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가 사라진 세상에서, 어느 날 문득 찾아오는 것

<1984>, 조지 오웰
글 입력 2020.06.22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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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졌던 언어가 사라진 세상은 어떨까. 말을 혀와 목구멍 사이에서 음미하고, 자유롭게 풀어헤쳐보기도 전에 단어들이 스러진 세상은 어떠할까. 햇살이 만개해 티 없이 맑은 하늘을 떠도는 새들을 올려다보며, ‘무한히 자유롭다’라고 말하지 못하는 세상은 우리에게 어떤 삶을 담보할까. 언어가 없는 세상은, 마치 커다란 솜사탕에 물을 부어 설탕 찌꺼기와 막대기만 남기는 것과 같다. 눅눅하고 찐득한 설탕을 아무리 입안에 굴려 봐도, 솜사탕의 느낌은 아니다. 커다랗고 몽실몽실한 실타래가 솜사탕을 애타고, 달게 만든다. 본질을 다채롭고 비대하게 만드는 건 그를 둘러싼 언어다. 우리는 하늘을 가르는 새를 보며, ‘새가 있다’라고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떠올린다. 답답한 기운이 온몸을 짓누를 때, 한 마리의 ‘새’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이런 사유가 허락되지 않는 세계가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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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의 <1984>는 그런 세상을 상상한다. 매일매일 말들이 없어지고, 단어의 기본 골격만 남을 때까지 언어를 발라내고 해체한다. 윈스턴에게 ‘애매모호한 표현과 쓸데없이 미묘한 의미의 차이’가 있어야 할 정당한 이유가 무어냐고 묻는 사임(‘새말’ 전문가)을 보고 있자면, 그의 논리가 일견 타당한 것 같기도 하다. 통일되지 않은 의미들이 둥둥 떠다니는 세상은 불협화음으로 가득하지만, 의미의 차이가 없는 기호들은 탁월하게, 효율적으로 작동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무얼 선택해야 할까. 망설임이 가득한 언어일까, 혹은 분명하고 간결한 언어일까. <1984>의 지배자들은 후자를 택한다. 언어의 파괴로 체제를 유지하고, ‘새말’은 피지배자를 호명해 지배 이데올로기의 주체로 만든다. 피지배층은 ‘새말’을 사용함으로 구조에 복종하는 ‘주체’가 된다.

 

인간은 말을 만드는 사람, 즉 정의하는 자와 정의당하는 자로 나눌 수 있다. 언어는 차별의 결과가 아니라 차별의 시작이다. 이는 동시에 지배와 피지배의 관례를 제공한다. <1984>의 ‘새말’은 일정한 방향의 의미로만 활용될 수 있어서, 이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체제의 부당성과 자신의 자유가 침해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다. ‘자유’라는 말이 없는데 어떻게 자신의 자유가 침해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까? ‘새말’은 말의 미묘함과 애매모호함, 이중성을 말살할 뿐만 아니라, 표현 수단을 최소화한다. 사고의 전반적인 풍토 자체가 달라지고, ‘사고’라는 것 자체가 없어질 것이라 말한다. 영사 추종자들에게 적합한 세계관과 정신 습관에 표현 수단을 제공해 줄 뿐 아니라, 다른 모든 사고방식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언어의 축소는 사고 영역의 축소로 이어진다. 의미의 확장을 원천 차단하며, 견고한 구조와 체제를 만들어내고 유지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문득 의문이 생긴다. 아무리 언어가 사고에 영향을 미친다 한들, 인간은 언어 너머의 것을 본다. 세계 속에 존재하는 우리는 언어의 이면과 그 너머를 마주하고,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려 한다. 그렇기에 언어는 세계 속에서 끊임없이 약동하고, 새로운 의미를 탄생시킨다. 소설처럼, 정말 ‘새말’이 인간의 사고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칠까? 물론 체제 유지를 위한 다양한 수단이 동원된다. 텔레스크린의 감시, 위에서부터 생산되는 저급의 대중문화, 조작된 언론, 과거의 수정, 2분 증오, 이중사고, 사상경찰, 사상죄 등. 평화부, 애정부, 풍요부, 진리부를 통한 당의 체계적이고 절대적인 통제가 존재한다. 이 모든 것들이 사람들의 시야를 가려 본질을 흐리게 만들지만, 사람들은 분명 세계에 존재하고 있다. 아무리 세계의 본질을 가리고 은폐하려 한들 편편한 장막에서 무심코 돌출하는 것들, ‘새말’로는 표현되지 않는 것들이 분명히 우리와 함께하고 있다.

