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우리가 사랑하는 여자들 [문화 전반]

글 입력 2020.05.23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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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순전히 의식의 흐름에 의한 글이다. 어떤 역사 속 여성 인물을 시작으로, 그간 읽고 보았던 작품들 속의 여성들이 생각을 연장시켰다. 이 글엔 최근에 읽었던 작품부터 몇 년 전에 읽었던, 혹은 어린 시절을 함께 했던 작품까지 자리하고 있다. 다양한 이야기 속 그들을 연결해보고 싶었던 나의 욕심을 이해해 주시길.
 
최근에 러시아사에 대한 책을 발췌해 읽을 일이 있어 책을 폈다가 반갑게도 ‘예카테리나 2세’에 관한 부분을 보게 됐다. 러시아 출신이 아닌 몸으로 러시아의 황후에 올라, 심지어 남편인 황제를 몰아내고 러시아의 황제가 되었던 사람. 순간 여왕들의 이야기에 매료되었던 어린 시절로 소환되었다. 과거 이야기를 좋아했던 나는 유난히 여왕들의 이야기에 매력을 느꼈다. 아무래도 성별이 같기에 몰입되기 쉬웠다. 왕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 나의 상상력은 왕비가 되는데 그쳤지만, 여왕들의 이야기를 들을 땐 나의 상상력은 나에게 황제의 왕관을 씌워주었으니까.
 
많은 여왕들 중에서도 나의 마음속엔 예카테리나 2세가 단연 1등이었다. 공주에서 여왕이 된 다른 여왕들과는 다르게, 예카테리나는 이방인 출신에서 황후를 거쳐 황제가 되었으니까 무척 멋있었다. 그래서 나는 영어 학원에서 쓰는 이름을 ‘예카테리나’라고 짓기도 했다. (물론 이건 러시아식 이름이다) 훗날 독일이 되는 작은 공국 출신의 소녀는 러시아의 차르가 되며 현실에 한계를 짓지 말라는 교훈을 21세기의 어린 소녀였던 나에게 남겼다. 어린 시절 책 속에서 접했던 인물들은 그렇게 나의 세계를 만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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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여름 동네 책방에서 우연히 발견한 『우리가 사랑한 소녀들』은 어린 시절 읽었던 책 속의 ‘소녀들’에 관한 이야기다. 언제나 긍정적인 생각으로 행복을 추구하는 빨간 머리 앤, 2020년에도 영화로 재해석 되는 『작은 아씨들』의 조, 키다리 아저씨를 궁금해하며 그와 편지를 하는 주디, 인간을 사랑해서 물거품이 되어버린 인어 공주 등 책에는 나와 어린 시절을 함께한 16명의 책 속의 소녀들이 있었다. 나는 마치 예카테리나 2세를 통해 여왕이 되는 상상을 했던 것처럼, 동화를 읽으며 어떤 소녀든 될 수 있었다.
 
사실 책 속에 나오는 소녀들의 이야기를 요즘 다시 읽자면 거슬리는 부분이 있다. 아저씨와 소녀의 로맨스인 『키다리 아저씨』는 사실 결말에 이르자면 여자를 잘 교육해 자신에게 어울리는 여자로 만드는 조금은 이상한 로맨스고, 우리가 흔히 ‘신데렐라 스토리’라고 비판할 때의 『신데렐라』를 필두로 한 많은 동화들은 수동적인 여성 인물이 왕자님과 결혼하며 행복하게 끝나기만 한다.
 
물론 나도 현재의 관점에 따른 생각을 하지 못한 채 어린 시절을 이들과 함께 했기 때문에 예전의 시간을 전부 부정하고 싶지만은 않다. 멋진 왕자님들과의 로맨스에 가슴을 콩닥콩닥 해놓고는 이제 와서 지금의 정치적 온당성의 잣대를 들이미는 게 비겁하다는 생각도 들고 말이다. 이 책도 바로 그런 생각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그들의 세계에서 치열하게 살았을 동화 속 소녀들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때의 시선과 오늘의 시선으로 함께 바라봐야 한다고 말한다.
 
