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우유맛 행복 - 환상의 마로나 [영화]

난 너만 있으면, 최고로 행복해.
글 입력 2020.06.08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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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 Marona’s Fantastic Tale이다. 직역하자면 마로나의 환상적 이야기. 그러나 이것은 환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그 단어, 환상적이란 말을 무언가 낭만적이고 동화적인, 즉 즐거운 이야기라고 하자면은 말이다.

 

영화는 아무래도, 마지막 시점에서 시작하는 듯하다. 강렬한 크레용의 질감과 속도감이 마로나를 툭 스치니, 마로나의 색채는 아스팔트에 찰싹 달라붙어서, 곧 그 위에 칠해진 분필마냥 화해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영점의 영점’, 소실점에 이르러 짧은 생애를 돌이키기 시작한다. 시작에서부터 끝은 예고되었다. 모종 스산한 예감을 벌써 안고 서사로 빨려 들어가길 시작하지만, 그러나 곧 그 사실 자체는 잊힌다. 환상적인 이야기들이 장차 정신을 두들겨대는 탓이다.

 

환상의 마로나, 이 영화에서 환상적인 것은 오직 풍경뿐이다. 개의 낮은 시선에서 올려다본 세계는, 비단 그 공간감뿐 아니라 많은 것들이 달라 있었다. 그 시점에서 ‘인간의 세계’는 가히 두려운 반짝거림으로 쇄도하고 있었다. 나중의 ‘노란 숲’에 이르기 전까지, 인간의 세계는 끊임없이 점멸하고 흔들리는, 밤의 세계이다.

 

인간의 세계 안에서 인간은, 어느 하나도 유사한 형태를 공유하고 있지 않다. 뒤뚱대는 다리, 텅 빈 실루엣, 개구리 괴물의 의인화, 녹아내리는 형태 등, 그 모든 인간들에게 얼굴이 없다. 개의 시선이기 때문일 것이다. 오직 마로나에게 사랑을 주는 그들, 마로나의 ‘내 인간’에게만 뚜렷한 얼굴이 부여된다. 지극히 주관적인, 개의 시점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세계는 원근법과 물리법칙과 경계 등 일체의 것이 부정되고 녹아내리고 뒤섞이고 이리저리 흔들린다. 이것이 환상성, 강렬한 색채가 마구 쥐흔들린다. 3D도 아닌 것이 자꾸 눈으로 휙휙 날아들어 온다. 화면을 내내 가득 채운 ‘움직임’들, 거의 잠깐의 쉬는 시간도 없이 온 스크린은 움직이고 있었다.

 

이하는 스포일러이다.

 

그러나 줄거리를 접하고 영화관에 가셔도 아무런 지장이 없을 것이다. 개의 시선 속에서 인간의 세계는 녹아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스크린 속에서 도형과 기호들은 빠르게 지나가고, 많은 것들이 동시에 흔들거리고 있었기에, 스토리 라인은 채 붙잡기 어려웠다.

 

줄거리를 알고 보신다 하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환상적인 풍경들, 세계의 구성물들과 기호들이 마구 흔들리고 해체되고 흩날리며, 시선 속으로 강타하듯 날아들어 오는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는 환상적인 색채의 폭풍을 경험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다. 충분히 즐거울 것이다.


 



 

마로나의 이야기는 이름의 일대기이다. 아홉 남매 중 아홉째로서 자신의 첫 이름인 ‘아홉’에서, 어떻게 우리의 마로나가 되었는 지까지의 이야기. 그리고 그 곁, 마로나의 행복에 관한 이야기. 마로나에게 행복이란, 분명 단순하고도 가까우며 당연한 것이었다.


“행복은 숫자 9의 모양이다.

그것에선 우유 맛이 난다.”

 

숫자 9는 자신의 이름이고, 우유 주머니의 모양이기도 하다. 그것에선 우유 맛이 난다. 엄마의 품속에서 느낀 첫 번째이자, 유일한 행복. 행복은 혓바닥이기도 해서, 그 자신의 온몸을 마구 핥아 씻어내린다. 마로나에게 행복이란 가장 원초적이고 보편적인 것이자 마땅한 것인, 가족이었고 그 최초의 행복은 최초의 이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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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자매들과 어머니, 열 식구의 마땅한 행복은 역시 오래가질 못했다. 우리는 그것을 너무 잘 알아, 저 행복한 생명의 해맑음 앞에 벌써 슬퍼 온다. 잘 알면서도, 채 무시하던 뭇 생명의 행복들.

