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여성의 삶에 드리워진 그늘 - '장녀들'

단지 살기 위한 선택들
글 입력 2020.06.30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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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세 편의 독립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집 지키는 딸>의 나오미, <퍼스트레이디>의 게이코, <미션>의 요리코. 세 인물 모두 독신이고, 30대 후반에서 40대 중반의 나이에, 자신의 전문 분야를 가지고 있다. 이들의 삶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연로한 부모를 돌보는 문제다. 소설 속 장녀들은 부모와 한집에서 살면서 가정 안에 오랜 세월 존재해온 부조리를 정면으로 마주한다.

 

그들이 부모에게 갖는 감정에는 효, 사랑, 공경이 자리할 공간이 없다. 부모와의 관계가 무언가에 의해 막혀 있는 형상이다. 왜 '장녀들'은 가정 안에서 마음을 나누지 못하고 죄책감과 우울, 애증의 감정으로 고통받을까. 왜 부모와 함께하는 것은 그들의 삶의 근간을 무너뜨리는 일이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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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지키는 딸' - 밀실의 문


 

나오미는 골다공증 때문에 거동이 어렵고, 치매 중기 증상을 보이는 어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다. 엄마와 함께하는 공간이 나오미에게 지옥처럼 느껴지는 순간은 ‘고립’이라는 단어로 설명할 수 있다. 주변 환경으로부터의 완전한 단절, 꼼짝없이 갇혀버리고 마는 느낌. 순간순간 나오미를 덮치는 고립의 감각은 “자신과 어머니 주변에 두툼한 문이 세워지는 것만 같았다(p.120)”는 말로 표현된다.

 

나오미는 이 고립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발견할 때 숨통이 트이는 느낌을 받는다. 소설의 말미에 가서 공적 돌봄이 제공되는 고령자 주택에서 살 수 있게 되었을 때 비로소 어머니의 환영(幻影)을 받아들이게 된 것도 유사한 맥락이다. 밀실이 아니라면 나오미는 어머니와 심지어는 어머니가 보는 환각 속 존재와도 살아갈 수 있다. 어머니와 함께 탄 차를 돌려 “고속도로 중앙 분리대를 들이 받”지 않고 살 수가 있다.

 

 

 

'퍼스트레이디' - 선택 아닌 선택


 

게이코는 어머니의 당뇨병 치료를 돕기 위해 자신의 진로를 포기했다. 게이코의 어머니는 생활을 개선할 의지 없이 오히려 병증을 악화시키는 쪽으로 기울어가고 결국 신장 이식을 받지 않는 한 오래 살 수 없다는 진단을 받는다. 하지만 그것은 어머니가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 어머니 안에 자리하고 있던 무기력과 우울 때문에 단 음식에 의존하게 된 것이다.

 

게이코는 어느새 어머니와 똑같이 음식에 의존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어머니와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던 게이코는 끝내 어머니에 대한 책임감으로 위험한 신장 이식 수술까지 결심한다. 그런데 그것은 과연 게이코의 선택이었을까. 가장 가까이에서 어머니의 말을 듣고 어머니의 행동을 바라보고 어머니를 위해 사는 삶으로 이끌린 장녀로서 장기 이식은 게이코가 벗어날 수 없었던 굴레의 일부가 아니었을까.

 

게이코가 처한 어려움은 여성에게 고정된 성 역할을 요구하는 일본 사회의 문제와도 중첩되어 있다. 소설의 제목인 <퍼스트레이디>는 이 집안에서 게이코가 수행하고 있는 역할을 가리키는 말이다. 공식적인 모임이나 발표회에서 아버지의 옆에 자리하며 집안의 얼굴, 할머니의 표현에 따르면 ‘외교관’의 역할을 하는 것이 퍼스트레이디의 의미다. 본래는 할머니에 이어 며느리인 어머니가 맡았어야 할 역할이지만 어머니가 그것을 거부하면서 자연히 장녀인 게이코 차지가 되었다. 게이코는 아버지 지인의 장례식에 대신 참석하여 얼굴을 비추고, 연주회의 축사를 하고, 후원회에 가서 사교 활동을 한다. 그 과정에서 덤으로, 주변 어른들로부터 결혼에 대한 압박을 받는다.

 

게이코는 비혼을 결심한 것은 아니지만 그럴 만한 마음의 여유도, 의지도 없다. 무의식적인 거부반응으로 보이기도 한다. 어머니의 건강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황과 더불어, 어렸을 적부터 어머니에게 들어온 ‘아내이자 어머니이자 며느리로 사는 일’의 불행함은 게이코에게 자연히 결혼에 대한 거부감을 심어주지 않았을까. 가족 안에서 장녀이자 퍼스트레이디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 노력해온 게이코에게 결혼은, 또 다른 속박의 시작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게이코는 또다시 선택 아닌 선택의 순간들에 놓이고 마는 것이 두려웠던 것은 아닐까.

