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남성성의 모든 것 [영화]

글 입력 2020.07.01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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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기변환]호신.jpg

 

 

케이시는 유약한 남자다. 몸도 그렇고 마음도 그렇다. 타인에게 조롱당하고 회사 동료들에게 무시 받는데, 묻지마 폭행을 겪은 이후 유약한 성정은 더 심화된다.


그는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또 언제 폭력에 휘말릴지 모를 일이다. 외출을 삼가고 회사를 결근한다. 집안에서도 종종 위협을 느낀다. 스스로 진단한 자기 문제는 유약함이다. 조롱당하는 것도 무시 받는 것도 유약해서다. 이를 해소하고 싶어 변화를 시도한다. 총을 구매한다. 총 역시 두려움을 완화시키지 못한다. 증서를 갖고 온전히 소지하려면 몇 주 더 걸린다는 설명에 망설인다.

 

케이시는 가라데 도장을 발견한다. 도복을 입고 경건한 자세로 수련에 임하는 센세(사부)와 수강생들의 모습에 마음이 이끌린다. 강한 성정은 강한 체력과 강한 육체에서부터 깃드는 것임을 느낀다.


왜 가라데를 배우고 싶냐고 센세가 물었을 때 케이시는 몇 달 전 폭행의 기억을 꺼낸다. 총도 구매하려 했다고 말한다. 무섭다, 두렵다. 누군가 창문을 두드리고 다시 나를 때릴 것 같다. 센세는 총은 가장 약한 이들의 선택이라고 말한다. 도구의 도움을 받는 건 케이시가 느끼는 트라우마의 뿌리를 뽑을 수 없다. “강함”을 완성하고 싶다면 스스로 바뀌어야 한다. 동작을 익히고 체력을 기르면 위협감을 느끼거나 두려움에 시달릴 일이 없을 테다. 센세는 환경부터 변화를 주라고 말한다. 강함은 마초성의 다른 말이고 물리적 강함 너머 케이시 내부에 도사린 남성성을 끌어내라고 조언한다. 먹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마초적어이야 한다.

 

케이시는 메탈을 듣는다. 회사 동료에게 시비를 걸고 상사를 때린다. “강해 보이는” 음식을 먹는다. 말투를 바꾼다. 스스로 취한다. 강해진 것 같다고 되뇐다.

 

케이시는 덩치 큰 남자와 시비 붙고 겁먹어 아무 대응도 하지 못한다. 가라데에서 배운 동작 중 어느 것 하나 써보지 못한다. 자기가 한 것들 모두 허울일 뿐이고 강해지긴커녕 이전과 다를 바 없다고 느낀다. 그는 도복과 띠를 반납하려 센세를 찾아간다. 울먹거린다. “나는 자격이 없어요.” 센세는 케이시에게 강함을 완성할 수 있는 도약의 기회를 제공한다. 이걸 하는 순간 당신은 이전과 달라질 거라고 말한다.

 

이때까지 영화는 낡고 시대착오적인 버디무비 같다. 유약함의 대척점엔 강함이 있고 유약한 남성은 거기 도달하기 위해 원래의 성정까지 개조할 필요가 있다고 설파하는 듯하다. 센세는 끊임없이 남성다움을 강조한다. 남성은 여성과 태생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남성성에 장착된 “강한” 자질을 예찬하며 그걸 계발해야 한다고 말한다. 강해진다는 건 그런 의미라고 케이시에게 주입한다. 케이시도 거기 동조하며 자기 자질을 바꾸기 위해 혈안이다. 영화는 케이시의 변화를 보여주고 이를 성장이라고 포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남성의 성장은 “강함”의 획득을 통해서만 이뤄진다고 말하는 셈이다. 그렇게 보면 센세는 케이시에게 성장을 발판을 마련하는 조력자다.

