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배신하는 꿈의 세레나데 - 르네 마그리트 특별전

글 입력 2020.05.25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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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문외한의 전시회 관람기는 계속된다. 이번엔, 나름 친숙한 르네 마그리트의 전시회이다. 결국, 미술 전시회를 찾는 것도 예술의 어느 하위 장르에 대한 향유해봄이라 하자면, 예술을 찾는 일이다. 그렇다면 그 예술을 내가 무엇으로 필요로 하며, 무엇 때문에 찾느냐 물을 때, 내 대답은 언제나 한가지뿐일 것이다. 그 필요란 언제나 그렇듯 새로운 것으로서의, 또한 새로운 것을 대함으로서의 ‘영감’이다.

 

언제나 이 내 고루한 의문을 대할 적에, 나는 나아가 질문을 하게 되는 것이, 그렇다면 보편 인간들이 예술을 필요로 하는 까닭이란 그 무어냐는, 답할 수 없는 것에 대함이다. 어이 되었건 예술이 살아남았고, 또한 장차 계속 살아남을 것이라 생각할 때, 그것은 오직 만인이, 하다못해 충분한 수의 인간이 그를 필요로 한 때문이라고 한다면, 그리하여 그들의 필요는 무엇이겠냐는 질문을 재차 가져보는 것이다.

 

예술이 왜 필요하고, 왜 필요되었고, 어떻게 필요되었기에 향유됐는가. 그런즉 살아남을 수 있었더라면… 이는 아직 옅은 직감도 서지 않는 이야기이다. 어쩌면 장차 예술은 계속이 살아남을 것이고, 또한 그 편에서 내가 그 뻗어 나가는 역사의 가지를 붙잡고 걸으매, 함께 호흡하는 어느 미래에야 섬광처럼 알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질문을 안고 유보한 채로, 나는 내게로 던진 질문을 다시금 본다. 그래서, 나는 영감을 찾으러 이곳엘 왔구나. 그 영감은 그렇다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가. 그것은 미리 알지 못할 것이다. 왜냐 하니, 언제나 새로운 것에서 영감이란 발하는 것이고 새로움으로써 그 의미가 창출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미리 알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이기에. 나는 다만 흥분된 마음으로 그리 향하다. 이는 모험하는 이의 마음에 닮았다.

 

안 그래도 요즘, 글 발이 자꾸만 떨어져 가고 있었기에, 나는 이러한 것들이 절실하다. 써온 것들로 말미암아 쓰자면, 즉 반복하되 조금씩만 바꾸자면야 못 쓸 것 없겠으나, 그래서는 쓰고자 하는 이 마음이 먼저 동날 것이 두렵다. 즐기지 못할 바에야.

 

이미 써낸 글들은 언어로 구조화된 탑, 모두는 마음 안에 그런 탑 하나를 가지고 있다. 그곳에서 이제 내가 써왔고 또 앞으로도 오래도록 사용할 ‘언어’들은 솔바람처럼 의식으로 불어 들어온다. 그러나 장차 내가 새로운 표현과 그 표현을 위해 지녀야 할 새로운 사유는, 그러므로 개척해야 되는 성질의 것이라고 할 때, 이 개척이 가끔은 버거운 일이 아닐까 한다.

 

예술이 가지는 의미의 하나가 바로 이러한 것, 개척의 유도등으로써의 역할에 있지는 않을지. 저곳에는 한 열렬한 이가 지어 올린 사유와 표현의 탑이 있다. 나는 이러한 것들을 다만 뭉뚱그려, ‘영감’이라 표현한 것일 테고 말이다.

 

이러한 속 사정을 한쪽에 안고, 그의 전시회를 맞는다. 포스터에는 그 유명한 ‘골콩드’와 ‘사람의 아들’이 소개되고 있다. 문외한인 내게마저 이미 닿아선, 아직도 잊히지 않고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이런 그림들이라니. 내가 이 전시회에 설렘을 느끼는 것은 그러므로 전혀 이상하지 않을 일이다.

