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소설 길잡이, 소설신론 [도서]

조남현의 소설신론에서 길잡이 별을 바라보다
글 입력 2020.06.04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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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문학은 문학을 배운 사람이 하면 안 된다는 말을 들었다.


문학에 대한 지식이 그에 대한 창조성을 침해할 수 있다는 뜻으로 짐작된다. 이 말의 ‘문학’의 자리에 ‘소설’이 들어간다면 어떨까. 나는 소설신론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과연 문학(소설)은 문학(소설)에 대해 아는 사람이 쓰면 안 되는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소설은 읽을 거리로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장르라고 생각한다. 그런 소설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알고 싶어 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크기변환]책들 사진.jpg

 

 

아무리 신선하고 창조적인 발상이 있을지라도, 또 그 발상이 탁월하게 이야기로 발현된다 해도 소설의 양식에 맞지 않으면 읽기 편하고 읽기가 가능한 것이 될 수 있을까?


소설에 대한 지식은 소설을 쓰는 것과 더불어 소설을 이해하는데도 중요한 도움닫기로 작용하기 때문에 소설에 대해 아는 사람만이 소설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신론 덕분이다.



이 책은 서양의 소설이론서 중 난해한 책에 도달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할 수 있다. 이 책을 보고 소설을 제대로 읽는 방법과 연구하는 방법을 알게 될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고평된 소설이론서를 선택하고 읽을 수 있는 계기가 열렸으면 좋겠다. 그럼에도, 소설신론은 소설양식과 한국소설을 원점에 서서 알고자 하는 독자들을 위해 집필한 것이라는 애초의 취지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조남현, 소설신론,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04, 머리말.



머리말에 나와 있듯 이 책은 서양의 유수의 소설이론서들을 많이 인용하고 있다. 노스럽 프라이, 레너드 데이비스, 포스터 등의 저자들이 인용되었고 이외에도 다양하고 저명한 저자들이 인용되어 있다.


소설신론은 이러한 서양의 저자들의 이론을 인용하면서도 한국소설의 예를 들어 이해를 도울 뿐만 아니라 한국소설을 서양의 이론에 적용한다. 소설 이론이라는 게 서양에서 발달되었다는 이유도 있지만 한국소설의 걸작에도 소설이론이 녹아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게도 한다.


인용이 많아서 번역투의 문체가 거슬린다면 이론들의 신뢰도가 위로가 될 수 있다.



이 책의 제목으로 쓴 ‘신론’은 새로운 시대, 즉 최근에 발표된 이론이라는 뜻보다는 오늘의 한국소설을 새롭게 보게끔 하는 이론이라는 뜻에 가깝다. 아무리 오래 전에 나온 이론이라고 해도 오늘에 와서 활용도가 높으면 신론이 되는 것이고, 반대로 아무리 최근에 나온 이론이라고 해도 설득력이 떨어지면 신론으로 평가받기는 어렵다. 한 마디로 시간보다는 질이 문제다.

 

같은 책, 머리말.



소설신론은 머리말에서 볼 수 있듯 여러 곳에서 신론들을 끄집어 온다. 동양의 소설관에서 시작하여 서사장르론, 서사구조론, 소설유형론, 주제론, 작중인물론, 플롯론, 문체론, 작가 본질론, 독자 본질론을 다루고 있지만 소설신론에서 내가 가장 감명 깊었던 부분은 작중인물론에서 소설의 인물에 대해 말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소설적 진실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 이 부분은 소설의 인물이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서술한다.

 

 

소설의 주인공을 문제적 개인이나 악마적 인물로 부르는 것은 이제는 상식화되었다. 소설론에서의 문제적 개인은 진정한 가치를 향해 모색하고, 탐구하고, 고뇌하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 - 같은 책, 266쪽


소설인물은 극도로 만화경과 같이 된 세계에서 상실하고, 불확실하고, 주저하며, 당황해하는 존재로서 그려질 때에만 진실할 수 있다. - 같은 책 266쪽에서 재인용.



현실이 전혀 낭만적이지 않은 진실들을 보여주며 자기합리화를 위한 거짓을 늘어놓을 때면 소설책을 펼쳐 소설 인물이 소설적 진실을 실현하는 공간으로 들어가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현실이 견디기 어려울 때 나는 가끔 내가 소설적 인물이라는 상상을 해보는데 이게 시간이 많은 사람의 유희거리라고만 생각할 일은 아니다. 다른 주제들에서도 소설이란 어떤 것인지 쉽게 알 수 있게 설명해놓았듯 소설 신론이 말해주는 것을 살펴보자면 소설적 인물도 상실하고 불확실하고 주저하며 당황해한다.


이 공간이 현실이 아닌 소설의 문제적 공간임에 다른 점이 있다. 나의 이러한 상상은 소설책에 가 닿아 결국 독서로 이어진다. 현실은 온화하고 따뜻한 둥지가 될 수는 없지만 만화경 같은 소설 속 공간이 누구나에게 아지트가 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소설 신론은 이 이유를 잘 설명하고 있다.

 


[김수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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