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이란 : 야구소녀 [영화]

영화 <야구소녀>를 만든 주수인의 신념
글 입력 2020.06.12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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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이상한 영화를 보았다. 어땠냐고 물으면 좋았다는 답이 나오는데, 뭐가 좋았냐고 물으면 답을 못하는 영화. 찝찝함도, 분노도, 위로도, 기쁨도 아닌 영화. 그래서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라 모든 것인 영화.


아카데미나 칸 영화제처럼 권위 있는 시상식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수상한 영화는 걸작이라는 칭호를 얻는다. 그 작품들은 꽤 비슷하다. 대중적이고, 사회를 비판하는 날카로운 메시지를 던지고, 그게 아니라면 소위 말하는 '눈뽕' 차는 영상미를 지녔고, 배우들의 연기가 돋보이고, 캐릭터가 입체적이다. 개중엔 수상했다는 사실이 기막힌 예도 있지만, 대개 열거한 요소를 갖춘 영화이기에 이해가 간다. 취향과는 별개로 어려운 것을 종합적으로 다뤘다는 점에서.


위대한 영화는 무엇일까. 영화 정보에 수상기록이 끝없이 나열된 영화? 혹은 실험적이고 기발한, 흔히 시대를 앞섰다고 평하는 영화? 클리셰 하나 없이 완전무결한 독특함을 가졌다고 해서 그 영화가 뛰어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전에 없던 독특함이 영화의 장점이라곤 말할 수 있어도 그 '사실' 자체가 위대하단 말은 안 나온다.


그럼 무엇이 영화를 위대하게 만드는가. 저마다 답은 다를 테지만 나는 단연코 '인물'이라고 말한다. 주인공의 환경과 배경은 과거를 만들고, 과거가 현재와 맞물려 미래를 완성해 간다. 그래서 영화를 볼 때면 한 사람의 생을 본다는 느낌을 받는다. 감히 전부라곤 할 수 없어도 그의 일부에서 전체를 추측할 수 있고, 이렇게 상상해보는 재미가 영화의 몰입도를 높인다.


꽤 길었던 서두 때문에 소재가 무엇인지 잊었을지도 모르겠다. 이제 본론이다. 본격적으로 영화 [야구소녀]를 특히 '주수인'이라는 인물에 맞추어 살펴보고자 한다.

 

 

*

스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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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소녀]는 김보라 감독의 단편영화 [리코더 시험]을 보았을 때 느낀 감상과 비슷했다. 독립영화인데 대중영화 같은 느낌. 게다가 일상적이고 뻔한 이야기인데도 몰입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지극히 우리가 사는 일상다워서 눈을 떼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남의 이야기는 멀찍이 떨어져서 볼 수도 있지만, 나의 이야기에서 내가 객관성을 가지고 제삼자처럼 들여다보는 건 불가능에 가까우니 말이다.


주수인, 주수인의 친구, 주수인의 가족, 주수인의 코치. 어느 하나 유별나게 톡 튀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은 내가 언젠가 들어본 말을 하기도 했고, 반대로 내가 과거에 했던 말을 듣기도 했다. 가장 많이 들은 이야기는 주수인이 자신의 어머니에게서 들은 말이었다. 이 얘기를 자세히 하기 전에 간단하게 줄거리를 살펴볼까.


영화 [야구소녀]는 야구를 너무 좋아하는 고등학교 야구부 선수, 주수인의 이야기다. 여기까지는 평범한 얘기다. 그런데 주수인이 '여성'이라는 점 때문에 언제나 별종 취급을 받으며 이야기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 특별한 사건 하나 없이도 주수인은 여자이기에 언제나 갈등을 겪는다. 주수인과 대적하는 대표적인 인물로는 주수인의 어머니를 꼽을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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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수인의 어머니는 현실에 산다. 꿈, 희망, 하고 싶은 일처럼 거추레한 것 말고 현실에서 가장 쓸모 있는 것, 즉 돈을 최우선으로 여긴다. 그럴 만도 하다. 남편은 돈벌이는커녕 방향도 제대로 잡지 못하고, 둘째 수영이는 초등학생쯤 되는 나이라 한창 잘 먹고 잘 자라도록 보살펴야 한다. 다행히 늦게나마 남편이 허황한 꿈을 놓고 현실에서 살고자 하고, 수영이도 그 나잇대 아이처럼 크고 있다. 지금 타이밍이 불안정한 상황을 바로 잡을 기회다.


그런데 첫째 주수인은 현실은 보지 못한다. 벌써 열아홉, 곧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다음 스텝을 밟아야 하는데 여전히 헛된 희망만 품고 산다. 프로야구 선수가 되겠다고. 그렇게 야구를 잘한다면서 아직 지명도 받지 못한 주수인이 어머니는 답답하기만 하다. 남편의 옛 모습이 떠오른다. 포기할 줄도 모르고 무조건 이상만 좇다간 주수인도 남편처럼 될지 모른다. 아니, 그럴 것이다.