 

원체 그림에 대해 문외한이기로서니, 어떤 그림을 보건 간에 분명한 하나의 해석을 하지 못하였다지만, 그의 그림은 모호함보다도 혼란함으로 내게 다가온다. 누군가 했던 말을 가져오자면, ‘낯선 친숙함’. 친숙한 것들로 더없이 낯선 장면을 그는 짜두었으니, 이제 해석은 참 아득해지더라. 아직 르네의 그림들과 그에 대한 아무런 옅은 해석이나 넘겨짚음도 없이, 다만 열렬한 궁금증에 더해 모종의 스산함을 느끼며 간다.

 

전시는 인사동에 있는 복합문화공간, ‘안녕 인사동’에서 진행되어 조금 놀랐다. 기억하기로 이곳은 개시한 지 얼마 안 된 곳인데, 이따금 인사동에 놀러 올 적마다 한 번씩 북카페 때문에 들리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1층 깊은 곳에 매표소가 있고, 전시장은 지하에 자리 잡고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길, 그리고 이제 곧 닿을 곳에 이르기까지 ‘사과로 가려 사내’의 사진이 가득하다. 상기되는 열렬한 호기심과 모종 스산함을 안고 이제, 전시회로 들어선다. 그러자, 곧바로 보이는 이 사진에 사로잡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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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있어 세상은 상식에 대한 도전이다.”

 

문구 자체는 그리 새롭지 않으나, 그의 그림이 이 문구 위에 곧바로 연상되니 수긍이 빠르다. 앞서 그의 그림에 대한 내 열렬한 호기심과 모종 스산함은, 곧잘 이 문구 위에 착하고 달라붙는다. 통념에 도전하는, 어쩌면 조금 위험할 수도 있는 대담한 말. 상식, 즉 Common sense에 대함, 곧 보편과 보통의 감각들에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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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 常識 : 사람들이 보통 알고 있거나 알아야 하는 지식. 일반적 견문과 함께 이해력, 판단력, 사리 분별 따위가 포함된다.

 

  

‘세상은 상식에 대한 도전이다.’ 이때 그 세상이 가리키는 바가 무언지는 꽤 생각해봄 직하다. 일단 도전의 대상으로서의 상식이란, 주로 ‘보통 알고 있어야 하는 지식’으로서의 상식이다. 그것이 의식되지 않는 채로 어떤 강제성을 띄기 때문이다. 이를 ‘불문율’이라고 칭해도 좋을지 모르겠다.

 

화가가 아닌 ‘생각하는 사람’으로 불리길 원했다는 르네를 막 상상해본다. “세상이 나를 속이고 있다는 불신이 생겼고, 새로운 시야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세상은 상식에 대한 도전이다.’ 이 두 문장을 얽으며 그를 그려보는 것이다.

 

상식이 어디에서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추찰하기에는, 내 앎과 판단에 대한 확신이 아직 적다. 다만 그것은 언젠가부터 이미 우리에게 자리 잡아 있는 생각과 그 생각의 방식이라는 것이라고는 말할 수 있겠다. 세상은 이러한 ‘짜이고 주어진 앎’, 즉 비판 대상이기 이전의 통념을 흔들어 놓았다고. 르네의 눈으로 들이비친 세상은 그랬노란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는지를 상상해보자면 아마, 상식이 그리는 세계와 실 세계가 묘하게 불합치되며, 수상함을 낳고 있었던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를 통해 얻게 된 새로운 시야는, 바야흐로 상식과 불문율로서의 세상 인식을 넘어섰기에, 넉넉히 새로움이라 칭해진 것일 테다. ‘생각하는 사람’으로 불리길 원했다는 그의 말은, 이 부분에서 설명을 획득한다. 이제 주어지는 보통의 앎, 불문율로서의 앎을 넘어 그 스스로는 생각하게 된 까닭일 테고, 나아가 그것을 창작을 통해 여실히 담아내려고 했을 때문이다. 비판 대상이기 이전의 통념을 흔들어 놓고, 그를 부정하고 벗어나려고 하는 이는 장차, 스스로 생각을 뻗어내야 한다. 그 생각이란 이제, 세계에 대한 고유의 인식과 인식관일 것이다.