 

 

 

'미션' - 요리코가 마주한 아버지의 얼굴


 

마지막 이야기인 <미션>은 앞선 두 이야기와 조금 결이 다르다. 가족을 떠나는 선택을 한 이후에 장녀가 느끼게 되는 감정과 뒤따라오는 고민이 담겨 있다. 요리코가 선택을 하기까지의 과정은 생략되어 있지만, “화목한 가족에게 자신은 무언가를 계속 빼앗겼다”는 문장에서 요리코 역시 가정내에서 부여된 역할에 짓눌려 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요리코는 장녀의 의무가 아닌 자신이 따르고자 하는 사명(미션)에 이끌리고, 돌봄을 필요로 하는 아버지의 곁을 떠난다. 이후 본가를 찾은 요리코는 홀로 죽음을 맞은, 검은 시체가 된 아버지의 얼굴을 마주한다.

 

저자는 이 이야기를 통해 인간에게 삶이란 무엇인지, 죽음이란 무엇인지 묻고, '사회 안에서 부여된 역할을 수행하는 삶'과 '자유로운 선택에 따른 삶' 사이에 우리가 따라야 할 가치는 무엇인지 묻는다. 요리코는 히말라야산맥 아래에 위치한, 모든 죽음이 자연의 섭리로 여겨지는 마을에서 의료 지원 활동을 하면서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소설의 말미에 요리코는 죽음의 문턱에 놓인 듯한 순례자의 모습에서 아버지의 얼굴을 본다. 홀로 방치되어 고독사한 아버지의 얼굴과 스스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길을 떠난 순례자의 얼굴이 겹쳐졌을 때, 요리코는 무엇을 느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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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삶에 드리워진 그늘


 

게이코의 어머니를 묘사하는 부분에서 특징적인 것은 그녀가 그 누구에게도 무언가를 요구하거나 불만을 토로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유일하게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는 출구는 게이코다. 장녀라는 존재는 어머니의 사고 안에서 “또 다른 나”이지 타인이 아니다. 사실상 그에게 진정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할 사람은 없었던 셈이다. 그가 아주 외로운 삶을 살았다는 뜻이다. 시부모가 세상을 떠나고, 자식들이 독립한 뒤 빈집에 남겨진 어머니는 탄식한다. “대체 내 인생은 뭐였던 걸까.”

 

나오미의 어머니도 마찬가지다. 나오미는 60대의 나이인 어머니가 “자립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자립이란 '남에게 예속되거나 의지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선다'는 뜻이다. 스스로 서지 못한 어머니는 장녀인 나오미에게 기대고자 하고, 갈등은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왜 게이코의 어머니가 인생을 잃어버렸다고 느끼고, 나오미의 어머니는 자립할 수 없었을까. 분명한 것은 이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사실, 개인의 경험으로 치부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정희진은 “훌륭한 어머니가 되려는 여성은 자신을 파괴하는 유전자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어머니는 남을 위한 존재이기 때문(『페미니즘의 도전』, p.69)”이라고 썼다. 소설 속에서 어머니는 딸에게 '어머니'로, 혹은 누군가의 '아내'이자 '며느리'로 불릴 뿐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오랫동안 가정의 유지를 위해 노동하고, 가족들을 중심으로 사고해온 어머니가 천천히 무너져온 결과로서 자신의 힘으로 설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 소설은 이를 장녀의 눈을 통해 보여준다.

 

그런 어머니와 장녀는 닮아 있다. 나오미의 어머니가 매사에 신경질적인 것처럼 나오미 역시 날카롭게 감정을 표출한다. 게이코도 자신에게 요구되는 의무를 대부분 받아들이고 스스로 힘듦을 감내한다는 점에서 어머니와 닮았다. 딸들은 어머니와 함께 지내면서 어머니에게 자신을 동일시하고, 극단적인 감정의 변화를 보인다. 어머니를 향한 사랑과 슬픔의 감정이 커졌다가, 이내 분노에 휩싸이고 어머니를 증오한다. 장녀들은 하고 싶은 말이 목 끝까지 올라오는 것을 몇 번이고 삼켜낸다.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거리를 두지 못한다. 그리고 바로 이 ‘거리 두기’가 불가능함을 깨달았을 때 게이코는 도망치기로 결심한다. 게이코는 거울 속에 비친 어머니의 모습을 지우고 자신의 얼굴을 보기 위해 어머니 곁을 떠난다. 선택 아닌 것들 속에서 선택하기 시작한다. 그런 게이코를 누가 막아설 수 있을까.

 

여성의 삶에 드리워진 그늘. 이를 나름의 노력과 성실로 '잘' 견디고 혼자서 감내하고자 할 때 삶은 지옥이 될 수 있음을, 이 소설은 보여준다. 그렇게 단지 살기 위해서 나오미는 밀실의 문을 열었고, 게이코는 어머니로부터 도망쳤고, 요리코는 먼 이국땅으로 향했다.

 

 



[김주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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