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여전히 그 날 안에 있는 당신에게 [도서]

시골 생활 풍경
글 입력 2020.07.19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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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면 떠오르는 사람이 한 명 있다. 바로 Y이다.

 

Y 하고 만나면 늘 똑같은 레퍼토리가 반복된다. 술 혹은 밥집에서 만나 배를 채우면서 있었던 이야기를 되풀이하는 것이다. 만나서 과거 얘기만 해서 그런지, 간혹 우리는 현재 서로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까 하고 의구심이 생기기도 한다.

 

Y는 항상 나를 만나면 그때 일을 꺼냈다. 처음으로 사귄 애인이 바람을 피워 울면서 나를 찾아왔던 일을, 마치 이제 다 잊었고 그건 그저 하나의 사건일 뿐이라는 태도로 말한다. 그리고 나는 Y의 그런 태도에서 아직도 지난날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구나 하고 느낀다. 아직 과거에 붙잡혀 있구나. 열일곱 살, 놀이터에 앉아 펑펑 울었던 Y를 기억해서 그런지 아니면 만날 때마다 그 일을 반복해 말하는 Y 때문인지 잘 모르겠는 요즘. 아주 우연찮게, 이 책을 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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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공간 속에서 : 텔일란



 

사랑, 상실, 외로움, 갈망, 죽음, 욕망, 그리고 황량감 등. 내 작품은 뭔가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 아모스 오즈

 

 

『시골생활 풍경』은 여러 단편 소설로 묶여져 있는 책이다.  중 <다른 시간, 먼 곳에서>를 제외하고 모두 텔일란이라 작은 마을에서 이야기가 벌어진다. 이야기가 이어지거나 그러진 않지만, 한 작품에 주인공으로 등장했던 인물이 다른 단편 소설 안에서 조연으로 등장하는 등, 서로 겹치는 부분들이 있어 인물들을 따라가며 읽기도 좋았다.

 

소설 속 내용은 참으로 일상적이다. 어떤 사건이 크게 터지거나 그러지 않는다. 그저 어디에서나 볼 수 있고 일어날 수 있는 평범한 일상 이야기가 담담하게 그려져 있을 뿐이다. 그러나 텔일란에 사는 사람들, 소설 속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저마다 아픈 사연이나 비밀, 그리고 두려움을 한 가지씩 가지고 있다. 그중 기억에 남는 소설은 <친척>이다.

 

 

 

외로움과 성장


 

<친척>에 나오는 길리는 짧은 잿빛 머리에 네모난 무테안경을 낀 엄격한 외모의 여자로 묘사되어 있다. 묘사만 봐도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 따듯하고 친절한 인물로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추운 겨울날 집까지 태워다 주겠다는 버스 기사의 말에도 그냥 혼자 걸어가겠다고 말하며, 절대 타인에게 곁을 내주지 않는 그녀가 유일하게 곁을 허락한 인물이 있었다. 조카인 기드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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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척>의 첫 장면은 한겨울 거리 위에서 길리가 조카 기드온을 기다리는 모습으로 시작된다. 그녀는 집에서 휴대폰을 놓고 올 정도로 허겁지겁 버스 정류장으로 나와 기드온을 기다리지만, 길리의 기다림은 소설이 끝나는 순간까지도 지속된다. 끝이 없다. 둘이 만났는지 어떻게 되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소설은 이미 끝났고, 소설이 끝나는 순간까지도 길리는 기드온을 기다렸기 때문이다.

 

기드온이 마을로 오는 버스에서 잠이 들었을까 봐, 정류장을 잘못 내려 길을 잃고 헤매고 있을까 봐, 낯선 곳에 도착했는데 돈이 없어 움직이지 못하고 있을까 봐 등. 길리는 기드온을 기다리며 끊임없이 그가 왜 아직 오지 않았는지 생각한다. 기드온이 길리를 만나러 가겠다고 확실하게 말하지도 않았는데, 길리는 기드온이 올 거라며 거의 확신했다.

 

길리는 혼자 살고 있는 미혼의 여성이다. 그녀의 집은 침묵만 깔린 듯 적막했다. 그리고 그런 공간에 어느 날 기드온이 들어오게 된다. 기드온은 밤이 되면 장난감 캥거루를 분신처럼 껴안고 자는 아이였다. 장난감을 안고 자는 모습은 그 나이에 맞는 애 같았지만, 혼자 있는 걸 무서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에서 어린애답지 않은 아이였다. 그런 기드온의 모습에서 길리는 동질감 같은 걸 느낀다. 기드온이 자신과 같은 고독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그 생각을 비롯하여 길리는 기드온에게서 위로를 받게 된다. 자신과 비슷한 타인에게서.

 

길리가 기드온을 의지하고 그에게 동질감을 느낀 것엔 기드온의 행동도 한몫했다. 기드온은 엄마에게 혼날 때나 중요한 시험이 있을 때면 어김없이 길리에게로 왔다. 그래서 아마 길리는 자신이 기드온을 의지하는 것처럼 기드온도 자신을 의지하고 있을 거라 생각한 듯싶다. 말을 안 들어 길리가 무차별적으로 자신(기드온)을 때려도, 기드온은 결국 다시 길리에게 돌아왔으니 말이다.

 

하지만 어른이 된 기드온은 달라졌다. 길리의 외로움과 달리 기드온의 외로움은 지속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기드온과 달리 길리는 여전히 캥거루 인형을 껴안아 잠들고, 함께 체커 게임을 했던 어리고 고독한 어린애를 기다리며 소설은 끝이 난다.

 

 

 

위로의 말 없이 위로하고 있는


 

<친척>뿐만 아니라 수록된 단편 소설은 모두 하나같이 뭔가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아내와 헤어지고 아이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진 채 도시에서 시골로 내려와 노모와 함께 살아가는 <상속자>, 전 국회의원 케뎀의 입을 통해 정치인들의 형태를 간접적으로 비판하며 같이 살고 있는 아랍 청년 아델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이스라엘과 아랍 사이의 분열 문제를 건드리는 <땅 파기>, 인기 있고 권위 있는 지위를 가졌지만 아내 나바와의 사이에 풀리지 않는 문제를 가지고 끝없이 걸어가는 <기다리기>, 서른 살 이혼녀를 사랑하는 17세 소년의 심리가 담긴 <낯선 사람들>, 십 대 아들의 자살 이후 겉으로 활발하게 친교 활동을 하는 부부를 바라보는 친구의 시선이 담긴 <노래하기> 등. 이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작가 아모스 오즈가 서문에 했던 말이 절로 떠오를 것이다.

 

"사랑, 상실, 외로움, 갈망, 죽음, 욕망, 그리고 황량감 등. 내 작품은 뭔가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이 말을 다르게 해석하면, 텔일란이라는 공간 안에는 뭔가를 잃어버린 사람들만 있다는 뜻이 된다. 꼭 평범해 보이지만 저마다의 사연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우리의 이야기 같지 않은가.

 

소설에는 위로나 격려를 해주는 말 따윈 없다. 하지만 나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을 보며 위로를 얻는다는 말처럼, 이 소설을 읽으면 절로 위로받은 느낌이 든다. 그러니 나는 이 책을 Y에게, 여전히 그 날 안에 있는 당신에게 보내주고 싶다. 여기 이렇게, 평범해 보이지만 아픈 사람들이 있다고, 그러니 당신도 힘내라는 말을 건네주고 싶다.

 


[김승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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