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이름을 가진 여성의 이야기, 연극 '민들레 홀씨' [공연]

글 입력 2020.05.28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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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태어날 걸 기대해서 아들 자(子)를 쓴 이름을 가지게 된 박자훈. 하지만 딸이 태어나고 분만실의 모든 사람은 실망한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어떤 기대를 받고, 그것이 어긋나 환영보다는 실망을 담은 속상한 눈빛을 받아야 했던 박자훈. 그러나 그녀는 다행히도 올곧게, 건강하게 자란다.


자훈은 경부 고속도로가 뚫린 후 서울에 상경해서 돈을 벌어 자신의 이름을 건 양장점을 차리겠다는 꿈을 품는다. 방직공장에 취직해서 열심히 돈을 벌지만, 가정 형편이 어려워지자 돈을 모두 집으로 보내고 꿈을 접게 된다.


결혼 후 자훈은 그 시대의 여성에게 기대되는 모습으로 살아가게 된다. 아이를 키우고, 집안일을 하고. 자훈은 존댓말을 쓰고, 남편은 반말을 쓰는 것에서부터 가부장적인 사람임을 보였던 남편은 그녀가 좀처럼 집 밖으로 나갈 수 없도록 한다.


서울에서 자훈의 고등학교 동창회가 열린다는 말을 듣고 갈 수 있게 해달라며 간곡하게 부탁하지만, 그럼 애는 누가 보냐며, 남편은 윽박을 지른다. 아이가 자란 몇 년 후에야 자훈은 동창회에 나갈 수 있게 되고, 그곳에서 자훈은 어머니나 아내가 아닌 ‘박자훈’으로서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이름으로 불린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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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할머니는 그냥 할머니인 줄 알았다. 극 중에서 아이들은 철없이 묻는다. '할머니가 이름이 어디있어요?', '할머니가 우리처럼 어린 아이였다고요? 거짓말.' 아이들은 자훈에게 거리감을 느끼고 자훈의 말을 믿지 않는다. 나도 어르신들의 젊은 시절은 가끔 상상해보지만, 어린 시절은 생각해본 적 없는 것 같다.


어딘가 모르게 다르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도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중년이 되고 노인이 될 텐데, 왜 그랬을까?


아마 내가 그들의 이름을 불러본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부르고, 나의 이름이 불리는 것이 정말 의미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이름은 모두를 유일하게 구별하는 기능을 하지는 못하지만, 한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정보이다. 누군가를 이름으로 부른다는 것은 그 자체로 그 사람을 '인식'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관계에서는 이름을 전혀 부르지 않고 살아간다. 어머니, 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 등. 


나는 엄마와 굉장히 친하지만, 살면서 엄마의 이름으로 엄마를 불러본 적이 아직 한 번도 없다. 엄마들은 한평생 자식의 이름을 불러줄 텐데, 자식은 엄마를 엄마라는 '호칭'으로 부르며 산다.


나이나 관계에서 우리나라보다 자유로워서 이름을 쉽게 부르는 외국 문화가 부러울 때가 많다. 호칭 문제가 복잡하지 않다는 이유에서도 그렇지만, 앞서 말했듯 이름을 부르는 게 상당히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기에 그렇다. 그래서 동창회에서 친구들을 만나야만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자훈의 이야기가 안타깝게 느껴졌다.

 



원하는 것을 볼 수 있게 해주는 행복 기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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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훈의 아버지는 자훈이 학생일 때 행복 기계를 만들고자 했다. 원하는 건 무엇이든 볼 수 있도록 해주는 행복 기계. 완성된 행복 기계 안에 들어간 자훈의 엄마는 돌아가신 어머니와 일찍 죽은 아들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그녀는 눈물을 흘린다. 아주 불행하다고 말한다. 더는 실제로 볼 수 없고 만질 수도 없는 존재를 보는 것은 그녀에게 고통이었다. 그 이후 행복 기계의 문은 굳게 닫힌다.


떠나간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아파하는 것은 남겨진 자의 몫이다. 세상에 이별이 없는 만남은 없고, 우리는 결국 모두와 이별하며 살아간다. 모든 것을 기억하면 너무 아프기에 망각이라는 게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민들레 홀씨를 날려 보내듯 떠나간 존재를 보낼 수도 있어야 한다.


자훈은 마지막 순간에 현실을 직시하고, 죽음을 받아들이고, 자신도 민들레 홀씨의 갓털처럼 가볍게 날아간다. 그녀는 그렇게 떠난다.

 



한 여성의 일생을 함께 하는 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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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홀씨’는 어린, 젊은 자훈과 주변 인물들이 장면을 연기한 이후 일흔의 자훈이 그 장면을 회상하는 대사를 하며 진행된다. 자연스럽게 관객들은 자훈이 과거를 회상할 때 함께 그녀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된다.


탄생부터 죽음까지, 박자훈이라는 인물이 살아왔을 인생에 비해 90분의 공연 시간은 터무니없이 짧지만, 왠지 모르게 그녀의 일생을 먼발치서 바라본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한 여성의 이야기, 한 인간의 이야기. 그건 우리 모두의 삶을 돌아볼 수 있게 하는 이야기이다. 나는 이런 이야기가 참 좋다.






민들레 홀씨
- Dandelion Spore -


일자 : 2020.05.14 - 2020.06.07

시간
평일 오후 7시 30분
토요일 오후 3시, 7시 30분
일요일 오후 3시
 
*
화/수 공연 없음

장소 : 보광극장

티켓가격

전석 20,000원

  

주최/주관

창작예술집단 보광극장


관람연령
만 12세 이상

공연시간
90분




 
창작예술집단 보광극장
 
 
예술을 사랑하는 젊은 청년들(寶, 보배 보)이 하나의 촛불이 큰 빛(光, 빛날 광)이 되듯,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연극, 영화, 전시 등 장르를 불문하고 우리의 이야기를 관객들에게 전할 수 있는 모든 예술을 지향하는 단체입니다.
 
어린 아이들부터 노인까지 전 세대를 아울러 그들이 겪고 있는 아픔과 상처를 연극과 영화라는 매개체를 통해 치유하고 위로 해주기 위하여 2017년 창단한 창작예술집단 보광극장은 단원 전원이 창작자가 되어 작품을 만들고 있습니다. 작품을 통해 관객들에게 행복감을 주고 현재를 살아 갈 수 있도록 굳건한 힘과 의지를 주는 것에 목표를 두고 순수창작물을 만드는 작업 뿐만 아니라, 현대의 문제점들을 시사하는 여러 작품을 다양한 시선으로 재해석한 창작 작품들로 관객과 동고동락하기를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또한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서 발칙하고 기발한 상상력 발휘할 수 있다는 장점을 근거 삼아 극장 안에서의 다양한 실험과 도전이라는 또렷한 목적을 갖고 있습니다. 내 이웃들의 아픔과 상처를 창작작품을 통해 보듬어주어 그들과 소통하여 한국 창작예술 발전에 기여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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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진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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