 

르네의 바다 안에서,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얻을 수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통념과 불문율로서의 세상 인식을 넘어서는 것. 기존의 ‘사고 질서’로부터 단절, 분절된 것. 그를 통해 태동하는 진정 자유로운 사유. 이러한 ‘새로움’들과 ‘탈 정형화’의 속성이, 아마 르네를 사랑받는 이로 만든 것이 아닐지. 내겐 이런 예감 하나가 이제부터 떠오르기 시작한다.

 

전시는 응당 연대기 순으로 진행되지만, 모든 미술 사조를 충분히 알고 이해하고 있지 못하고, 또 굳이 이해하려고 하지를 내가 않는 한, 개중 흐르는 눈 위로 폭- 하니 안기는 그림들 앞에 오래 궁글어 보는 것이, 나의 관람 방식이다. 그러니 리뷰도 대략 그럴 것이다.

 

 

 

언어와 대상, 이미지와 사물


 

뜬금없는 말이지만, 우리는 사고하기를 주로 언어를 통하여 한다. 이따금 이미지의 연속 상을 통하여서도 내적 사고가 전개될 수는 있겠지만, 대개 우리 사유는 언어를 통해 짜나가는 질문과 그 대답이다. 그것이 가장 효율적인 때문일까. 일단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것은 ‘활자의 이미지’를 그려내고선 보고 떠올리고 대답한다는 말이 아니다. 당장, 내가 글을 써 나아가기 위해 어떤 사고 활동을 할 제, 그 안을 들여다본들 아무런 이미지도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개념들만이 명제로서 얽어지고 있고, 그것을 가지고 논리성 검증을 해보고, 근거와 주장으로 얽어보고, 비판되어 폐하며 나아간다. 그것에는 이미지가 없다.

 

사고와 인식은 이렇듯 언어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언어에는 필연이 한계가 내포되어 있기에, 사고와 인식도 응당 따라 불완전할 수밖에 없음이다. 이건 이미 유명한 주장으로, 우리의 인식과 사고를 의심하는 일련의 문제 제기를 통해 자주 등장한다.

 

언어의 한계에 대해 지적한 중 가장 유명한 이론가로는, 역시 소쉬르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소쉬르의 언어 이론에 따르면, ‘언어는 기호들의 체계’이고, 기호는 ‘기표와 기의로 구성된다.’ 이 기호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단어들이다.

 

언어 한계를 말해보기 위해서는 역시 기의-기표 구조가 가지는 한계성을 소개해야 될 듯싶다. 하나의 단어인 ‘나무’가 여기, 있다. ‘나무’라는 활자는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니다. 다만 그것이 실 세계의 물상인 ‘나무’를 가리키기로 약속됨으로써 이 활자에는 상징물인 ‘나무’가 실린다.

 

이때 기의는 활자가 지니는 개념, 의미를 칭하고, 기표는 활자인 단어, 형식을 칭한다. 이 두 가지, 기의와 기표가 합하여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것인 ‘나무’라는 기호가 구성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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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코람데오닷컴

 

 

단어는 이렇듯 지칭하고자 하는 대상과 그를 나타내는 상징인 활자로 이루어진다. 이때, 기이함이 발한다. 우리가 활자를 통해 심상 속에 떠올리는 나무의 ‘이미지’는 모두 다르지 않겠는가. 그런데도 어떻게 이렇듯 소통은 영위되는가, 하는. 그 까닭은 나무라는 단어에 우리가 추상화를 가하기 때문이다. 추상화란 ‘구체적인 대상들을 일반화하는 능력’이다.