 

옛 기억이 떠오른다. 새끼 8마리 중 6마리를 입양 보낸 후, 어미 개의 표정 지음이. 먼 데를 보고 한동안은 짖기만 하던 그 생명에게, 그러나 이입하고 공감을 나누기엔 내가 너무 이기적이었다. 그리곤 슬프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개는 다시 나를 보며 웃는다. 그래서 내게 개는 너무 슬픈 동물이다, 아직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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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고려조차 없이 버려진 개는 새 주인과 조우한다. 첫 번째 주인인 ‘마놀’, 그에 이르러 드디어 인간에게 얼굴이 주어진다. 노오란 전신에 빨간 줄무늬가, 가만있을 새도 없이 촐랑이며 움직인다. 곡예사인 마놀의 걸음걸이는 녹아내리고 있었고, 전신의 빨간 줄무늬는 퉁기어 나리지만, 마로나는 그가 퍽 괜찮은가보다.

 

그의 집은 건물의 옥탑, 거기엔 두 번째 행복이 기다리고 있다. 뼈다귀와 뼈다귀를 숨길만 한 장소와 보금자리. 마놀은 그것만으론 영 변변찮아 미안해하는 눈치지만, 마로나로서는 형제들을 떠올릴 만큼이나 송구한, 놀라운 선물이다. 인간에게 그저 선사 받는, 최초의 선물.

 

마놀은 암컷인 마로나에게 아들이라고 부르다간, 이름 하나를 지어주었다. ‘아나’. ‘마놀 드 아나’, 즉 ‘마놀의 아나’. 이것이 ‘아홉’의 두 번째 이름이다. 이름은 그러나, 선물이었을까. 잘 알지 못하겠다. 어땠든 둘 모두 서로에 대한 사랑은 짙었다, 아직은. 텅 빈 옥탑방, 하늘로 열린 창문 너머로 날아가 둘은 춤을 춘다. 그것은 놀랍도록 아름다웠다. 곧 흩어질 놀랍도록 아름다운 것들, 그래서 모종 슬픔이 함께 내게로 찾아왔다.

 

마놀은 곡예사로, 길거리에서 곡예를 하거나 술집에서 곡예를 하며 생계를 전전한다. 마놀이 곡예를 하고, 마로나는 즐거이 입에다 모자를 물어 금화들을 모은다. 마로나의 덕인지 금화는 후했고, 그러면 마놀이 약속했던 핫도그를 사이 좋이 나눈다. 퍽 정다운 모습이다, 아직은.

 

마로나는 인간과 있으며 한 가지를 배운다. 인간의 행복은 언제까지고 갖지 못한 것에 대함이라는 것을, 그 이름은 꿈이다. 그런 인간의 행복을 마로나는 이해할 수 없다. 마로나에게 행복이란 먼 것이 아닌, 지금 당장의 것이고, 허황되거나 부풀려지거나 더욱 큰 것이 아닌, 여기 조그마한 것들, 예컨대 개뼈다귀와 그 뼈다귀를 숨길 곳과 보금자리와 내가 밤을 지켜줄 ‘내 인간’의 존재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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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그에게는 꿈으로의 기회가 찾아오고, ‘달의 서커스’로 그를 인도하려는 스카우터는 마로나를 부정한다. 마놀에게 손쉬운 선택을 선사한다. 꿈과 아나 사이에 번뇌하는 마놀에게서는 이제 ‘이별의 냄새’가 풍긴다. 마로나는 이별을 배우며, 매일 마지막처럼 ‘내 인간’의 얼굴을 핥아야 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언젠가는, 언젠가는 반드시 진짜로 이 행복에 마지막이 오기 때문이다. 너무 행복한 것에는 반드시 끝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

 

그다음 ‘내 인간’은 안갯속의 이스트반. 받은 이름은 ‘사라’이다. 거리에 지쳐 잠든 마로나를 굽어 바라보는 그 표정에는 마음 씀이 어리어 있다. 그 진심은 ‘그 인간’을 ‘내 인간’으로 만들고, 곧 얼굴에 색과 개성을 부여한다. 마로나는 그가 건네는 소시지 냄새를 맡으며, 곧잘 ‘사랑에 빠진다.’ 그 냄새를 맡으며 움직이는 마로나의 코는, 이제 보니 하트 모양이었다.

