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겨우 이런' 범죄는 없다 - '우리에게는 참지 않을 권리가 있다' [도서]

글 입력 2020.07.27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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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역 살인사건, 82년생 김지영, 사회 각기 각층에서 봇물 터지듯 밀려 나온 미투 고발 운동, 버닝썬과 N번방, 그리고 최근 박원순 서울 시장의 성추행 가해 의혹까지. 이 많은 사건들로 대한민국이 시시각각 시끄러워질 때마다 누군가는 분노하고, 누군가는 체념하고, 누군가는 혀를 차고, 누군가는 외면했다. 처음은 소란해도 마지막으로 치달을수록 관심은 떨어지기 마련이라는 말로 돌파구를 찾는 가해자들도 생겨났다.

 

‘당신의 딸이나 여동생이 이런 피해를 당해도 가만히 있겠는가?’라는 물음으로 사건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에게 심각성을 강조하려는 사람들도 있다. 흥미롭다. 피해 사실을 중차대한 범죄로 여기지 않는 상대가 남성인지, 여성인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도 자연스럽게 상대를 남성으로 가정하게 된다는 것, 그리고 남성이 성폭력 및 성희롱 피해자가 될 확률보다 그의 가까운 여성 지인이나 가족들이 피해자가 될 확률이 큼을 전제하는 것이.

 

살면서 성희롱이나 성추행을 당해보지 않은 여성을 찾는 것이 더 어렵지 않을까, 싶다. 통근이나 통학을 하는 만원 지하철 내에서, 공공장소의 계단이나 에스컬레이터에서, 학교나 직장에서 등등, 생각보다 성추행과 성희롱은 빈번하게 일어난다. 나 역시 경험이 없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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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나 불법촬영 카메라가 숨어있지는 않을지 마음을 졸여야 하는 것이 여성의 현실이다. 여자 화장실에 유독 많이 뚫려있는 구멍들을 보고 안심할 수 있는 여성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에스컬레이터에 오를 때나 계단을 오를 때 혹시나 치마 밑을 촬영하지나 않을까 불안해하며 가방으로 허벅지를 가리는 것을 보고 ‘볼 것도 없는데 유난 떤다’고 조롱하는 사람도 존재한다.

 

죽음으로 지울 수 있는 죄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면목이 없어 세상을 등진다는 핑계는 본인의 죄로 인해 볼품없이 엉킬 미래와 현재, 그리고 과거에 책임질 수 없다는 비겁한 도주일 뿐이다. ‘죽으면 그만’이라는 무책임한 선언과도 같고, 이 결심 안에 피해자를 향한 속죄나 배려는 한 글자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가해자로 하여금 삶을 포기하게 만들었다는 죄의식이 피해자를 옭아맬지도 모르는 최악의 선택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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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세상은 가해자에게 관대하고 피해자에게 야박하다. 가해자가 죽음을 선택하든, 합당한 처벌을 받든 가해자를 동정하거나 피해자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존재한다. 피해 사실을 발화하고 감정을 토로해야 할 첫 번째 사람은 늘 피해자여야 하지만 이상하게 우리 사회는 가해자를 향한 귀를 더욱 쫑긋 세우는 게 아닌가 싶다.

 

‘우리에게는 참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직장 내 성희롱 피해자 유새빛씨가 성희롱 사건과 맞서 싸웠던 100일 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토록 자세하고 현실적인 수기가 또 있을까, 싶은 책이었고, 그만큼 이 책을 엮어내기 위한 시간들이 고되었을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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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잡스

 

 

책을 읽으며 가장 많이 했던 생각은 ‘과연 내가 이 상황에 처해있었어도 저자처럼 행동할 수 있었을까?’였다. 대충 피해 사실을 외면하고 흐지부지 넘기게 되지는 않았을지, 혼자 고민만 하다가 결국 ‘이 역시 사회생활이다’라는 핑계로 덮어두지는 않았을지 고민이 되었다.

