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짝사랑 연대기] 5장 : 타인의 글을 피드백 해줄 때 주의해야 할 점

피드백은 ‘지적’이 아니다.
글 입력 2020.07.05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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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5장을 꼭 써야하는 이유


 

글짝사랑 연대기 제 4장에서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글을 쓰면 좋은 점에 대해서 다뤘다. 그렇다면 이번 5장에서는, 다른 사람들과 글 스터디를 할 때 ‘주의해야 할 점’에 대해서 필수적으로 쓸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특히, 타인의 글을 읽고 피드백을 줄 때 조심해야 할 부분에 대해서 말이다. 스터디를 하면서, 내가 피드백을 줘야할 때 나는 한 고민 앞에 멈춰서야 했다. 바로 이 질문이었다.

 

 
‘작가에게 도움이 된다면,
혹독한 피드백을 줄 필요가 있는가?’
 

 

지금의 나는 이 질문의 답을 안다. 하지만 스터디를 하던 초반에는 이 질문의 답을 몰랐기에 항상 고민을 했다. 이번 글에서는 그 답을 내가 내리기까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쓰도록 하겠다.

 

 

 

위플래쉬는 신화에 가까운 이야기다.


 

스터디 내에서도 이에 대한 고민이 공유 된 적이 있었다. 우리 스터디원들은 너무 착하고, 일원 자체가 모두 친구로 이뤄져 있다 보니 작품에 대한 좋은 말만 해주는 것 같다고 말이다. 이러다가는 우리 스터디가 소꿉놀이처럼 될 수 있지 않겠나에 대한 의견이 여러 차례 나온 적도 있었다.

 

주인공의 실력을 100% 이상으로 끌어내기 위해, 교수가 광기 넘치는 과도한 교육을 시키는 시나리오인 영화 <위플래쉬>를 봐도 관객들의 평은 엇갈린다. 저 정도의 밀어붙임이 있었기에 주인공이 재능을 활짝 필 수 있는 것이 아니겠냐는 평도 꽤 보인다. 하지만 나는 저 이야기는 일종의 ‘신화의 영역’이라는 것을, 신화처럼 극적이기에 영화가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런 교육이라 이름 붙여진 학대 앞에서 자신의 재능을 스스로 짓밟고 떠나게 되어 있다. 주변에서 글을 쓰는 사람들이 얼마나 마음이 쉽게 꺾이는지를 실제로 봐왔기에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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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런 마음이 한번 꺾이면 글을 다시 쓰게 되는 일을 거의 희박하다.

그런데 그렇게 의욕을 상실하게 만드는 건 내 피드백 한 마디일 수도 있다.

 

스터디를 하다보면 사람의 의견이 얼마나 다양한지 느낄 수 있다. 나는 분명 이 친구 작품의 이런 부분이 별로였는데, 다른 사람들은 극찬을 해서 놀란 경우도 굉장히 많이 있었다. 이건 우리가 프로가 아닌 아마추어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실제로 동기 언니가 쓴 희곡에 대해 두 교수님의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린 적도 있었다. 한 교수님은 그 언니의 희곡에 대해 철학적 깊이에 비해 대사들이 치장하고 있는 느낌이 든다고 했고 한 교수님은 그 언니의 대사들에 담긴 철학적 사유에 공감하며, 대사들이 아름답다고 극찬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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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걸 보며 만약 언니가 첫 번째 교수님의 평만 듣고 희곡을 투고해보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속으로 상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뒤로 나는 내 피드백이 무조건 옳다는 식의 마음을 덜어내는데 집중하게 되었다. 물론 부족한 점에 대해서는 짚어주는 것이 좋고, 그게 피드백을 받는 이유가 맞다. 하지만 내가 저런 마음을 경계하는 이유는 저런 생각을 갖고 있으면 피드백을 할 때 말투가 강해질 때가 많기 때문이다.

 

사람은, 생각 이상으로 자기중심적이라서 자신이 이 작품이 별로였으면 아마 모두가 별로일 것이라고 여기게 되는 것이 있다. 그러면 무례한 말투로 말하는 데 어떤 거리낌도 없어질 수가 있다. 예를 들면 ‘등장인물들 대사가 너무 유치해.’와, ‘등장인물들 대사를 좀 더 자기 나이대에 맞게 쓰면 좋겠어.’라고 말할 때 상대가 들을 타격감은 천지 차이가 된다.

 

 

 

글이 그 사람의 낯이라고 생각하는 마음으로


 

나는 가혹한 합평을 들은 뒤로 왜 사람들이 다시 글을 쓰지 못하게 되는지 이 글을 쓰면서 깊게 고민해보았다. 내 생각엔 그런 합평을 받을 때 느끼는 감정이 속상함이나 분노도 아닌 바로 ‘수치심’이기 때문인 것 같다. 사실 글은 나 자신이나 다름없다. 글 하나를 쓰는데 내가 느낀 것, 생각한 것, 경험한 것 등등 나 하나를 이루는 한 세계가 총동원이 되어야 한다. 글 하나를 바로 세우는데, 그 글의 그 척추가 되어주는 건 나의 ‘가치관’이다. 게다가 그렇게 열심히 쓰는 과정에서 애정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애정을 담아 빚어낸 내 분신 같은 존재에 대해 부족한 점을 듣게 되는 걸 상상해 보자. 그건 정말 말 그대로 내가 사람들 앞에서 벌거벗은 기분을 받게 되는 것 같다. 자존심에 크게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다. 그 경험이 다시 펜을 쥐게 하는 걸 막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글을 대할 때 이 글이 그 사람의 낯이라는 생각으로 대해야 한다고 다짐하곤 한다. 이 글을 쓴 사람의 낯을 보고도 할 수 있는 말만을 피드백으로 해줘야 한다고. 그게 그저 사람에 대한 예의라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이제 앞에서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해보고자 한다.