 

떠나감과 이별을 배운 마로나는, 이제 인간에게서 풍기는 불길한 냄새를 맡을 줄을 안다. 이스트반과 사랑에 빠지지만, 곧잘 그에게서 불길한, 혹은 불안한 냄새를 맡고 공황을 겪는다. ‘인간이 마음에 부담을 느끼면 방치할 조짐을 보인다’며.

 

이스트반은 그러나 돌아왔다. 불안해하는 마로나를 어머니의 집에다가 낮 동안 맡긴다. 기다리는 밤이 오면, 이제 마로나가 이스트반의 밤을 지킨다. ‘이게 개의 행복이다, 자는 동안 지켜줄 나의 인간을 갖는 것.’ 사라의 다음 행복은 이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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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트반의 어머니도, 그리곤 이내 만나게 된 아내에게도 얼굴이 없다. 그들이 마로나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고, 그것을 마로나가 잘 알기 때문이다. 이스트반의 아내는 마로나를 굉장히 반기지만, 그녀에 에겐 얼굴이 부여되지 않았다. ‘처음부터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이 인간은 개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마로나를 반기던 그녀의 마음은, 이미 쉬이 져버릴 운명이었다. 그렇게 이스트반과도 마지막이 찾아온다. 마지막 공던지기 놀이. 마지막이라고 말하는 이스트반의 표정은 아직 밝고 심지어 해맑게 설레이지만, 그가 풍기는 마지막의 냄새는 ‘녹슨 냄새, 그리고 낙엽의 냄새.’

 

마로나의 시점에서 바라보는, 공을 던지고 있는 이스트반의 해맑은 얼굴. 개가 공던지기 놀이를 좋아하는 까닭은, 마로나에 따르자면 ‘그것을 인간이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장차 자신이 없이 이스트반은 이 좋아하는 공던지기 놀이를 할 수 있을까. 주인은 공을 주우러 가는 것을 싫어하는 데 말이다.

 

*

 

떠난다. 밤과 인간의 세계, 도로를 무작정 내달리어 지쳐 잠든 곳엘 그리곤 또 다른 인간이 다가온다. 개는 인간을 필요로 하고, 인간은 개를 궁금해하는 것이 서로의 운명인 걸까. 어찌 되었건 일방적 사랑이라는 것은 참 마음 아픈 일이다. 인간의 사랑에는 조건이 너무 많고, 한정이 더 많고, 기한이 덧대어져 있더라. 그러니 항상 더 많이 사랑하는 존재가, 언제나 지는 법이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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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로나가 눈을 뜬 곳은 드디어, 노란빛 폭하니 따스한 세계, 풀숲과 자연 속이다. 아직 철부지 소녀인 솔랑주는 마로나에게 다가오고, 마로나는 이젠 지쳐버리었다. 단단히 학습한 탓이다. “행복은 고통으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그럼에도 그 작은 소녀를 따라간다.

 

솔랑주에 이르러 마지막 이름인, 마로나를 받는다. 아홉, 아나, 사라, 마로나. 마로나에게는 ‘개뼈다귀 보다 쉽게 던져대는 이름들’이다. 툴툴대는 할아버지와 지쳐버린 싱글맘의 사이에서, 오래 있지 못하리라는 비관적인 생각과 달리 그 집에 폭 머물게 된다. 쓸쓸한 할아버지와 지쳐버린 싱글맘에게는, ‘개가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로나 또한 머물 곳이 필요했고, ‘내 인간’을 필요로 했다. 마로나가 또한 지쳐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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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빠르게 지난다. 안대에 삐삐 머리를 하고 있던 처음의 솔랑주는 어느새 긴 생머리를 하고, 립스틱을 바르며, 핸드폰과 페이스북에서 고개를 떼지 못하는 시기에 접어들었다. 모든 게 쉽게 싫증 나는 소녀. 마로나는 그러나 너무 지쳐있던 탓일까. 아니면 다른 인간들이 또한 그 지붕 아래 있었기 때문일까. 이 여실한 냄새를 맡고도 그 곁에 머물러 있는다.

