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여행의 이유 - 떠남으로써 얻는 것에 대하여 [도서]

나는 왜 떠나는가? 그리고 왜 다시 돌아오는가.
글 입력 2020.07.31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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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 작가의 <여행의 이유>, 이 책은 작년 여름 친구와의 베트남 여행이 코 앞으로 다가온 어느 날 처음 읽게 되었다. 짧은 휴양을 앞두고 있는 만큼 설레는 마음에 '바캉스 에디션 표지'가 더욱 불을 질렀다. 그때가 7월이었으니 그로부터 정말 딱 1년이 지났다. 매해 돌아오는 여름은 늘 뜨겁고 눅눅하게 닮은 얼굴을 하고 있는데, 올해만 큼은 모두가 알다시피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

 

살을 부대끼고 뜨거운 입김을 내뱉으며 자유롭고 마음 편히 떠날 수 없는 요즘인지라, 답답함에 더욱 불어나는 여행에 대한 갈망을 붙잡아 둘 수 없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으니, 오랜만에 다시 이 책을 꺼내어 보았다. 한 보따리 짐을 싸 들고 태양 아래로 몸을 던지고 싶은 욕망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달랠 수 있다면 달래고자 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책의 제목만으로도 '인간은 왜 떠나는가, 그리고 나는 왜 떠나는가'에 대해 많은 생각이 든다. 떠나는 행위가 시사하는 바는 무엇이며, 이 행위를 통하여 궁극적으로 나는 무엇을 얻는가에 대한 답이 담겨 있을지 기대가 가득한 마음으로 책장을 넘긴다.

 

<여행의 이유>를 처음 펼쳐보았던 그때나 지금이나 가장 인상 깊고 흥미로운 대목은 '상처를 몽땅 흡수한 물건들로부터 달아나기'이다. 서두부터 무릎을 탁 치게 만든다.

 

 

모든 인간에게는 살아가면서 가끔씩은 맛보지 않으면 안 되는 반복적인 경험이 있을 것이다. … '약발'이 떨어지기 전에 이런 경험을 '복용'해야, 그래야 다시 그럭저럭 살아갈 수가 있다.

 

- <여행의 이유> 55p

 

 

작가에게는 '약발'을 채워주는 경험이 바로 호텔에 가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호텔에 가는 것이란 곧 여행 자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아주 낯선 곳으로부터 배척당하지 않고 스며드는 것. 그리고 곧 다시 떠나는 것. 그 무엇도 내게 '감당해야 할 거리'를 짊어지게 하지 않는다. 우리가 늘 머무르는 공간인 집은, 그리고 집 안의 모든 물건은 나와 관계된 기억과 시간과 상처를 온몸에 가득 지니고 있다. 삶의 흔적으로 둘러싸인 곳에 지쳐갈 때 어떤 타인의 흔적도 심지어는 나의 흔적조차도 존재하지 않는 그야말로 '무'에 가장 가까운 공간인 호텔을 전전하는 순간이 오히려 가볍고 후련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이쯤 해서 나의 여행에 관한 기억을 몇 가지 꺼내어 볼까 한다. '여행'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가족과의 제주도 여행이다. 그 이전에도 가족끼리, 혹은 학교에서 친구들과 함께 놀러 간 적이 꽤 있지만 묘하게도 그 해 여름의 제주도 여행이 가장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있다. 온 가족이 함께 모여 며칠에 걸쳐 멀리 떠나는 일은 사실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기에, 더욱 인상 깊었는지도 모른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 스물한 살이 되던 겨울에는 대만으로 첫 해외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온갖 낯선 것들로 가득한 시야가 어찌나 짜릿하고 신이 나던지, 그때 처음으로 느껴본 해방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이 행복하고 즐겁기만 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떠난 해외로의 여행은 바로 작년 여름의 베트남이었다. 여행을 함께 떠나는 일행에 따라 새로운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값진 시간이었다. 관광객을 노려 지갑을 채우려는 장사치 택시 기사를 제외하고는 그야말로 텅 빈 새벽의 공항, 잠에 빠져 있던 고요한 새벽 4시 호텔 전체에 쨍하게 울려 퍼진 비상 대피 사이렌, 체기에 가득 눌려 고생을 한 가득하게 만든 클럽 샌드위치 등 유독 피곤하고 놀랄 만한 일이 많았던 여행이었으나 돌아보니 친구와 함께라서 두렵지 않았던, 도리어 그리움에 여러 번 꺼내어 보게 만드는 추억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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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그렇게 일상을 잠시 잊고 새로운 것들로 가득 찬 세계로 나를 끌어들인다. 그곳에서 나는 실수해도 괜찮고, 그래서 바보 같아 보여도 괜찮다고 생각하게 된다. 늘 여유롭고, 반듯하고, 단정하고, 서투르지 않으려는 노력을 해도 내 이상향에 닿을 수 없었던 팍팍한 현실이 반대로 꿈이 되어 날 괴롭게 하지 못한다. 그것을 처음 경험했을 때, 정말 희열로 벅차올랐다. 온전히 나 자신으로 산다는 것이 이런 느낌이구나. 나와 내 삶에 아무나 관여하도록 방치하거나, 심지어는 스스로를 다그치고, 억압하지 않아도 완전할 수 있구나. 누구도 나를 이상하게 보지 않는구나. 그렇게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여행을 많이 해본 사람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안 되는 작은 경험들을 고이고이 간직한 채 그 기억으로 연명하는 날이 있다. 여행이란 참 이상하다. 자칫 비뚤게 보면 도망치는 꼴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돌아오는 길에는 언제나 희망과 의지의 연료를 가득 채운 채 귀환한다. 어쩌면 '상처를 몽땅 흡수한 물건들로부터 달아나는' 여행이란 비겁한 일이 아니라 오로지 나 자신을 위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내 자리를 잠시 떠남으로써 역설적으로 내가 있을 곳을 지키는 일. 나는 그렇게 나와 내 하루와 내 삶을 버티고, 이어 나가기 위해 때때로 잠시 자리 비우기를 선택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꼭 자가용을 타고, 버스를 타고, 비행기를 타고, 산을 넘고, 강을 건너고, 심지어는 대륙과 바다를 뛰어넘어야지만 여행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앞서 내가 무릎을 치게 만들었던 대목, 어떤 경험을 '복용'하여 '약발'을 유지하는 일이 내게는 분명하게 하나가 더 있다. 바로 공연장에 가는 것이다. 현실로부터 단절되어 사위가 어둠으로 가득한 공간이, 드넓은 세상에 비하면 아무리 커봤자 손바닥만 할 그곳이 내게는 '무언가를 버리고, 또 다른 무언가를 채우는' 약속된 장소였다.

