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TMBP 03. 그림은 내가 홀로 있는 방식

비전공자가 그림을 열심히 그리는 이유
글 입력 2020.06.30 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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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MBP[Too Much 'B'formation Project]

 

TMB프로젝트는 한국말로 구구절절이라는 뜻의 '투머치인포메이션'이라는 단어에서 영감을 얻은 프로젝트로, Inforamtion의 I 대신 제 이름 첫 글자이자 마지막 글자인 B를 넣었습니다. 나로 시작해서 나로 끝나는 에세이 프로젝트입니다. 세 번째 에피소드 <그림은 내가 홀로 있는 방식>으로 이어갑니다. 부끄럽지만 직접 그린 그림 또한 첨부합니다.

 

***

 

죽고 싶다는 생각 뒤에 나는 완전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억울함이었을 수도 있고 삶에 대한 오기었을 수도 있고 단지 지금 죽기엔 겁이 많아서였을 수도 있다. 어쨌든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애매하게 살다 죽을 바에 완전히 살아버리고 단번에 사라지겠다는 그런 다짐을, 혼자 했다.

 

혼자 우뚝 서있고 싶었으나 하염없이 누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슬픔이라는 중력이 나를 자꾸만 눕혔기 때문이다. 그리고 함께 있는 것 말고 혼자서 행복한 방법을 도무지 알지 못했다. 그 즈음 요가를 배우고 연기를 배우고 글을 썼다. 돌이켜 보니 난 혼자 싸우고 있었다. 절망과 우울, 외로움과 상실감에 격렬하게 저항하고 있었다. 누구에게도 폐 끼치지 않으려 노력하며 그것들과 싸웠다.

 

누워 있는데 눈물이 그냥 베개 위로 주룩 주룩 하고 떨어졌을 때 나는 문득 몸을 일으켜 책상 앞에 앉아서 에이포 용지를 꺼내 양 손을 나비 모양으로 만든 채 가슴을 토닥이고 있는 사람을 그렸다. 그때부터였다. 혼자 있을 때, 혹은 둘이 있을 때도 틈만 나면 그림을 그렸다. 처음엔 무엇을 그릴 지 알지 못했다. 그냥 모르게 두었다. 알 수 없는 선만 가득하게 냅뒀다. 좋아하는 마음을 참지 못할 때는 좋아하는 사람의 얼굴을 그렸고 바다가 보고 싶을 때는 바다를 그렸다. 사과를 그렸고 꽃을 그렸고 바다를 그렸고 노을을 그렸다.

 

그런데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보는 세상을 잘 담고 싶은데 안되서 조급했다. 왜 이상한지 분석하지도 않으면서 몇 시간 동안 지우개로 그림을 박박 지웠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친구가 있었는데, 나보고 잘 보고 좀 그리라고 한마디 했다. 분명 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생각대로 그리고 있었다. 얼굴도 동그랗게, 사과도 동그랗게, 눈도 동그랗게, 꽃잎은 뾰족하게, 바다는 파란색.

 

잘 표현하기 위해 잘 관찰하게 되었다. 이제는 내가 긋는 선까지도 보였다. 선이 짧고 잘았다. 딱 봐도 겁이 많은 사람처럼 망설이는 선들이 지저분하게 종이 가득했다. 내 눈이 뾰족한 물방울 모양이라는 것도 그때 알게 되었다. 그 눈처럼 나는 모든 디테일들을 깡그리 무시하고 내 멋대로 왜곡해서 세상을 보고 있었다. 그때 나는 알았다. 그림은 존재를 존중하는 것임을.

  

나는 이전과 같은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없게 됐다. 나 말고 수많은 존재가 저마다의 색과 결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전문가 수준의 그림을 그리지 못한다고 해도 상관없다고 마음 먹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유명 화가들의 발끝에도 못미친대도, 재능이 하나도 없다고 평가 받는다고 한들, 그림으로 내 세계를 가꾸어 갈 것이라고 마음먹었다.

 

제목만 보고 산 시집이 있다. 페르난두 페소아의 '시는 내가 홀로 있는 방식'이다. 페르난두 페소아는 생전 시집 한 권만을 출간했지만 사후 그녀의 트렁크 안에서 발견된 시는 2000개 이상이었다. 아래는 페르난두 페소아의 시 '양떼를 지키는 사람'에 나오는 구절이다.

 

"내게는 야망도 욕망도 없다. 시인이 되는 건 나의 야망이 아니다. 그건 내가 홀로 있는 방식"

 

*

 

이전에는 그림은 재능 있는 사람이나 그리는 것이라고 멀리 했습니다. 내가 아는 어른들도 다 그랬습니다. 뭔가를 하고 싶다고 할 때마다 그런 건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며 가족이나 친척을 둘러보면 자신의 재능을 알게 될 것이고 누구나 타고난 운명을 갖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아는 친척 중에는 되고 싶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무언가를 꾸준히 좋아하는 것도 재능이라면? 계속해서 좋아하게 되고 그래서 잘하고 싶게 되는 것도 운명이라면, 그렇다면 뭔가 좀 달라지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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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MB프로젝트는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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