성인이 된 내가 동화 속 소녀들을 다시 떠올리며 생각한 것은 자라나는 여자아이들이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소녀를 주인공으로 한 동화들이 꾸준히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만 어린 시절 책 속의 세상은 너무 크게 다가오기에, 동화 속 소녀들을 조금 더 섬세하게 축조할 필요는 있겠다. 내가 그랬듯이 어린아이들은 책 속에서 롤모델을 찾고, 책 속에서 보이는 대로 자신의 세계를 상상하고 직조하기도 하니까. 자라나는 여자아이들에게 신데렐라 스토리로 수렴되는 동화의 틀을 넘어 더 넓고 큰 세상을 꿈꿀 수 있는 상상력의 장을 제공해 주는 것이 우리 시대의 책임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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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보다 지금 더 마음에 와닿는 작품들이 있다. 나에겐 지난 2월 영화관에서 관람했던 영화 《작은 아씨들(Little women, 2019)》이 그렇다. 물론 어렸을 땐 책으로 읽었고, 최근엔 영화로 봤다는 매체의 차이점이 있지만 그때 이 영화를 봤다면 나는 영화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을 것 같다.
 
영화 《작은 아씨들》은 초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정말 오랜만에 접하는 ‘작은 아씨들’이었고, 어렸을 때와 사뭇 느낌이 달랐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메그, 조, 베스, 에이미는 다들 유년기의 모습이었는데, 영화에서는 성인이 되어 결혼한 모습까지 그렸다. 알고 보니 우리에게 익숙한 유년기의 모습은 1868년에 발표한 『작은 아씨들』이고 이듬해 발표한 2부 격인 『좋은 아내들(good wives)』이 결혼 생활을 담은 내용이었다. 아무래도 나는 1부만을 엮은 아동용 축약본을 읽은 독자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나와서 친구와 함께 황당해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소꿉친구였던 로리의 청혼을 거절하고, 왜 프리드리히와 결혼을 해야 했는지 그녀의 선택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영화를 처음 관람했을 때 로리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 엄마에게 흔들리는 감정들을 토로하는 조의 모습이 불만족스러웠던 것도 사실이다. 여자에겐 사랑이 전부라는 말이 지긋지긋하지만 사랑받고 싶다고 말하는 조의 모습이 불완전해 보이면서도 공격받기 쉬운 모습이라 생각했다. 여자가 결혼을 안 하면 불행해진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위한 빌미를 제공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시간이 지나서 다시 생각해보니 조가 외로워하는 불완전한 모습들이 오히려 현실적이고, 복잡한 인간의 입체적인 면을 잘 드러냈다고 생각했다. 조와 같은 선택을 한 여성들이 조의 모습에 유대감을 느끼면서, 외로움과 불안감으로 좌절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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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 다른 네 자매의 모습은 다양한 생각을 가진 여성들을 보여줄 수 있는 조건이었다. 네 자매뿐이었지만 인물의 성격은 뚜렷했다. 조는 신념이 강하고, 자신의 신념을 잘 지켜나가려는 사람이라면 메그는 신념은 있지만 현실에 타협하는 쪽이다. 그에 반해 에이미는 사회에 완벽하게 적응한 인물이라 조의 정반대 입장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메그의 결혼식 전에 조는 메그에게 배우의 꿈이 존재했음을 상기시키며 함께 도망치자고 설득한다. 그때 메그는 “네 꿈이 내 꿈과 다르다고 해서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야.”라고 말한다. 메그의 대사를 들으며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했다. 사실 나는 조가 되고 싶었지만 조가 되기에 나의 정신은 너무 연약하고 사회에 순응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언제든 조를 버리고 메그가 될 수 있었기에 신념을 입 밖으로 내는 게 두려웠다. 메그가 되어버린 나의 선택을 나 스스로 비난할까 봐 스스로를 검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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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고민을 가지고 있다가 최근에 윤이형 작가의 『붕대감기』를 읽었다. 읽을까 말까 고민하는 사람에게 당장 책을 사주고 싶다며 친구가 강력하게 추천하는 책이었기 때문이다. 책에는 다양한 여성 인물들이 등장하고 책 속의 여성 인물들은 서로 너무나 달라 마치 조각보처럼 낱개의 존재들처럼 보였다. 특히 진경과 세연이라는 두 인물의 우정을 두고 벌어지는 미묘한 갈등은 페미니즘에 대한 인식의 폭과 입장이 다른 나와 친구들의 관계를 보는 듯했다.
 