 

센세는 케이시에게 묻지마 폭행을 가했다는 가해자를 찾았다며 밤중에 케이시를 호출한다. 가해자가 술 취해 혼자 있는 때를 노려 똑같이 되갚아 주라는 거다. 케이시는 당황한다. “저 사람이 내게 해를 입혔다는 증거가 없지 않느냐.” 센세는 다그친다. “네가 그런 물불을 가릴 처지냐, 몇 달 전 폭행의 기억을 떠올려봐라, 네 자존심에 입은 상처를 기억해봐라.” 케이시는 생면부지의 타인을 구타한다.

 


[크기변환]사본 -호신술.jpg

 

 

영화의 결이 달라지는 지점도 이곳에서부터다. “강함”에 내포된 시대착오적 의미를 찬양하고 강함이 곧 남성성이라는 등식을 주장하는 것처럼 보였던 영화는 그 같은 논리가 얼마나 헐거운 사슬로 이뤄져 있는지 폭로한다.

 

센세에 따르면 강함은 위협하는 사람이 되는 것으로써 완성된다. 강한 사람은 폭력의 주체인 사람이다. 그러므로 케이시는 이제 “강한” 사람이다. 물리적 폭력을 구사하는 능력으로 “강함”을 측정할 수 있고, 남성이 더 폭력적이므로 여성보다 남성이 훨씬 강하다.

 

안나의 존재로 이 같은 논리는 반박된다. 안나는 센세를 제외하고 도장 인원 중 가장 강한 사람이다. 센세 다음 서열의 남성 수련자와 대련해 이빨을 부러뜨리고 얼굴을 짓뭉갠다. 강함을 통해 서로를 인정하는 남성 집단에 진입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하지만 센세는 여전히 안나에게 여자라서 약하다는 꼬리표를 붙인다.

 

<여성혐오를 혐오한다>를 썼던 우에노 지즈코는 남성다움을 통해 서로를 인정하는 남성연대를 호모소셜이라고 불렀다. 호모소셜엔 여성보다 남성이 우월하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몇 명의 여자와 잤느냐, 연인을 얼마나 정복했는가, 따위로 남성다움을 측정한다. 거기서 여성은 소유의 대상이지 동등한 위치가 아니다. 상대에게 가장 모욕감을 주기위해 “여성 같다.”말이 동원된다. 여성과 남성은 태생적으로 다른 지위를 가진다고 학습했던 센세에게 안나를 인정하는 일은 자기 세계관을 부정하는 일이다. 센세는 그래서 안나를 인정할 수 없다.

 

케이시가 야간반 수업에 참여해 검은 띠들과 수련했을 때 센세는 처음 오는 인원들이 치르는 마무리 운동 단계가 있다며 그를 다른 곳으로 이끈다. 센세가 이끈 곳엔 안나가 있다. 야간반에 등록한 모든 수련생은 안나의 마사지를 거친다고 설명한다. 모두가 아는 “문란한 여성”과 성관계를 한 일로 자기 남성다움을 증언하고 확인받는 남성연대가 있다. 그럼으로써 친밀감을 다지고 자기 집단을 공고히 하는 거다. 매춘을 통해 연대하고 친분을 쌓는 것도 이 같은 맥락이다. 영화는 뒤틀린 남성문화를 조롱한다.

 

센세에게 배운 대로 하여 케이시는 강해졌다. 폭력의 주체가 됐다. 케이시는 더 이상 유약하지 않고 강함을 획득하여 남성다움을 증명했다. 그는 이전보다 성장한 걸까. 위협받는 인간에서 위협하는 인간이 됐지만, 타인이 보면 그는 아무에게나 폭행을 시도하는 폭력적인 사람이다. 회사에서 해고당하고 동료들은 그를 두려워한다. 기르던 개는 “작고 볼품없어 남성이 기를만한 개가 아니”라는 이유로 도장 사람들에게 매장 당한다. 케이시는 정말 유약했던 때보다 나아진 사람일까.

