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어디선가 사랑은 불초상 봤어요? 물으며 시작되고 [도서]

피리부는여자들-2
글 입력 2020.05.30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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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리즈는

총 세 편의 글로 구성되었습니다.

 


피리 부는 사나이를 따라간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더래요- 라고 상상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피리 부는 여자들을 따라가면 어떻게 될까? 나는 그곳에 가보고 싶다. 여자들이 만들어갈 광활한, 거울 없는 우주에서 어푸어푸 맘껏 유영하고 싶다. 여자들의 세상으로 이끄는 피리 소리 같은 책이 이 험난한 세상에 나왔다. “피리 부는 여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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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리 부는 여자들 (이하 피리부)”는 여성 간의 생활, 섹슈얼리티 그리고 친밀성을 다룬다. “여자의 적은 여자”를 주창하며 여성 간의 연대를 편히 볼 수 없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자들의 모임은 무언가(아마도 남성이) 결핍된 것으로 여기는 이성애 과몰입 사회에서 이 책은 그야말로 신세계다.


그러나 터무니없지 않다. 그 신세계는 각자의 삶 어느 부분엔가 존재했던 세상이다. 나는 언제나 그 세계를 갈망하고 있었다. 피리 소리를 따르는 긴 행렬이 보인다. 언제부터 이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참으로 감미로운 소리다.

 

 

 

끝나지 않는 춤을 추고 (서한나)



나의 어릴 적 별명은 ‘냉혈한’이었다. (사전상으로는 인정도 없는 냉혹한 ‘남자’를 이르는 말이지만) 연애도 짝사랑도 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늘 누군가(주로 남자)를 좋아하는 중학생 여자아이들 무리 속에서 나는 그 어떤 남자에게도 설렘을 느끼지도 못했고 사귀고 싶다는 마음이 들지도 않았다. 나에게 오히려 사랑이라는 것은 여자 친구들에게 느끼는 동경과 애틋함, 격려와 응원의 마음의 모양과 더욱 닮아있는 듯했다.

 

남자에 관심이 전혀 없던, 오히려 나보다도 더 사랑과 거리가 멀던 친구들도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남자 사람과의 연애를 시작했다. 나는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어안이 벙벙했다. 보고 배운 게 그뿐이라 그런 것일까. 우리가 배워온 사랑의 형태는 그게 전부였고, 사랑이라는 것은 감정이라기보다는 학습된 반응에 불과한 듯 보였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고 학습 받은 것들의 경계 바깥에 있던 존재들은 어느샌가 사라지고 없다.

 


이름을 붙이지 못한 관계는 어디까지 닿아도 되는지 모르는 관계가 되었다. 아무리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비슷한 말을 찾아다녀도 이 상태를 설명할 수 없었다. (P.65)


 

나는 항상 여성이 ‘대상’이 되는 사랑만을 보아왔고 그것이 사랑의 전부라고 믿어왔다. 그러나 서한나의 글과 경험은 나에게 여성이 ‘주체’로서, 그리고 그 주체로서 느끼는 감정들이 상대방에 의해 종속되지도 허락받지도, 조작되지도 장려되지도 않는다는 사실이 경이로웠다.


그리고 그가 다루는 사랑은 언제나 영원함을 약속하지도 않는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하 불초상)>의 엘로이즈와 마리엔느가 그러했듯,여성들의 사랑은 판타지로 남지 않는다. 어쩌다 헤어지기도 뜸해지기도, 다시 이어 붙여지기도 <벌새>의 유리와 은희처럼 그냥 사랑은 사랑에 지나지 않는다.

   


나랑 같이 서울에 갈래? 묻던 애와 헤어졌고 다른 나라로 유학 갈래? 했던 애랑도 헤어졌다. 허리 끊어지게 울고 나서도 좋아할 사람은 계속 생겼다. “언니 그건 지난 학기잖아요.”이건 <벌새>의 유리 대사이면서도 내게도 요긴한 말이었다. 애인과 나누는 대화는 조금씩 달라졌다. (p.89)


 

여자들은 언제나 사랑이거나 사랑과 가까운 관계에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피리 부는 여자들”을 읽고 켜켜이 쌓아두기만 했던 내가 이해하지 못했던 세상들을 찾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남성 언어로 쓰이고 읽히는 그 모든 사랑 서사들이, 그 모든 여자의 관계들이 어째서 나에게는 다소 먼지 묵은 냄새로 맡아졌는지 이해되었다.

 

나도 내 감정과 경험을 어떤 관용적인 표현이나 틀에 박힌 표현이 아닌, 나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내 언어로 사랑과 사랑 비슷한 것들을 쓰고 읽고, 말하고 읊조리는 세상이 오기를 바란다.


사실, 나는 요즘 무척이나 행복하다. 여자들의 언어는 내가 잊었던 것들을 다시 깨우는 힘을 가졌다. 그 힘 안에는 정말이지, 사랑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보인다.



우리가 서로를 보면, 보기만 하면 애인이 되거나 무언가가 됐다. 누굴 열심히 좋아하는 동안 나도 무언가가 됐다. 사랑을 예감하면 말이 쏟아졌다. 우리가 만나지 않으면 세상은 어떻게 되는 거지, 어디선가 사랑은 “불초상 봤어요?” 물으며 시작되고, 그건 영화보다 가까이 있을 것이다. (p.89)


 



[황현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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