 

밤길을 걷다 유난히 반짝이는 별을 발견했을 때, 차가운 공기가 코를 찌를 때, 까맣고 텅 빈 저 공간의 무한함을 상상할 때의 벅참, 해방감, 자유, 애달픔, 고달픔, 혹은 ‘이 세상에 나 홀로 서 있어서 외롭지만 동시에 충만한’ 느낌. 기존의 언어와 말로 표현하지 못해도 느껴지는 ‘어떤 것’이 분명히 있다. 언어로 명시하지 못하는 암묵적인 지식과 경험이 존재한다. 언어로 선명하게 표현할 수 있는 것보다, 언어로 말할 수 없는, 표현할 수 없는 인간의 본능이 이 세계를 가득 채우고 있다. 이를 알아차리는 순간 구성되고 믿어지는 언어에 균열이 가고, 새로운 언어와 의미로 도약한다. 언어로 세계의 모든 것을 면밀하게 포착할 수 없기에, 공간과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는 언어의 가능성에 기댄다. 그리고 그 속에서 각자의 ‘의미’를 위해 투쟁한다. 윈스턴은 언어 너머의 세계를 기억하고 탐내었기에 의심하고, 되묻고, 사유하고, 마침내 펜대를 잡는다. 무미건조하고 무력한 회색빛의 삶에 만들어진 세계 너머의 것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한다. 언어와 사유, 감정과 욕망이 윈스턴을 찾아온다. 이 자체로 윈스턴은 의미와의 싸움, 저항을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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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1984>의 세계는 절망적이다. 윈스턴은 결국 사상경찰에게 잡힌다. 단순히 고통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버티려고 해도 참을 수 없는 형태의 압력을 가하는 당에게 윈스턴은 굴복한다. 당이 마음까지는 지배할 수 없다고, 2 더하기 2는 4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자유라 믿던 윈스턴은 결국 2 더하기 2는 5라고 외친다. 윈스턴은 패배한다. 동시에 승리했다고 믿는다. 윈스턴은 자신이 절대 회복할 수 없는 일, 행위들을 겪고 마음속의 무엇인가 불타서 완전히 소각되어 버렸다고 말한다. 세상에 의문을 품은 마지막 인간, 윈스턴은 그렇게 사라진다. <1984>의 결말을 보고 있자면 아연한 절망감, 암울함, 무력함이 나를 덮친다. 하지만 나는 윈스턴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죽었다’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분명히 기존의 세계에 기시감을 느끼고, 장막 너머를 상상하고 꿈꾸는 사람이 존재할 거다. 윈스턴에게도 마음속 무언가가 남아있을 거라 믿는다. 한번 경험했기에, 어느 날 문득 몸의 기억이 솟아오르지 않을까.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견딜 수 없는 것’의 틈을 비집고 피어오르는 욕망이, 언젠가 다시 윈스턴을 찾아오지 않을까. 작중에서 윈스턴이 막연하게 프롤의 가능성을 기대했듯, 나 또한 남겨진 사람들의 마음속 불씨를 믿는다. 빅브라더가 완벽하게 감추지 못한 세계에서 미세한 균열과 소음을 내는 것들이 사람들의 귀와 눈을 사로잡고, 종국에는 입까지 사로잡을 것이다. 첫 균열은 중년 노동자 여성에게 흘러나온 노래일 수도 있고, 지저귀는 새들의 수다일 수도 있고, 문득 바라본 꺼멓고 파란 하늘일 수도 있다.

 

과연 <1984>만의 문제일까,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세상은 극단적이지 않다고 믿어도 되는 걸까? 소설 속 세계는 우리와 무관하지 않다. 실제로 '전쟁은 평화, 자유는 속박, 무지는 힘'과 같은 일들이 역사 속에서 존재했고, 지금 일어나고 있고, 그러한 언어가 세계를 메우고 있다. 인간의 언어는 중립적일 수 없다.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언어는 편향적이다. 그렇기에 언어를 점유하기 위한, 의미를 획득하기 위한 싸움이 계속된다. 촘촘하게 세상을 감싼 것 같은 언어의 망 사이에서 돌출하는 의미들을 낚아채려 한다. 우리가 지금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는 거의 모든 언어는 백인, 남성, 중산층, 성인, 비장애인, 이성애자, 중심부(서울)에 사는 시각에서 구성된 것이다. 이러한 세계에서 ‘하지만 괜찮다, 다 괜찮다. 이제 싸움은 끝났다.’라고 생각하며, 우리 세계에 존재하는 ‘빅브라더’를 사랑하는 것은 오산이다. 의미를 그러쥔 자들의 기만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언어와 의미가 부유하는 이 세상은 그 자체로 전장(戰場)이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각자의 의미를 탄생시키려는 싸움에 던져진다. 부조리한 의미들의 틈에서, 문득 떠오르는 무언가를 갈망하자.

 

 

[최은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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