 

 
‘작가에게 도움이 된다면,
혹독한 피드백을 줄 필요가 있는가?’
 

 

사실 이제 나는 이 질문의 문장 자체가 모순을 품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경험해 본 바로는 ‘혹독한 피드백’은 애초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작가가 그 피드백을 받고 그 글을 더 완성도 있게 고칠 수는 있겠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그 작가는 다음 작품을 쓰기까지 굉장히 오래 걸릴 것이다. 그 다음 작품이 나올 때까지 새로운 아이디어가 있어도 의욕적으로 펜을 쥐어봤다가 스스로 놓는 걸 반복하는 괴로운 과정을 겪게 될 것이다.

 

 


이 글을 계기로 꺼내는 나의 부끄러운 경험


 

내가 이렇게 확고하게 말하게 된 데에는 나에게도 부끄러운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나도 친구에게 혹독한 비판을 해준 적이 있었다. 친구가 공모전에 낼 소설을 나에게 보내온 일이 있었다. 내가 봤을 때 그 소설에 부족한 점이 있어서 나는 그 부분을 짚어주기 위해 한글 컴퓨터 창을 켰다. 그런데 이 소설이 공모전에 낼 소설이라고 하니까, 나는 어느 순간 비판을 하는데 거리낌이 없어졌다. ‘나는 도움을 주고 있는 거야’라는 생각을 하자 타자 위의 손이 날아다녔다. 강도 높은 비판을 한 파일을 친구에게 보내주고 나서 뿌듯한 마음으로 잠에 들었던 그 순간이 지금도 생생하다.

 

다음날 아침 나는 친구에게서 온 톡을 보고 얼굴을 붉혔다. 톡이 그 친구한테만 수십 개가 와있었다. 친구는 처음에는 고맙다는 식으로 말했다가 시간이 지나고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말할 필요가 있었냐는 의견을 드러냈다. 내가 부끄러웠던 것은, 그 수십 개의 톡이 온 과정에서 친구가 자괴감을 느끼고, 나에게 솔직하게 말을 할까 망설이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말할 정도로 상처를 받은 것이 다 드러났다. 내가 보낸 피드백이 한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 무너뜨렸구나 싶어 톡을 읽는 내내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친구는 마지막으로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피드백이라는 건 그 사람이 작품을 고치도록 하게 하는 거지, 이렇게 무분별하게 비판해서 의욕을 꺾게 하는 게 아냐.’

 

 

그 뒤로 그 친구와는 관계가 회복되지 못했다. 이 일이 있은 후엔 절대로 잊지 않으려고 한다. 피드백이라는 것은 그 사람이 더 좋은 작품을 쓰고자 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저 부족한 부분을 지적해주는 데서 그치면 안 된다. 그래서 이제 나는 피드백을 할 때는 부족한 부분을 짚은 뒤 이왕이면 그래서 ‘어떻게’ 고쳤으면 하는지 대안을 꼭 제시하려고 한다.

 

여기까지 읽은 사람 중에서 그러면 피드백을 해줄 때 무조건 좋은 말만 해줘야 하나 싶을 분도 있을 것 같다. 그건 아니다. 나도 고학년이 되고 나니 요즘엔 칭찬을 받기 보다는 비판을 받는 게 더 귀한 일이라는 걸 느끼곤 한다. 칭찬만 받으면 발전이 있을 수 없는 건 사실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피드백이라는 것은 절대로 상대의 작품을 ‘평가’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부분을 고쳐서, 더 나아지게 할 수 있는지를 전하는 것이 피드백이다. 그 피드백을 전하는 과정에서 말투가 무례하다거나-정말로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대안을 제시하지 않고 부족한 점만 열거한다면 그건 상대에게 절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쓰게 하는 힘은 칭찬에서 나온다. 비판이 아니라.


 

<이동욱은 토크가 하고 싶어서>라는 프로그램 쇼에서 영화 부산행의 감독 연상호 씨가 출연한 적이 있었다. 거기서 그가 한 말 중에 나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이것이었다. 그는 창작을 시작하려면 "칭찬쟁이를 곁에 둬라"고 조언했다. 왜냐하면 예술에는 절대적인 기준이 없어서, 어떤 것이 잘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라고 의견을 밝혔다. 시작할 때는 무엇보다 동력이 중요하다는 걸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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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이에 동의한다. 두 교수님께 극히 다른 평가를 받았던 내 동기 언니의 이야기처럼. 예술은 절대적인 기준이 없기 때문에 누군가의 비판을 듣고 포기한다면 그것만큼 아까운 게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최소한 나는 그 마음을 꺾는 사람은 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한다.


‘더 좋은’ 글을 쓰게 하는 건 비판이다. 하지만 글을 쓰도록 시작하게 하는 건 칭찬이다.

 

그리고 '더 좋은' 글은 그 이전에 '글'이 있지 않으면 아예 존재하지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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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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