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예술과 현실의 관계에 대하여 [공연예술]

글 입력 2020.07.06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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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끝줄 소년>은 나의 첫 연극이었다. 뮤지컬은 그래도 몇 번 봤지만, 연극은 처음이었고 그동안 다녔던 큰 극장들에 비해 다소 작은 듯한 무대도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 코로나로 공연장을 찾지 않은 지 몇 달이 된 요즘, 그때의 기억이 문득 떠오른다. 그래서 그리움과 아쉬움을 담아 연극 <맨 끝줄 소년>의 늦은 감상을 써보려 한다.

 

<맨 끝줄 소년>은 극작가 후안 마요르가의 원작을 바탕으로 하여 2015년부터 공연되었다. 내가 <맨 끝줄 소년>을 보기 위해 극장을 찾은 것은 2019년이었는데, 객석에 앉고 나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무대를 둘러싸고 있는 투명한 벽, 그리고 줄 맞춰 놓인 책상들이었다. 정말 그 두 가지 말고는 특별할 게 없는 무대였다. 교실, 헤르만의 서재, 라파의 집 등 작품의 모든 공간이 책상의 배치와 조명으로만 구분되는 것이다. 이러한 무대연출의 의미는 극이 끝나고 나면 더 깊게 와 닿는다.

 

 

 

헤르만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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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문학교사 헤르만이 늘 존재감 없던 학생 클라우디오의 작문과제에서 뜻밖의 재능을 발견하며 시작된다. 클라우디오는 친구인 라파와 그의 가족을 엿보는 행위를 소재로 글을 쓰는데, 헤르만은 그의 글이 진짜인지 아니면 상상해서 쓴 것인지, 그리고 이것이 현실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글이라고 할 수 없는 것들을 과제로 가져오는 학생들의 수준에 질렸던 헤르만은 개의치 않고 클라우디오의 글에 빠져든다. 아내 후아나가 그의 글에 담긴 의도를 보고 경고하지만, 헤르만은 귀담아듣지 않는다. 결국 클라우디오의 작품은 클라우디오가 헤르만의 공간에 발을 들이며 완성된다.

 

클라우디오는 이상한 소년인가? 그는 무슨 목적을 가지고 글을 쓴 것일까? 나는 클라우디오가 문학에 진정 관심이 있어서, 혹은 대단한 작품을 써보고 싶어서 헤르만에게 자신의 글을 보여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에게는 라파의 집에 머무르며 더 깊숙한 곳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 핑계가 필요했을 뿐이다. 헤르만이 그의 글을 비판하고 다르게 써보라고 의견을 줄 때마다, 그리고 클라우디오의 글이 완성될 때마다 클라우디오와 라파 가족의 거리, 즉 그의 글과 현실 사이의 거리는 매번 더 가까워진다. 그는 라파의 가정에 점점 깊게 파고든다.

 

클라우디오의 글을 읽는 것은 헤르만뿐만이 아니다. 그의 아내 후아나는 헤르만이 가져오는 클라우디오의 글을 읽은 뒤 이 글이 진짜라면 현실의 라파 가족이 얼마나 다칠지 걱정하기도 하지만, 곧 자신의 미술관 일에 대해 다시 고민하기 시작한다. 애초에 후아나는 클라우디오의 글을 읽기만 하는 제삼자에 가까운 인물이었고, 라파 가족과도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극의 후반부에 클라우디오가 그녀의 미술관을 찾아오면서 후아나는 그의 작품 속 등장인물이 된다. 클라우디오는 라파의 집을 헤집은 것처럼 헤르만의 집을 활보하고, 라파 가족에 관해 쓴 것과 같은 방식으로 헤르만의 집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클라우디오의 글 중 어디까지가 진짜이고 어디까지가 가짜일까? 작품에 관여하지 않고 지켜보던, 즉 현실에 있는 입장이었던 후아나는 결국 클라우디오의 글의 결말을 이루게 되었다. 이렇게 현실과 글의 경계는 모호해진다. 클라우디오가 라파 가족에 대해 쓴 모든 것, 라파의 어머니인 에스테르와의 부적절한 관계가 모두 현실에 있었던 일인지 우리는 끝까지 알 수 없다. 다만 중요한 것은 그의 글이 우리가 확실하다고 생각했던 현실과 예술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는 것이다.

 

 

 

예술과 현실, 허구와 진실


 

결국 예술은 현실을 비추고, 현실의 사람들은 예술의 영향을 받는다. 현실을 바탕으로 써낸 클라우디오의 글에 헤르만이 빠져드는 것, 그리고 이것이 다시 현실의 라파 가족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현실과 예술이 완전히 분리될 수 있는 속성의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래서 헤르만이 원하던, ‘전혀 예상할 수 없지만 동시에 납득할 수밖에 없는 결말’을 클라우디오가 써냈을 때, 결국은 헤르만 자신의 삶이 흔들리게 된 것이다.

 

헤르만은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의 수준과 위대한 작가가 될 재능이 없어 교사로 사는 자신의 현실에 신물이 나서 위대한 문학 작품들로 가득한 서재에 몸을 숨긴다. 하지만 아무리 추한 현실이라고 해도 현실을 떠나서는 예술이 존재할 수 없고, 동시에 모든 예술은 어떤 방식으로든 현실 세계에 영향을 주게 되어있다.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 지점에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디까지가 예술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인가? 책상만이 놓인 무대 위에서 클라우디오의 글 속에 등장하는 공간과 현실의 공간은 모호하게 나누어질 뿐이다.

 

극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서는 클라우디오와 헤르만이 객석을 가로지르는 계단 위로 올라와 대사를 주고받으며 관객과 같은 시선으로 무대를 바라보기도 한다. 그러니 이 역시도 같은 메시지를 주고 있다. 극이 이루어지는 무대와 이를 조망하는 객석의 경계는 의도적으로 흐려지고, 우리는 이내 무대를 관음하는 우리의 시선이 라파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흥미롭게 지켜보는 후아나, 그리고 헤르만의 시선과 일치함을 알게 된다.

 

이 작품에서 라파 가족의 이야기가 진짜인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이미 헤르만의 현실이 그로 인해 변하고 있다는 사실만이 존재할 뿐이다. <맨 끝줄 소년>이 관객에게 던지는 물음 역시 같다. 작품이 우리에게 어떤 감상을 이끌어내던 간에, 이미 우리에게 영향을 준 이상 <맨 끝줄 소년>이라는 이야기 자체에는 더 이상 큰 의미가 없다. 예술과 현실의 뒤섞인 속성을 그대로 반사하는 클라우디오의 글로 인해 헤르만의 세계가 흔들린 것처럼, <맨 끝줄 소년>같은 작품을 만난 우리의 세계는 잔잔하게 요동치고 있다.

 

 

[이다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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