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인간의 조건 [도서]

글 입력 2020.05.29 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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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그림을 보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무채색의 색감들과 조각난 형체들. 단숨에 피카소를 떠올리게 되지만, 그 유명한 《게르니카》는 아니다. 다시 그림을 찬찬히 살피면 묶여 있는 손과 뒤얽힌 세 구의 시체가 눈에 들어온다. 맞다. 이 작품 역시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는 작품이다. 2차 세계 대전 직후 1946년에 발표된 작품 《납골당》이다. 포로수용소로 끌려간 사람들이 어떻게 가스실에서 죽어갔는지, 살기 위해 발버둥 쳤는지 표현한다. 피카소의 작품처럼 무채색으로 홀로코스트를 묘사한 작품이 있다. 아트 슈피겔만의 만화 『쥐』이다.

 

아트 슈피겔만의 『쥐』는 만화 작품으로는 유일하게 퓰리처상을 수상한 작품이며,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인 슈피겔만의 아버지 블라덱 슈피겔만의 삶을 통해 수용소의 참상과 그 경험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그려냈다. 그래서 만화는 크게 두 이야기 축을 가지고 전개된다. 세계 2차 대전 전부터 홀로코스트까지의 아버지의 경험, 만화를 그리는 아들 아트 슈피겔만의 관점에서 바라본 현재, 이 두 축은 교차되며 각자의 내용을 더 입체적이고 풍부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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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해주는 방식으로 전개되고, 중간중간에 노쇠한 아버지와 장성한 아들의 현재가 삽입된다. 처음 읽으면서는 홀로코스트 이야기가 더 궁금해서 빨리 읽고 싶은 마음에 현재 이야기를 건너뛰고 싶었지만, 책을 읽어갈수록 현재의 이야기의 비중이 적지 않은 이유를 깨닫게 됐다. 마치 영문법의 ‘현재완료’처럼 아버지가 겪었던 과거의 홀로코스트의 경험은 삶에 새겨져 현재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홀로코스트의 참상만큼이나 아들과 아버지가 겪는 현재가 중요한 관점이 된다.

 

책에서 유태인은 쥐, 독일인은 고양이, 폴란드인은 돼지, 미국인은 개, 프랑스인은 개구리로 우화적으로 표현된다. 나는 이런 묘사가 어느 시점부터 다행스럽게 여겨졌는데, 무수한 폭력과 참혹함을 사람이 겪는 것으로 표현하기엔 너무나 잔인했기 때문이다. 홀로코스트는 20세기에 일어났다고는 믿을 수 없는 비인간적인 비극이었고, 우리는 역사를 공부하며 기억해왔다.

 

그렇다면 홀로코스트, 심지어 직접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경험이 있는 생존자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작품은 폭력성이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잘 그려내고 있다. 아들 아트 슈피겔만은 이렇게 회고한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경험이 있는 부모 블라덱과 아냐는 밤에 자다가도 괴성을 질렀고, 자신은 모든 가정이 그런 줄 알고 컸다고 한다. 또, 초반 부분 아트의 어린 시절 속엔 이런 장면도 있다. 친구들과 스케이트를 타다 넘어진 아트가 친구들이 자신을 두고 가버렸다고 블라덱에게 말하자, 블라덱은 “친구? 네 친구들? 그 애들을 방 안에다 먹을 것도 없이 일주일만 가둬놓으면… 그 땐 친구란 게 뭔지 알게 될 거다….”고 말한다. 개구진 어린아이들의 장난을 두고 하는 말 치곤 굉장히 괴상한 측면이 있다. 이런 식으로 부모의 불안정한 심리 상태들은 아들 아트에게 영향을 미쳤고, 아트는 스무 살 무렵 정신병원에 입원하기도 한다. 설상가상으로 정신병원에서 퇴원하자마자 그는 어머니의 자살을 겪고, 어머니의 죽음 이후 점점 더 신경 쇠약에 시달리고 편협해지는 아버지와의 갈등을 피할 수 없게 된다.