 

자신이 데려온 개에게 싫증을 내는 솔랑주, 실은 카카오톡과 페이스북과 친구들과 립스틱이 더 흥미롭기 때문이다. 산책은 그녀의 책임, 그러나 마로나를 데려올 때의 솔랑주는 이제 없다. 인간은 늘, 슬프게도 변하는 동물인가보다.

 

등 떠밀리듯 마로나를 산책시키는 솔랑주, 언제나 목줄은 마로나가 스스로 물어오곤 한다. 집을 나와 차도와 길을 건너 처음 만난 그 노란 숲에 이르러선, 솔랑주는 아무런 나무에다가 마로나를 묶어두곤 떠나려 한다. 기약 없는 기다림을 태연히 요구한다. 솔랑주에게는 사실 약속의 구실이 필요했던 것이다.

 

뒤도 돌아보지 않는 솔랑주는 그를 뒤따르는 마로나를 모른다. 핸드폰에서 고개를 떼지 못한 채 버스에 오르고, 그 버스를 마로나는 따라 달린다. 일전 이별의 순간마다 차도를 질주하였던 때와 같이, 그 버스를 뒤따르며 마놀과 이스트반의 환영을 추억처럼 본다. 마로나에게 질주는 무엇이었을까. 그 질주가 가장 사랑스럽고 쓰라린 환영들을 이렇듯 상기시키는 까닭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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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에서 내린 솔랑주, 차들은 실루엣이 허물어진 정도로 내달리고 있고, 그녀는 아직도 핸드폰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솔랑주를 지키기 위해 차에 뛰어든 마로나, 차에 치인다. 그리곤 첫 장면. 짧은 생이었다.

 

이런 때에 이르면 인생이 영화처럼, 주마등처럼 스친다고 하지 않던가. 이제 마로나의 시선은 회고를 마치곤, 아득히 클로즈 아웃된다. 도시에서 지구로, 지구에서 우주로, 더 아득한 우주와 천체들을 향해서. 그리고 천체들은 이전부터 계속 그러했듯, 계속 이지러지게 흔들리며 배경을 채운다. 그리고 곧 암전.


**

 

영화는 잔인하게 아름답다.

 

그 안의 인간들은 너무 무심했고, 그 무심함은 나의 모습이기도 하다. 저 모습들은 편안함과 귀찮음과 손쉬운 해결책과 ‘어쩔 수 없음’ 등에 단단히 사로잡힌, 나를 비춘다. 그 곁에서 마로나는 인간을 너무 사랑하고, 계속 사랑한다.

 

사랑하기만 했다. 보답에 대한 의지가 없이 뻗어나오기만 하려는 사랑. 나는 그것이 두렵다. 내가 채워줄 수도, 심지어 받아낼 수도 없는 것이기에. 나는 개의 모습을 하고 있는 화자 위에 많은 다른 사랑들, 사랑하기만 하며 날 스쳐 간 모든 존재들이 떠올라 아프다.

 

그래서 이 아픈 진실은 잔인하게 다가온다. 더 사랑하는 이가 지는 것이라는. 또한, 우리들의 사랑에는 조건이 너무 많고, 한정은 더욱 많고, 기한이 덧대어져 있더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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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별것 없을 우리의 이야기에, 환상의 색채와 공간이 부여되니 눈을 뗄 수가 없다. 서사와 달리, 서사와 별개로 떨어져, 모든 순간을 구성하는 색채와 이미지들은 너무도 환상적으로 아름다웠다.