 

앞서 말했던 여행과 공연장으로 가는 것의 공통점은 나도 몰랐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에 있다. 처음으로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콘서트를 보고 온 나는 다각도의 충격을 받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때 나를 놀라게 것 중의 하나가 바로 해방감이었다. 공연 내내 나는 늘 주저하고, 숨어있느라 굽어 있던 허리를 펴고 있었다. 작은 목소리를 가진 나를 두고 무례한 사람들이 악의 없이 나를 공격할 때 조차도 내지 못했던 큰 소리를 내며 수 천명의 관객이 만들어내는 파도에 몸을 맡겼다. 벅차서 눈물이 났고, 그런 내가 이상하고 바보 같아 보이지 않았다. 누가 이런 나를 보아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자 이곳에서 만큼은 '진짜 나'를 만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나의 주변인들은 잘 알다 못해 질릴 정도로 콘서트는 '최소한' 일 년에 두 번은 가야 한다고 주장하며 매 학기 방학이면 서울의 공연장으로 향했다. 책 속 언어를 빌려 말하자면 '약발'을 보충하기 위한 경험을 '복용'하러 가는 것이다. 나에게 그 길은 늘 여행과도 같이 '떠나는' 일이었다. 나를 괴롭게 하거나, 나의 존재를 지우는 현실을 잠시 뒤로한 채 잊고 있었던 것들을 채워오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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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적이고 지리적인 여행이든 아니면 개념적으로 '여행 같은 여행'이든지 간에 떠나는 행위는 나를 불안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안정시킨다. 그 이유는 내가 돌아올 곳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현실은 아주 가혹하지만 숨 쉴 구멍 정도는 일 인당 몇 개쯤 주어지는 모양이다. 잠시 자리를 비우고 꽉 막힌 숨을 뱉어냄으로써 삶의 활력을 되찾고 더 나아가 자존을 쌓는다.

 

어쩌면 내가 계속 떠나고 싶었던 것은 매너리즘으로부터의 탈피를 원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반복되는 잔잔하고 평온한 일상에 돌을 던져 파동을 타고 싶은 순간,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해 이유 없는 의심이 드는 순간이면 늘 자리를 박차고 나서 홀연히 떠나버리고 싶었으니까. 그런 마음들이 때로는 부채처럼 남아 혹시 이게 도망치는 것은 아닐까 나를 짓누르기도 하지만, 내 삶에서 한 발짝 멀어져 이른바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내가 주인공인 한 권의 소설을 넘겨보는 일은 꼭 필요한 것 같다는 생각이다. 그 방식이 내게는 여행이었을 뿐이다. 모든 것이 뒤로 지나 공허함만 남은 앞을 보면 막막하지만, 내가 어디로 달려가고 있는지 그 자리를 떠나 잠시 확인하고 돌아오면 '두 번 다시 겁내기'를 쉽게 포기하게 된다.

 

나를 돌아보고, 내 하루를 돌아보는 일. 그럼으로써 다시 그곳으로 덤빌 용기를 캐내는 일. 그래서 나는 어디로든,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주 버리거나, 아주 채운 뒤 다시 내 자리로 돌아온다. 그럼 아주 충분한 삶이라고, 착각이어도 좋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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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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