 

말하자면, ‘나무는 대략 갈색 몸체에 특유의 무늬를 가지고, 그 위에 파아란 이파리를 한 아름 가지고 있는 것.’ 실지로는 이렇게까지 첨예하게 인식하지 않지만, 말로 굳이 써보자니 참 지지부진해진다. 다만 즉발적이고 무의식적으로, 우리는 이런 추상화를 통해 개념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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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이제 이 유명한 그림을 본다. 작품 “이미지의 배반”, 아래쪽에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구가 실리어 있다. 이 회화는 위의 언어 한계를 르네식으로 표현한 바라고 볼 수 있겠다. 여기에는 ‘파이프’라는 단어가 있고, 그 파이프를 연상시킬 만큼 잘 모사된 파이프의 이미지가 있다. 파이프의 위 이미지는, 실로 다양한 형태를 가진 실제의 파이프 중 가장 잘 정립된 대표적 상징의 상일 것이다. 그로써 두 기호인 ‘단어’와 ‘이미지’가 지칭하는 실 상관물인, 대상으로서의 ‘파이프’는 여기 함의되어 있다. 우리가 그렇게 연상한다.

 

이미지가 대상의 개념을 연상시키어 즉발적으로 그 대상을 떠올리게 하는 이 일련은, 우리에게 참으로 자연스럽다. 그러니까, 위 회화로 말해보자면, {파이프의 이미지}가 {실제 파이프의 개념}을 즉발적으로 연상시킨다는 말이다. 그것은 우리의 자동화된 인식의 방식일 것이다.

 

잘 상징화된 이미지를 보고, 그 실질 대상물의 개념을 연상하는 것, 즉 자동 연상은 우리의 익숙한 인식의 방법이다. 그리고 이 인식하는 방식을, 르네는 갑자기 부정한다. ‘이 이미지를 보고 여러분은 곧잘 실제의 ’파이프‘를 연상하셨겠지만,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하고.

 

이것은 저 위의 ‘상식 파괴’와도 맥을 같이한다. 둘 다 자동화/기계화된 사고방식이기 때문이다. 자동화가 가지는 오류는, 그것이 ‘필연적’이지 않다는 데에 있다. 물론, 우리가 일상 속에서 그러한 방식으로 연상하고 사고하는 것이 반드시 오류를 범하는 일은 아니겠지만, 또한 그것은 분명으로 사고하는 인간에게 필요한 효율적 방식이지만, 어땠든 그 방식이 무의식 속에서 일어나 우리에게 채 인식되지 않고 있음에, 그는 딴지를 걸면서 그 방식을 상기시킨다. 방식 자체를 환기시키는 것이다.

 

저 그림을 파이프로 보아도, 사실 아무런 상관이 없다. 저것이 실지로 파이프가 아니었다 한들, 파이프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이고, 그래서 파이프로 본다고 한들, 무언가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기표와 기의의 자동 연상, 이미지와 대상, 기호와 지시물 사이의 자동 완성의 인식 프레임에 제동을 걸며, 그것을 메타적으로 인식하게 한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 인식은 우리의 상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다.

 

이런 문제 제기는 일상 속에서 무비판적으로 혹은 자연스럽게 수용되어 있는 것들, 단단히 고정적 관념으로 자리 잡은 것들 일체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도록 유도한다. 즉, 이미지와 그 이미지가 대변하는 실질 상관물 사이의 관계에서 발생한 이 문제 인식은, 다른 인식 방법들과 인식 대상들에 대해서도 유사한 문제 인식을 떠올리게끔 연쇄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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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마그리트, <말과 이미지>

 


1. 한 사물은 그 이름에 꼭 부합되는 것은 아니어서, 누구든 그것에 더 적합한 이름을 찾을 수 있다.

 

2. 하나의 이미지는 한 문장 속에서 그 단어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다.

 

3. 그것이 어떤 형태라 할지라도 한 사물의 이미지를 대신할 수 있다.

 

4. 이름이 없는 사물들도 있다.

 

5. 한 사물은 우리로 하여금 그 뒤에 다른 사물들이 있다고 생각하게 할 수 있다.

 

6. 한 사물은 결코 그것의 이름이나 이미지와 똑같은 기능을 할 수 없다.

 

7. 한 단어는 종종 그 자체를 명시하는 것으로만 사용된다.

 

8. 모든 것은 한 사물과 그 사물이 나타내는 것 사이에 별로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게 한다.