 

블라덱은 재혼한 부인 말라를 비롯해서, 아들 아트, 그리고 주변 이웃들과 끊임없이 갈등을 일으킨다. 그는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편협한 노인으로 늙어가게 되며, 건강을 염려하는 잔소리와 절약할 것을 요구하는 잔소리와 게으르다는 핀잔까지 늘어놓는다. 하지만 그런 생활신조는 아버지를 아우슈비츠에서도 살아남게 한 원천이었다. 빵 한 쪽이라도 아끼고, 무엇이든 배워두려는 자세, 임기응변에 능하기까지 했던 그는 끔찍한 아우슈비츠에서도 생명을 연장해갔다. 그의 넘치는 재기로 위험을 몇 번이고 넘겨서 살아남은 걸 보면 정말 악착같고 대단하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그의 강박증과 현실에 맞지 않는 답답한 태도들을 비난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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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불협화음이 가장 극대화되는 장면은 홀로코스트를 겪은 아버지가 흑인을 상대로 인종차별을 보이는 모습이다. 인종주의의 희생자였던 그가, 흑인을 차별하고 멸시하는 장면은 굉장히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다른 이유도 아니고 인종적인 이유로 차별당한 사람이 인종차별을? 우리는 그의 차별적인 발언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책은 아우슈비츠 경험에만 집중하지 않고,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을 던지며 깊이 있는 사유를 요구한다.

 

다음으로 죄책감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2부 2장 ‘아우슈비츠(시간이 흘러서)’에 보면 저자 아트가 정신과 상담을 받는 내용이 나온다. 『쥐』 출간 이후 성공적인 판매와 함께 쇄도하는 인터뷰 요청에 그는 아기가 되어버린 듯 작아지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가 『쥐』에서 편협한 아버지의 모습을 그린 것이 작가로서의 성공 이후에 아버지를 조롱당하게 했다고 생각하기도 하는 등 여러 고민이 있지만 그에게 가장 핵심적인 감정은 “성과가 뭐가 됐든 간에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것에 비하면 대단치 않아 보이는”것이다.

 

살아남았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 이러한 부채감은 죽은 자와 산 자가 양자택일의 상황에서 목숨을 겨룬 상황이 아니더라도 발생한다. 아트 역시 전쟁이 끝나고 태어난 사람 아닌가. 정신과 의사는 아버지 역시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아버지 블라덱 역시 동족들의 시체를 밟고 올라와 끝끝내 살 수 있었다는 죄책감과 부채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다른 죄책감에 대해 말해볼까. 세계 2차 대전이 끝난 뒤, 홀로코스트의 중심인물로 재판을 받는 아돌프 아이히만은 죄를 인정하느냐는 물음에 자신은 죄가 없다고 말한다. 수백만 명의 유태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장본인임에도 불구하고 죄의식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는 단지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잘 수행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철학자인 한나 아렌트는 그의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성실하고 준법정신이 투철한 평범했던 남자였던 아이히만이 왜 유죄일 수밖에 없는지 ‘악의 평범성’으로 역설한다. “다른 사람의 처지를 생각할 줄 모르는 생각의 무능은 말하기의 무능을 낳고 행동의 무능을 낳는다.”

 

나치의 지배 동안 침묵하고 방관했던 수많은 독일인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의 마음속에 내재된 ‘악’은 너무나 평범한 것이다. 악이 얼마나 평범하냐면 홀로코스트를 겪은 블라덱도 흑인을 향해 차별과 멸시를 보인다는 것이다. 이런 아이러니함은 인간이 얼마나 편협하고 모순적인 존재인지 보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 인류는 더 이상 여기에 머물 수 없다.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행동하는 게 아니라, 사유하는 존재로 나아가야만 비극의 고리를 끊을 수 있을 테다.


 

처음에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을 잡으러 왔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으므로

 

그들은 유대인을 잡으러 왔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으므로

 

그들은 노동조합원을 잡으러 왔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으므로

 

그들은 천주교도를 잡으러 왔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개신교도였으므로

 

그들은 나를 잡으러 왔다
그런데 이제 말해줄 사람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 마르틴 니묄러 <그들이 처음 왔을 때>

 

 

독일의 신학자 마르틴 니묄러의 시 <그들이 처음 왔을 때>는 차별을 방관하는 것은 결국 자신에 대한 차별로 돌아올 수 있다는 점을 암시한다. 직접 겪지 않으면 차별을 남 얘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 모두 차별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차별의 당사자가 되면 정작 나서기에 힘들 수 있다. 그렇기에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부조리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 우리가 함께 발 디딜 공간을 넓혀가야 하는 게 아닐까. 각자의 자리를 넘어 타인의 입장까지 사유하는 진정한 ‘인간’이 많아질수록 ‘악’이 발붙일 공간이 사라질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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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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