의 여성들 또한 필연적으로 이 사회를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을 위해,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사회의 모습을 물려줘야 하지 않겠는가? 여성들의 ‘숨 쉴 틈’을 조금이라도 넓혀야 하지 않겠는가?

 

2020년 세계경제포럼이 공개한 성 격차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성평등 지수는 전체 153개국 가운데 108위에 불과하다고 한다. 유엔개발계획이 발표한 성 불평등 지수는 더욱 심각하다. 189개국 중 111위다. 물론, 2020년 오늘날의 얘기다.

 

누군가 시련은 더욱 ‘우리’를 강하게 한다고 했던가. 나는 바로 지금이, 그 말의 위력을 보여줄 가장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최근 온라인에 게재된 한 논평의 제목을 빌려, 더 늦기 전에 ‘고통스럽지만 단호하게’, 가장 민주적인 방식으로 남성에게 쏠린 권력을 분산시켜야 할 때다. 적어도 10년 뒤에는 저 불행한 순위가, 조금이라도 바뀌기를 염원하면서 말이다.

 

 

 

네임택.jpg

 


[김현지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4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