어머니는 현실과 절대 타협하지 않는 주수인이 답답하기만 하다. 그래서 걱정을 삼키고 부정적인 말을 내뱉는다. 앞으로 어쩔 작정이냐. 철 좀 들어. 포기하는 게 바보 같은 거 아니야. 잔뜩 인상 쓰며 언성을 높이던 것에서 더 나아가, 어머니는 결국 주수인의 야구 글로브를 태우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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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에서 주수인의 입장을 들여다보자. 여자애는 하지 않는, 암묵적으로 할 수 없는 프로 야구 선수의 길. 누구도 가본 적 없기에 주변엔 온통 부정적인 이야기투성이다. 관둬라, 너 실력 없다, 가망 없다, 다른 길을 찾아라, 볼 회전력이 좋으니 차라리 핸드볼이라도 해봐라, 언제까지 그럴 거냐, 계획은 있느냐.


이상했다. 주수인은 온종일 저런 이야기를 듣는다. 그런데 포기하질 않는다. 자신이 야구를 못 한다는 말을 농담으로도 뱉지 않는다. 여태 해온 게 아까워서 그랬으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기엔 손에 피가 날 정도로 연습하는 주수인의 모습이 너무 진지했다. 진심으로 하고 싶어서, 이기고 싶어서, 잘하고 싶어서 주수인은 계속 뛰고 볼을 던지고 어깨에 힘을 주었다. 매 순간 눈에 불을 켜며 달려드는 애가 '야구만 해왔으니 할 줄 아는 게 이것뿐이라 해야 한다.' 생각할까. 아니다. 주수인은 진심으로, 야구를 계속하고 싶어서 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주수인은 평생 부정적인 말만 들었겠구나. 가장 칭찬에 가까운 말이 '여자애치고' 야구를 잘한다는 말 아니었을까. 자신을 깎아내리고 공격하는 목소리에 너무 익숙해졌을 거다. 그 말에 상처는 받을지언정 주수인의 집념을 뒤흔들진 못했다. 그래, 집념. 한치도 알 수 없는 열아홉에서 프로야구 선수라는, 꿈꿀 수 있는 20대를 만든 건 다름 아닌 주수인의 집념이었다.


신념이 한순간에 뚝딱 만들어진 것은 당연히 아니다. 리틀 야구단에 소속되었던 그 어린 날부터 약 십 년쯤 쌓아왔을 것이다. 야구가 좋다는 단순한 기호에 노력과 시간이 얹어져 야구에 관한 순수한 열정으로 자라났다. 여기에 주변인의 부정적인 시선으로 그 마음이 단단해졌을 테지. 원래 남들이 안 된다고 지레짐작하는 것은 깨부수고 싶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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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는 실패한 이들이 나온다. 프로 선수 입단에 실패한 코치, 시험에 실패한 아빠, '엄마'가 되면서 하고 싶은 욕망과 되고 싶은 열망이 거세된 엄마, 오디션에 매번 떨어지는 친구. 주수인은 그들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 잠시 흔들렸다가, 마음을 되잡았다가, 자존심에 상처를 받았다가, 끝내 이겨낸다. 실패한 이들의 도움으로 십 대의 끝자락에서 새로운 길을 찾았다.


가장 큰 변화는 다름 아닌 어머니다. 어머니는 매번 주수인의 꿈을 짓밟으면서 단 한 번도 주수인이 야구 경기를 하는 모습을 보지 않았다. 그랬던 어머니가, 첫 트라이아웃을 얻어낸 주수인을 보러 간다. 테스트를 진행하던 감독님은 참 치졸했다. 여자애치고는 잘하길래, 실력 검증을 하겠답시고 타자 선수 하나를 또 투입한다. 주수인이 꿈꾸는 미래의 싹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서. 그러니까, 뭣 모르고 설치는 여자애 하나 기죽이려고.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까. 주수인은 이겨냈다. 그리고 들어온 첫 번째 제안. 기업의 이미지를 좋게 만들어 줄 이미지 메이커, 프런트 역할을 주수인에게 제안한다. '우리'의 목적 달성에 아주 좋은 기회라는 달콤한 말과 함께.


놀랍게도 주수인은 이때도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프로 선수 계약이 아님을 아쉬워했지, 현실과 적당한 선에서 고개를 조아리지 않고 오히려 꼿꼿이 고개를 들었다.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주인공의 뚝심이었지만, 왠지 모를 안도감과 안쓰러움을 느꼈다. 자신의 신념과 현실을 맞닥뜨렸을 때도 신념을 지켰다, 그래도 현실의 벽은 사라지지 않는데 어떻게 하려는 것인가.


여기서 영화의 기능이 하나 드러난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말이 되는 상황으로 옮겨 놓았다. 주수인이 프로야구 선수 계약을 얻었다. 잔뜩 해진 운동화 대신 깨끗하고 말끔한 흰 운동화 하나를 얻고, 드넓은 야구장 한가운데에 섰다.


물론 주수인이 성공했다고, 그러니까 프로 2군에 들어갔다고 끝난 일은 아니다. 주수인은 더 힘들 것이다. 더 아파하고, 더 괴로워하고, 더 상처가 생기고, 더 싸워야 한다. 그러나 미래에 있을 아픔을 미리 걱정하고 안타까워하기보다는 주수인을 응원하고 싶어진다. 트라이아웃 때 함께 했던 유일한 여성 타자가 생판 모르는 주수인에게 '주수인 파이팅'이라며 응원해주었듯이. 주수인이 실제로 존재하든 캐릭터에 지나지 않든 외쳐 보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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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수인 파이팅.

하던 대로 하면 돼.

 

 

[박윤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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