 

한편으로는 이런 고민을 피해자가 해야 한다는 사실에 환멸도 느꼈다. 피해를 당하고, 적절한 절차를 밟아 고발하고, 가해자는 적정한 처벌을 받은 뒤 피해자와 대면할 수 없도록 사후조치를 취하는 과정들이 현실에서는 꿈만 같은 일이라는 점이 아득하기만 했다.

 

 
“제삼자의 입장에서는 ‘쟤가 이상한 사람 아닌가?’, ‘쟤가 사건을 만들고 다닌다’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말이죠. 이미 새빛씨가 성희롱을 두 번 당했다는 것에서 의아해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이 얘기를 들었을 때 ‘또?’라는 식으로 반응할 수 있죠.” (81쪽)
 


아마도 그 ‘제삼자’들은 ‘성희롱을 두 번 당한 사람’이 아니라 ‘대수롭지 않은 애정표현을 구태여 두 번이나 고발한 예민한 사람’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닐까. 피해자가 예민한 것이 아니라, 가해자와 방관자들이 둔감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꽤 많은 사람들은 가해자의 편에 서서 피해자의 순수성과 진실성을 재단한다.

 

성희롱과 성폭력은 가해자의 의도와 상관없다는 말을 모든 성희롱 성폭력 예방교육에서 다루지만, 현실에서 성희롱의 정의는 조금 다르다. ‘피해자가 불순한 의도를 가진 행동’이어야 하는 듯하다.

 

책을 읽는 내내 저자분이 100일 간 느꼈을 고통이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어렴풋 사내 성희롱 사건이 발생하면 가해자보다 피해자가 먼저 퇴사를 하거나 일이 일단락 된 후에도 2차 가해와 죄책감으로 정신과 상담을 받는 일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자세한 수기를 읽어보니 피해의 규모가 상상 이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막상 그 사람 징계받는다고 하니까 내가 더 눈치 보이고... 며칠 전에는 상무님이 감경해달라고 전화했어. 직책자들이랑 최차장님이랑 친한 사람들이 나 싫어할 것 같고 그래. 또 말은 안 하더라도 내가 신고한 걸 유난 떤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아. 나를 도와주시는 고마운 분들도 있는데, 뒤에서 내 욕하는 사람도 있고 그래.” (175쪽)


 
“내가 봤을 때는 본인이 편견이 있는 거 같아. 피해자가 피해를 안 보고 보호를 받아야 하는데 본인이 보호를 못 받았다? 보호 기준이 뭘까? 난 너한테 선택지를 줬어. 나는 사회생활을 많이 해봤으니까 소문이나 힘든 상황은 분명 일어날 상황이란 걸 알고 있었어.” (199쪽)
 

 

피해자는 몇 번이고 피해 사실을 되짚어 이야기해야 하고, 2차 가해와 비난, 죄책감까지도 온전히 피해자의 몫이라는 것이 씁쓸했다. 특히 ‘고작 이런 일’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느냐는 말에는 무력감도 느껴졌다. 흐지부지 스쳐 간 많은 성범죄들이 수면 밑에 침잠할 수 있었던 핑계도 그러한 맥락이었기 때문이다.

 

 
내 친구를 포함하여 ‘겨우 이 정도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개인의 기준으로 성희롱의 무게를 논하지 말아달라고. 침해된 권리를 회복하기 위한 피해자의 적극적인 노력을 유별나다고 생각하지 말고, 당연하게 여겨달라고. ‘겨우 이 정도로 신고를 해?’가 아니라 ‘원래 이 정도도 문제가 돼!’라고 생각해 달라고. (245쪽)
 

 

책에서 가장 공감을 했던 부분이다. 더 이상 ‘그래도 되는’ 문제들이 생겨나지 않기를 바라고, 가해자가 동정 받는 상황이 펼쳐지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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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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