 

그래서 더 잔인하다. 이렇듯 아름다운 도형으로 짜인 슬픔이라니. 폭 빠져 사랑할 수도, 그렇다고 아예 눈을 돌리어버릴 수도 없다. 영화관을 들어서는 순간부터, 내겐 선택권이 없었던 것이다. 환상적인 도형에 가둬둔 슬픔을, 나는 슬프고 괴로운 눈으로, 또한 황홀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행복에 대하여. 개의 일생을 따라가며 작품은 역설적으로, 우리 모두의 행복에 대해 계속 질문을 던져댄다. 개의 간단하고 단순하며 가까운 행복의 곁에서, 인간의 어려운 행복은 맑은 거울 위에 반사된다.

 

그러고 보면, 나도 어느새 저 인간의 슬픔으로 짜인 명제를 받아들이고 있었나 보다. ‘많이 사랑하는 이가 지는 것이라는.’ 그러고 보면 모든 것을 해맑은 눈으로 기대할 수 있고, 즉 듬뿍 사랑하며 기다릴 수 있던 옛 나는 어느새 지워져 있었다.

 

큰 사랑은 보통 이루어지지 않게 마련이었고, 또 그 큰 사랑은 질 때 되려 큰 아픔이 되어 자아에 생채기를 내버리다. 그러니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차라리 사랑을 슬며시 흩어내고 지워버리는 선택을 했던가. 그렇게 차라리 잿빛 속을 찾아, 권태에 안기어 있는 지금 모습이 돼버린 것일까 하는 생각을, 영화는 내게 쥐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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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도하고 고고하게, 아닌 척을 하며 슬며시 기다리고 기대하는, 안전한 사랑에 종착한 우리 모습이 3의 시선으로 그리어진다. 그것은 분명 나의 모습, 마로나의 조건 없고 두려움이 없어 한정도 적은, 저 ‘깨어질 순수의 거울’ 위에 떠오르는 내 모습이고 네 모습이다.

 

또한 비추이는 것은, 언제까지고 더 높은 것, 닿지 못한 것, 환상적인 것을 갈구하며 목말라 하는 내 모습이기도 하다. 가진 것은 당연한 듯 지워지기 시작한다. 나는 내 방 안에 무엇이 있었던지도 지금 전부 기억해낼 수가 없겠다.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싶어 했던 때문일까. 그 시작은 분명 단촐했었는데 말이다.

 

가진 것은 당연한 듯 지워지기 시작한다. 손안에 거머쥔 모든 것들은 잊혀짐으로. 그러니 새로운 사랑을 찾아 나서게만 되지. 결국, 내 가지게 되는 것은, 더 많은 ‘잊혀질 것’들이다. 하얗게 탄 재로 가득 찬 방 안에서 어느 밤에는, 그러므로 그런 내가 설워지기도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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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포스터에 삽입된 문구,

“난 너와 함께라면 최고로 행복해.”

 

 

왜 나는 이 문장에서, 훈훈함은커녕 절절함만을 읽고 있는 것일까. 그것이 내가 잃어버린 것이고, 그것이 내게 죄책과 아픈 사실을 일깨우는 것이고, 그것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세상 가장 단순한듯 보이면서도, 가장 어려운 꿈이기 때문이다. 너와 함께면 충분하다는 말은.

 

‘행복은 숫자 9의 모양이다. 그것에선 우유 맛이 난다.’

 

내 행복의 모습은 무엇이었고 지금 무엇이 되어 있을까. 이제 규명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이지러진 얼굴을 한 내 행복은… 너무 많은 것들이 지나왔고, 재로 무너진 껍질의 얼굴을 하고 있고… 아무래도 나는 잃어버린 것일까. 그럼에도 또 무언가를 기대하고, 즉 꿈을 꾸고, 또 사랑을 기다리는 나의 장차 행복이란… 뼈다귀 뉘일만한 이 포근한 공간 속에서도 행복할 수가 없던, 나의 행복이란…

 

이 몸서리 치게 쓸쓸한 생각 앞에서, 마로나가 해맑게 뛰논다. 나는 오래도록 아예 잊혔던 생각 하나를 대하고, 고요하고 절절한 눈으로 이 밤을 헤매인다. 환상을 바라보는 눈빛으로. 그것참 달큰한 쓸쓸함이다. 행복을 꿈꾸기조차도 지친 이라면, 꼭 한번 이리로 돌아오시길. 마로나의 눈길 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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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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