 

9. 현실에서 볼 수 있는 사물들의 가시적인 윤곽들은 마치 모자이크를 만들듯이 서로 닿아 있다.

 

10. 한 사물은 그것의 이미지와 만나고, 한 이미지는 이름을 만난다. 이미지와 그 사물의 이름은 서로서로 만난다.

 

11. 두 개의 다른 사물을 지칭하는 데 쓰이는 단어들은 무엇이 그러한 사물들을 서로서로 구별하게 하는가를 나타내지 않는다.

 

12. 막연한 형상도 정확한 형상만큼이나 필수적이고 완벽한 의미가 있다.

 

13. 종종 한 사물의 이름은 이미지를 대신한다.

 

14. 그림에서 단어는 이미지와 같은 실체로 보일 수 있다.

 

15. 때때로, 그림 속에 씌어진 이름은 정확한 것을 명시하고, 이미지는 모호한 것을 지시한다.

 

16. 한 단어는 실제에서 하나의 사물을 대신할 수 있다.

 

17. 우리는 회화에서와는 다른 이미지와 단어를 본다.

 

18. 또는, 사실은, 정반대일 수도 있다.

 

  

이런 해석들은 르네에 의해 먼저 제기되고 있었다. 즉, 그는 이런 상관관계의 모호함과 필연적 한계를 똑똑히 인식하고 나아가선 암시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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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르네 마그리트, <꿈의 열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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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여기서 계란의 이미지에 아카시아라는 단어를, 검은 구두에 달을, 중절모에 눈(雪), 촛불에 천장, 유리컵에 폭풍, 망치에 사막을 배치해 두었다. 다분 의도적이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을 ‘꿈의 열쇠’라고 이름 붙인 까닭은, 그렇다면 무얼까.

 

자동 연상과 고정관념의 통상적인 방식으로는, 꿈을 이해하고 해석할 수 없다는 말이 아닐지. 우리가 꾸는 꿈은, 우리 대낮의 의식 및 이성관 달리, 무정형성과 무규칙성을 띄고 있지 않던가. 그래, 무정형성과 무규칙성, 이것은 이 초현실풍 전시회 내내 가득 찬 그의 회화에도 깃들어 있었다. 그의 그림은 정말이지 ‘꿈의 속성’을 내포하고 있었구나.

 

 

 

낯선 친숙함


 

이런 낯선 방식, 즉 정형화된 방식에 대한 의도적 탈피를 통해서 그는 세계를 새로이 인식했던가 보다. 여전히 그가 세계의 어떤 부분을 통해, 불신의 근거를 감각하고, 자각하여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제 나는 키워드 하나를 얻는다. 그의 회화에는, 친숙한 물상들이 의도적으로 기이한 배치를 이루고 있었음에, 그것들에다가 위의 문제의식을 덧대어보는 것이다. 전시회 내내 수 놓인 기이함, 그 속을 걷노라면 모종 스산한 기분을 가지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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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마그리트, <기억>

 

 

미술에 문외한인 나로서는, 그 각각의 회화 속에 자리 잡아 있는 숨은 의미들을 모조리 해석하는 것이 과히 어렵고, 그러므로 그렇게 해석된 것을 그의 미술 세계 전반에 적용될 만 한 하나의 유기적인 해석으로 발전시키는 것은 아예 불가할 듯 보인다. 오직 내가 느낀 한 조각의 단편만을 말할 수 있으리라.

 

여기에, 하나로 확정될 수 있는 의미나 개념을 가진 그림은 적어 뵌다. 그러니까, ‘이 그림은 이런 의미로군!’하고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들이 적다. 심지어 직감되는 바조차 적다. 친숙한 물상들이 의도적으로 기이한 배치를 이루고 있었음에, 그 물상들에 대한 기존의 내 태도가 길을 잃는다. 예컨대는, 밑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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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마그리트, <어려운 횡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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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마그리트, <우상의 탄생>

 

 

예컨대는 이런 그림들을, 나는 조금도 해석하지 못하겠다. 전혀 새로울 것 없는 대상들이 전에 본 적 없는 결합과 조화, 배치들을 통해 다가온다. 나는 그러한 그림을 자꾸 스쳐지나며, 그림 한 점에 불길한 몰이해 한 점씩만을 얻으며, 시나브로 어떤 스산한 감각에 빠져들어 가고 있었다. 어느새 나는 뭇 사물에 대해 긴장된 의식과 태도를 갖추고 있었다. 이곳은, 그의 꿈속인 것일까.

