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위약 효과(placebo effect)와 준비운동 [도서]

철학 책을 읽으며 느끼는 기분 좋은 착각
글 입력 2020.06.22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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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도 몇 번씩 하찮은 일에 나를 침탈당하거나 빼앗기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도대체 얼마나 잘 먹고 잘살기 위해 이런 일들에 생채기를 입어야 하는지 회의감에 휩싸이기도 한다. 하루하루 잘 소화하며 사는 게 그런 순간들을 이겨내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지만, 종이에 베인 것 같은 자잘한 마음의 상처와 그것을 직면하는 현실에 조금씩 지쳐 어느새 진득한 피로와 함께 진력이 나 있곤 한다. 이 시기를 완벽하게 피해 가는 것은 생활인으로서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조금이나마 작은 충격으로 그 시기를 넘겨 다시 일상을 가치 있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천천히 걸어갈 수 있을지 고민해보기도 한다.
 
철학과 미학에 대해 알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했다. 내가 잘 알지 못하면서 말하고 쓰는 것들이 너무 많다는 생각에서였다. 또 어떤 글은 쓰면 쓸수록 내가 뿌옇게 변하거나 투명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내 사고의 부족이 가장 큰 이유이겠지만, 나의 글과 말이 다른 사람들에게 가닿지 못하는 것이면 어떡하나 하는 전전긍긍에서 비롯한 것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미美와 예술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 체계가 궁금했고, 그들 각자의 시선이 아름다움과 세상을 어떻게 흡수하는지 궁금했다. 그걸 알면 조금이나마 더 자신 있고 의연하게, 그리고 범박하지 않게 나와 세상을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철학책을 조금씩, 아주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읽기 시작하면서 느낀 건 비단 위에서 말한 기대효용과는 사뭇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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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세로 벤치 프레스를 하면 뇌혈관과 허리가 버틸 수 있을지 초심자로서 의문이다.

 

 

우선 철학책을 읽으면서 그동안 헤아릴 겨를도 없었던 삶과 인간의 근원적 고찰에 대해 조금씩 맛보게 되고, 그로 인해 가당찮게 삶을 침범하는 것들에 대해 좀 더 여유 있게 상대할 수 있으리라는 묘한 자신감을 얻게 됐다. 이 자신감은 연초에 헬스장을 등록해서 사나흘 정도 꾸준히(?) 다니고서는 거울을 보며 몸이 좋아진 것 같다고 느끼는 심리와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이 착각은 꽤 묵직하지만 기분 좋은 위약 효과이고, 위약 효과 역시 실제로 그만의 효과를 가지고 있는 것이니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두 번째로, 철학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동시에 병렬식 독서를 하게 됐는데 이 과정에서 느낀 철학의 또 다른 매력은 함께 읽는 다른 책의 맥락을 조금씩 더 넓게 발견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가령 책을 읽을 때 쓰는 사고의 여러 부분을 통칭하는 용어로써 ‘독서 근육’이라는 표현을 빌리자면, 책의 종류나 내용에 따라 그것을 읽을 때 사용하는 독서 근육의 부위는 각기 다르다. 철학 텍스트를 읽을 때 발휘되는 독서 근육은 비슷한 시기에 읽는 다른 책에도 반영되어 다양한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신체 운동의 경우 부위별로 운동을 하면 그 부위 외의 다른 근육의 간섭이 운동 효과를 감소시키지만, 독서의 경우 이와는 반대다. 독서 근육의 다양한 간섭이 풍부한 의미와 사고 실험을 가능케 하고, 그것은 고스란히 나의 진폭에 영향을 준다. 내가 넓어지는 기분은 거울 앞에서 확인할 순 없지만, 눈으로 보는 것 이상의 실감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이 과정을 하이데거식으로 이야기하면 무상한 시간 속에서의 존재자의 존재를 파악하고 순간의 진실을 맞이하는 과정이라 일컬을 수 있겠지만, 이런 단순한 인용조차 조심스러운 수준인 나는 조용히 이 사고의 간섭들을 곱씹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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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속을 자유롭게 유영하는 사람들을 보면 부럽다.

 
 
세상을 혼자 바꾸기란 불가능하니 그 대신에 삶의 태도를 바꿔 세상을 다르게 받아들이는 연습을 평생에 걸친 스트레칭으로 생각하려 한다. 자신을 통과하는 세상이 바뀌고 자신이 통과하는 세상이 바뀌기를 꿈꿨던 사람들의 텍스트에 빠져 잠영하기 전에 꼭 필요한 준비운동이라고 말이다.

    
[조원용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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