사실 나는 은연중에 대화 속에서 친구와 같아지는 걸 추구했고, 그럴 일은 존재할 수 없었기에 미묘한 균열을 발견하는 걸 경험했다. 나는 상처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균열 없는 완벽함을 지향했다. 하지만 여자라는 공통점을 제외하고는 직업과 환경 등 모든 것이 다른 진경과 세연을 통해 내가 깨달은 것은 우정과 연대란 ‘같아지겠다는 게 아니고 상처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딸, 너는 네가 되렴. 너는 분명히 아주 강하고 당당하고 용감한 사람이 될 거고 엄마는 온 힘을 다해 그걸 응원해 줄 거란다. 하지만 엄마는 네가 약한 여자를, 너만큼 당당하지 못한 여자를, 외로움을 자주 느끼는 여자를, 겁이 많고 감정이 풍부해서 자주 우는 여자를, 귀엽고 사랑스러운 여자를, 결점이 많고 가끔씩 잘못된 선택을 하는 여자를, 그저 평범한 여자를, 그런 이유들로 인해 미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네가 어떤 사람으로 자라나도 나는 너를 변함없이 사랑할 거란다. (68p)

 

 
진경이 딸에게 해주는 이 말이 《작은 아씨들》에서 흘러나온 말이라 해도 어울릴 것 같았다.  우리의 조는 베스가 주었던 사랑과 격려와 지지로 성장하고, 그녀가 추구하는 삶과는 다른 선택을 한 메그를 통해 다른 길을 가는 사람을 존중하는 법을 배우고, 애초에 뭉쳐질 수 없는 너무 다른 천성을 가진 에이미를 보며 그를 이해하고 포용하는 법을 배운다.

또 조는 자신에게 확신을 가진 사람이면서도 때론 불안하고 흔들리며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기도 하며 진정 자신이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감각하고 인생을 스스로 꾸리고자 한다. 나는 조를 통해 엄마와 이모들, 언니와 동생들, 그리고 친구들과 같은 내 주변의 소중한 여자들과 어떻게 연결되고 사랑하고 존중하고 이해할지 생각하고 그들을 미워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사실 영화관을 나오면서 욕심 많고 때론 속물 같은 에이미의 모습이 얄미웠다. 하지만 네 자매 중 막내로 살아가는 삶이, 특히 현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자신의 확고한 주관을 가진 에이미를 완전히 미워할 순 없었다. 그럴 때 나는 조의 말을 떠올렸다. “자매를 미워하기엔 인생이 너무 짧아.”
 
때로는 나와 추구하는 방향이 너무나 달라서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도 들고 대화를 나누어도 답답하기만 해서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자꾸만 기대하게 된다. 같아지겠다는 게 아니고 상처받을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을 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우리는 조각보처럼 너무나 개성 있고 달라서 똑같아지려면 잘려나가고 모양이 변형되는 시련을 겪어야 하겠지만, 우리가 엮어진다면 하나의 멋진 보자기를 만들 수 있을 거야. 그래서 나는 우리가 사랑하고 앞으로도 사랑할 여자들의 손을 잡고 단단하게, 세상을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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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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