 

아주 해석이 안 되면서도 여실히 끼쳐오는 이 불길함과 그에 대한 내 불안함은 무엇일까. 그는 해석을 불허하는 것만 같다. 그렇게 말해오는 것만 같다. 해석하고 이해하려 애쓰지 말라고 말이다. 어차피 불가한 것이니… 그리고 인간인 나는, 아예 이해되지 않는 이런 것들의 앞에서 이렇듯, 당연한 불안감을 가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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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몇 점의 회화에서 ‘인간의 조건, 그것은 모사에 있다’고 그는 주장하고 있다. 저 캔버스는 우리 감각과 인식의 상징일까, 아니면 모사하는 손과 그 의지에 대한 상징일까. 앞서 아예 이해되지 않는 것들, 까마득히 알 수 없는 것들의 앞에서 느끼는 불안함과 불길함을 언급하였다. 그것은 내가 우리 ‘인간의 조건’에서 벗어난 까닭이었던 것일까.

 

이 그림이 지칭하는 바가 무얼까.

 

인간에게는 눈앞의 모든 것들이 곧바로 감관을 통해 내면으로 흘러들어온 다음, 이식되고, 프레임 안에 짜이게끔 된다는, 우리의 그러함, 우리의 사물에 대한 태도와 속성을 말씀하심일까. 혹은, 눈앞의 모든 것들을 곧바로 모사하려 하며, 모사하여, 가능한 한으로 채색하려 하는 것이 우리의 본능이라는 말을 하고 계심일까. 그중 무엇인들, 다시 그것은 어떻게 ‘인간의 조건’이 될 수 있을까. 이쯤 오니 대략 정신이 얼얼하다.

 

인간의 조건이 둘 중 무엇이었건 간에, 이젤에다가 담을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우리가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고는 말할 수 있겠다. 원체 직감이 많던 나조차도, 여기에 머무르니 드디어 하얗게 표백된 한 마리 짐승으로 무화되어가는 듯하다. 참으로 소름 끼치는 생각이다. 여기에는 낯설고 기이하고 기괴하기까지 한 것들로 가득 차 있고, 아무런 힌트도 없이 질문만이 계속 내게 다가온다.

 

 

 

전시회에서 빠져나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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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마그리트, <연인>

 

 

위는 그저 아무런 새로울 것 없을, 아마 역사의 내내 우리 가까이에 있었을 키스의 장면이다. 두 얼굴의 사이로는 엷은 흰 천 하나만이 덧대어져 있을 뿐이다. 딱 그것만큼만 멀거나 다르다. 그러나 딱 그만큼 만으로도 이상한 감각과 상상은 충분히 샘솟고, 샘솟을 수가 있다. 아무리 친숙한 것엔들, 낯섦은 그에서 그리 멀리 있거나, 많은 차이를 요하는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구나. 우측의 양복쟁이는 남성일까, 혹 여성일지도 모르지. 혹 둘의 성별이 똑같을지도 모르지.

 

마구 해체되어가는, 이 복된 감각이 겨워서 이제 빠져나오기로 한다. 그때 내 정신은 얼얼하였다. 아무런 확신도 가질 수가 없는 질문과 대답의 연속들은 뇌를 빨갛게 과열시켜오는 듯하다. 반추하며,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말이다.

 

 

슈베르트 - 세레나데

 

 

빠져나오는 길 어딘가부터, 갑자기 익숙한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하였다. 다 나온 뒤 플레이리스트를 뒤져 찾아보니, 슈베르트의 ‘세레나데’이다. 모퉁이를 돌아 소리의 진원지를 마주하니, 크게 진동하는 소리와 함께 영상이 날아들어 온다.

