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역사, 삶을 집어삼키다 - 패왕별희: 디 오리지널 [영화]

글 입력 2020.06.01 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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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신비롭고도 마음 아픈 일이다. 현실의 모습 그 이상을 추구하지만, 현실과 결코 동떨어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특히 예술의 주체인 예술가의 삶이 그렇다. 시대적, 사회적 상황에 따라 예술가의 삶은 흔들릴 수밖에 없고 어떤 식이든 작품 세계에도 변화가 일어난다. 예술의 완성에 자신을 모두 바친 예술가에게, 감내해야 할 삶의 파고는 그 누구보다 크기 마련이다.

 

역사 앞에서 고통과 위기를 겪는 예술가의 모습을 그린 영화들은 수없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패왕별희>에서 보여주는 주인공 ‘청데이’의 삶은 관객들에게 있어 특히 처절하게 다가온다.


1900년대 초중반 중국 근대사 한가운데 수난을 겪는 경극배우 ‘데이’의 모습, 그런 데이가 연기하는 ‘패왕별희’ 속 우희의 마지막 모습, 그리고 데이와 우희를 모두 연기한 배우 장국영의 만우절 비극이 모두 하나로 겹쳐지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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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부분의 줄거리: 비극의 시작


 

영화는 1966년 문화대혁명이 일어나고 11년이 지난 이후, 볼품없고 초라해진 경극배우 청데이(장국영)와 단샬루(장풍의)의 모습을 비추며 시작한다.


화려한 경극 분장으로 초한지 속 항우와 우희의 모습을 한 그들은 어둡고 텅 빈 극장에서 조명 하나에 의지한 채 ‘패왕별희’의 한 장면을 연기하기 시작하고, 카메라는 장면을 전환하며 본격적으로 그들의 과거를 보여주기 시작한다.

 

1900년대 초, 육손이로 태어난 ‘두지’(청데이의 아명)는 어머니에게 버림받아 강제로 경극단에 입단하게 된다. ‘시투'(단샬루의 아명)는 기댈 곳 하나 없는 두지를 유일하게 보살펴주고, 그렇게 두 사람은 최고의 경극배우가 되기 위해 어린 시절 내내 학대에 가까운 선생들의 모진 체벌을 견딘다.

 

몇 년의 시간이 흘러 청소년이 된 그들은 경극 ‘패왕별희’의 주인공 항우와 우희 역할을 맡아 첫 공연을 한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두지는 공연을 관람한 당대의 권력자 장 내관에게 성적으로 유린당하게 되며 자신의 성 정체성을 잃어간다. 경극배우로서의 삶과 온전한 남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맞바꾼, 일종의 ‘사회적 거세’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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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간이 흘러 청년이 된 그들은 마침내 사람들의 환호와 박수를 한 몸에 받는 당대 최고의 배우 청데이와 단샬루가 된다. 데이는 고통으로 가득 차 있던 자신의 유년시절의 버팀목이 되어준 샬루를 사랑하지만, 샬루는 유곽의 접대부인 주샨과 결혼하게 되고, 때맞춰 시대적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삶과 관계에 본격적인 균열이 발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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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그 시절, 그 감독, 그 배우여서 가능했던 명작



앞서 이야기한 초반부의 줄거리 이후, 영화는 세 시간에 달하는 러닝타임동안 중국의 근현대사가 데이와 샬루, 주샨 세 사람의 삶을 어떻게 파괴시켜 가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특히 결말에 치닫을 즈음 등장하는 문화대혁명(*1966년부터 10년간 마오쩌둥에 의해 주도된 사회주의 실천운동이다. 이 시기 경극 또한 구시대의 산물로 간주되어 엄청난 탄압을 받았다.)의 인민재판 장면에서 이 작품의 비극성은 절정으로 치닫는다. 처절하다 못해 광기어린 세 배우의 연기와 타오르는 불길을 활용한 시각적 연출이 완벽히 어우러져, 관객에게까지 그들의 상실감과 처참함을 그대로 전이시킨다.

 

그리고 바로 이 점 때문에, 나는 <패왕별희>를 오직 ‘그 시절, 그 감독, 그 배우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명작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감히 짐작하건데, 향후 2, 30년 동안 이 작품만큼 공산주의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내용을 담은 영화는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공산주의 앞에서 한껏 비굴해지며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한 ‘샬루’처럼 이 영화의 감독 천 카이거 또한 현재는 중국의 공산주의를 선전하는 주제의 작품들을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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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러한 중국 정부의 영향 때문인 것인지 영화 자체를 쉽게 보거나 구할 수 없는 것은 매우 아쉬운 점이다. 실제로 93년 개봉 당시 오리지널 버전에서 많은 부분들이 삭제되었고, 이번 오리지널 재개봉 또한 한국에서만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모든 아쉬운 점을 뒤로하고 다시 이 영화를 논하자면, 분명 작품성, 미장센과 각종 연출 기법, 미술과 음악, 배우들의 연기까지 모든 면에서 2020년 현재 만들어지는 대부분의 영화를 압도한다. 한마디로 <패왕별희>는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이라는 타이틀을 얻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영화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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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만인의 연인 ‘장국영’에 대하여



한편 영화 <패왕별희>는 개봉 후 오랜 시간이 지난 오늘날, 배우 장국영이 남긴 삶의 궤적이라는 또 하나의 타이틀을 덧입어 더욱 특별한 의미를 가진 작품이 되었다.


장국영의 또 다른 작품인 <아비정전>과 <해피 투게더>를 ‘그럭저럭 괜찮았다’는 인상으로만 기억했던 나에게도, 그가 연기한 데이의 모습은 엄청난 감정의 파동을 불러 일으켰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데이가 한마디로 ‘살아있고도, 내내 살아있지 않았던 캐릭터’라고 생각했다. 경극은 데이의 인생 전체를 관통했고 데이 또한 경극에 온 인생을 바쳤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유일하게 연기하는 순간을 제외하고 죽은 영혼을 부여잡고 숨쉰채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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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의 비극이 스크린을 수놓는 동안, 오래 전 TV에서 우연히 접했던 장국영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함께 떠올라 화면 위로 겹쳐졌다. 만우절이던 2003년 4월 1일, 홍콩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의 24층 객실에서 투신자살한 그의 죽음에 많은 사람들이 ‘만인의 연인이 떠났다’며 슬퍼했다고 하는데, 데이를 보며 그 이유를 선명하게 알 수 있었다.


스크린 속 그의 표정, 말투, 손짓 모든 것이 완벽하게 청데이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세상의 모든 슬픔들을 다 가두어 놓은 듯한 눈빛조차도 말이다. ‘마음이 피곤해 더 이상 세상을 살고 싶지 않다’던 그의 유언이 데이의 모습과 겹쳐져, 며칠간 깊은 잔상을 남기기도 했다.

 

분명히 17년 전 거짓말처럼 세상을 떠났지만, 그는 그렇게 영원한 ‘데이’가 되었다. 피폐해진 모습으로 검을 품에 안은 채 공허한 눈빛을 띄우고 있던 청데이로서의 장국영을, 나 또한 이제부터 그리워하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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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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