 

케이시는 그 사슬을 부신다. 센세에게 대련을 신청하고 총으로 쏴 죽인다. 센세는 약한 이들이나 찾는 수단이라고 불렀던 것에 의해 죽는다. 케이시는 폭력으로 서열을 매기고 남성성을 측정하는 시스템의 희생자다. 센세가 부르짖던 남성성을 획득하여 나아지긴커녕 도처에 소중히 여기던 것들 모두가 증발했다. 케이시가 총을 쏜 건, 강함에 대한 정의를 다시 내리려는 의도에서다. 남성적이고 마초적인 것, 그런 것들이 강함의 기준이 될 수 없다. 센세의 말처럼 폭력으로 강함을 측정할 수 있다면 “약한 이들의 도구인” 총 한방에 살해당한 센세는 가장 약한 군상이다. 그럼 왜 센세가 우리 위에서 군림 한 건지. 센세는 강한 사람이 아니라 그냥 폭력적인 인간 말종일 뿐이다. 케이시는 도장 인원들을 불러 모아 가장 강했던 센세의 지위를 안나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노란 띠의 위치로 되돌아간다.

 

센세 같은 생각이 여전히 잔존해 있다. 남성과 여성은 태생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는 사상이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통용됐다. 18세기엔 남녀 성기에 각각 다른 체액이 있어 남녀가 다르다고 설명됐다. 여자가 열등하고 남성이 우월하다는 의식이 유통됐다. 20세기엔 성내분비학이 등장하여 남녀의 호르몬은 다르고 거기 담겨 있는 정보 역시 다르다며 성차를 정당화했다. 사회문화적 영향과 무관하게 태아시기부터 생물학적 성차가 있다는 거다.

 

우리는 흔히 과학을 자연적 속성이라거나 주어진 진실로 전제하지만 과학연구 역시 해당 시기의 사화문화적 자장 아래서 사회문화적 맥락을 반영하고 있음이 드러났다.(이남희 외, <젠더와 사회>, 동녘, p136, 2016) 성차를 주장하는 연구가 계속 쏟아지고, 성차는 자연적 속성이라고 표현된다. 헛소리다. 80년대부터 페미니스트들은 성차가 있다는 과학연구와 생물학적 지식을 비판했다.

 

이를테면 테스토스테론=남성호르몬이라는 등식이 팽배하다. 그것은 ‘공격성’으로 치환돼 남성의 공격적 성향은 어쩔 수 없다는 논리까지 만들었다. 그러나 우리가 남성호르몬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별로 많지 않다. 남성 호르몬이 정말 남성다움을 측정하는 “공격적” 성향의 호르몬인지 명확히 입증된 것도 아니다. 70년대까지 성차를 설명하기 위해 진행된 동물실험은 암컷이 새끼를 낳았을 때 보였던 폭력적 반응을 “방어적이다”, “예외적”이라고 분석했지만 “공격적이다”라고 분석하진 않았다. 수컷이 원래 더 공격적이다, 를 설명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다른 수사를 붙인 셈이다. 그러면서 암컷은 수컷의 성적 공격을 받는 대상 정도로 묘사했다.

 

태생적인 성차가 진정으로 있는지 실제로 증명된 건 없다. <호신술의 모든 것>은 성차가 있다는 이들을 조롱하는 영화다. 동시에 남성성이라는 언어로 포장된 폭력의 양상을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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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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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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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영미
    • 강인함은 내가 나를 인식하고 올바른 가치관으로 세계를 보고 해석해 나갈 때 생겨날 수있다. 물리적 강함, 힘으로 강인함을 표현한다면 폭력에 지나지 않은다. 대표적인 남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에 대한 오해와 무지가 남성의 적으로 여성을 만든다.
      남성과 여성은 각 개인이 그렇듯 서로 다르다. 그 다름으로적대적인 구도를 만들어 내는것이 아니라 상호존중가을데 보완 발전 시켜나가야 할 것이다.
      과학 의료의 발전으로 성차에 관한 연구들이 활발해짐에 따라 명확히 남자와 여자는 다름이 드러나 밝혀지고 있다. 지난 반세기간 남녀를 혼란가운데 몰고가려하던 사조는 그 끝이 멀지 않았다. 투쟁해 쟁취하는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이해하고 품어주며 대안을 찾아가고 틀린건, 아픈건 올바르게 치료하며 건강을 행복을 추구하며 나아가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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