 

검은 장막으로 반쯤 가린, 좁은 문 너머로 넓은 공간이 눈에 들어온다. ‘이머시브 룸’이다. 그 공간의 바닥과 온 벽에는 르네의 그림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남은 빈 공간은 클래식의 선율들로 꽉 매워져 있었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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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머시브 룸' 전경

 

 

자리 잡은 곳, 접붙인 엉덩이로 미세한 떨림마저 전하는, 그 정도의 소리를 듣는 일이란… 차라리 그에 포위되어 있고 점유 당해 있다고 말하는 편이 옳겠다. 홀에 들어찬 이 소리는 귀에 가장 먼저 닿았으나, 내 엉덩이에 그랬듯, 가만 멈추어 감각해보니 내 온몸을 부딪고 있었다. 피부는 잔잔바리 진동에 같이 떨고 있었다.

 

더구나, 그 큰 홀에 퍼지임으로 말미암아, 먼 곳 혹은 빈 곳을 때리곤 울리며, 마치 콘서트홀의 그 아득한 소리마저 머금어 아스라이 화할 적에야 무슨 설명을 더 필요로 할까. 나는 아직 정신이 얼얼하지만, 기어이 여기에 머물기로 하였다. 나중에 보니 영상들의 한 싸이클이 50분 길이었다는데, 가장 처음에 본 영상을 다시 접할 때 내가 그곳을 벗어났으니 족히 그 정도는 있었던 것이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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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내가 바라던 것인 새로움으로서의 영감을 잘 찾았는가. 나는 앉은 자리에서, 이렇게 과히 전율하는 소리 속에서 더욱이 아득해지는 정신에다가 그리 물어보곤, 물론이라 하였다. 그 생각은 아직 얼얼하던 당시 정신으로도 곧잘 떠올릴 수 있던 것. 너무 과분한 새로움들을 잔뜩 받았다는, 고마운 생각이다.

 

언어와 이미지, 그리고 그것들이 지칭하고자 하는 실 상관물 사이 각각의 관계를 의심하고, 그러한 방식으로, 그런 방식으로만 짜이는 우리의 인식을 의심한 그는, 의도적으로 우리의 일반 인식과 관념의 세계 자체를 뒤흔든다. 익숙한 것들에 깃들어 있는 그 멀잖은 낯섦을 통해서.

 

이 전시회를 그저 기묘하기만 한 세계, 그저 꿈의 세계라고 미루어보아도 좋다. 그런데도 여전히 새로운 것들로 여기 가득 차 있음이란 변함 없기 때문이다. 나는 덕분에 실컷 과호흡하고 나온 기분이다.

 

나는 여기 `이미지`의 바닷속에서 잠시 되새김질을 해보았다. 눈앞에선 그의 그림들이 허덕거리고 있다. 그가 `적어낸` 이미지들은 가만히 전시되어 있건, 이리 이지러지듯 움직이며 영사되건 간에 내게 ‘흐르고’ 있었다. 그것이 내게 하나의 이미지로, 그러니까 하나의 "파이프"로 화하여 멈추어 있지를 않기 때문이다.

 

이미지, 그것이 공인하고 있는 바가 여기엔 하나 없고, 비록 제목이 어느 정도 그러할 가능성, 하나의 공인된 의미와 해석의 가능성에 대해 `유도함`으로써 한정을 가하고 있지마는, 고도로 추상적이고 자유로워 아무런 의미가 확정된 채 멈추어 있을 수가 도저 없는 이것들은 분명 자꾸 멈추질 않아 흐르고 있었다.

 

그러한 것들이 무수히 떠오르면서, 난립하여서 내게, 지금 서 있는 내게 마구 흔들림을 선보인다. 내가 여기서 언어로 화할만한 것을 낚아낼 수 있을까. 얼얼하도록 강렬한 틈바구니에서 머뭇거리자, 곧 때마침 벽 위에 영상 하나가 선사된다. 마구 뒤집히며 섞이는 영감의 바다 하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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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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